류승완 감독은 재주가 많다. 단편 연작을 이어붙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다양한 장르를 종횡무진하고, 개성적인 에피소드를 두드러지게 하는 재치있는 대사에 무술연기까지 다양한 재능을 선보였다. <다찌마와 리>가 보여준 이전 영화에 대한 풍부한 패러디도 흥미롭다. 그의 영화는 영화광 세대의 왕성한 인용과 자기복제 능력이 돋보인다. <피도 눈물도 없이>(3월1일 개봉)를 기대한 것은, 그런 신선하고 발랄한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발랄함에 대한 기대를 만족시켜준다. 얼굴의 흉터를 고치고 가수 데뷔가 꿈인 수진은 투견장을 관리하는 전직 복서 독불에게 맞아가며 팍팍한 날을 보내고 있다. 거친 삶을 살다가 택시운전사로 겨우 연명하는 경선은 돈을 빌려쓴 칠성파의 협박에 시달리다가 수진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간단하다. 투견장의 돈을 들고 튄다!
이런 이야기는 낯선 게 아니다. 아주 낯익다. 비루한 삶을 살던 이들이 한탕을 노리지만, 일은 꼬이기만 한다. 할리우드의 고전적 장르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한탕’ 이야기는, 90년대 쿠엔틴 타란티노나 가이 리치의 손에서 일획을 그었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하나의 점을 향하여 달려간다. <피도 눈물도 없이>도 그 길을 달려간다. 수진과 경선, 독불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교차한다. 뒷골목을 주름잡는 사람좋게 생긴 노인부터 룸살롱의 웨이터를 하며 눈치를 보는 쌩양아치까지. 그들은 서로를 속이고, 서로를 도우면서 맹렬하게 달려간다. 한두명씩 탈락하고 최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모든 것을 챙기는 서바이벌게임이다. 이 뻔한 이야기의 묘미는 캐릭터의 조화가 이루는 연금술과 절묘하게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작은 반전이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이>는 너무 많이 늘어놓았다. 등장인물들이 많은 것은 상관없지만, 캐릭터가 살아나지 않는 것은 치명적이다. 독불과 수진의 캐릭터가 구체적인 데 비해, 경선이나 다른 조역들은 너무 전형적이고 추상적이다. 특히 조연들은 필요할 때마다 등장하면서 웃음을 주고, 사건을 이어주는 역할로 만족한다. 연관고리가 끈끈하게 이어지지 않고, 많은 경우 우연적인 상황들로만 연결이 된다. 성룡 매니아인 류승완 감독이 풍성하게 집어넣은 액션도 거듭하다 보니 밋밋해진다.
정두홍의 액션은 탁월하다. 다리의 움직임도 분명하게 카메라 안에 들어가고, 동선도 확실하다. 그런데 아쉽다. 독불과 침묵맨의 싸움은 특히 그렇다. 독불은 (아마도 최소 신인왕 출신의) 전직 복서다. 침묵맨이 무술의 달인이라 해도, 권투 역시 실전 무술에서는 최고의 경지다. 그런 점에서 주먹을 주로 쓰는 독불과 다리를 주로 쓰는 침묵맨의 싸움은 주목할 만했지만, 이전의 사소한 싸움과 별다르지 않다. 장면 하나하나, 액션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잘 짜여져 있지만, 그 장면들을 죽 늘어놓고 보면 임팩트가 없이 흘러간다. 절박한 상황에서 엄청나게 좋은 운으로 언제나 빠져 나오는 독불의 모습을 보는 것도 그리 즐거운 마음은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잘 만든 영화다. 시나리오도 정교한 편이고, 신구와 백일섭 등 노장들이 대거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경쾌하다. 특히 공간의 느낌을 살려내는 촬영은 주목할 만하다. 인천의 뒷골목, 폐공장의 질척한 느낌이 잘 배어난다. 그럼에도 <피도 눈물도 없이>는 무척 아쉽다. 과잉이다. 조금만 절제를 했으면, 아귀가 딱 들어맞을 것 같다. 인물과 액션을 조금 줄이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면.
류승완 감독은 재주가 많다. 그 많은 재주를 두번째 작품에서 모두 다 풀어놓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조금씩만 선을 보여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 나올 텐데. <피도 눈물도 없이>는 과욕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한국 상업영화의 한 경향이 그 ‘과잉’이다. 감정 과잉, 이야기 과잉, 유머 과잉, ‘주제의식’ 과잉 등등. 감독이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것은 너무 많고, 그것을 절제할 사람은 없고. 그건 꼭 감독 탓만은 아닌 것 같다.김봉석 lotusid@hanmail.net▶ 언외언(言外言)의 순수, 혹은 세련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