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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인사이드 <인사이드 르윈>
김혜리 2014-02-27

※<인사이드 르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출신 스티브 매퀸 감독은 구도의 파괴력을 잘 안다. 때로는 지나치게. 매퀸의 숙고에서 비롯된 <노예 12년>의 몇몇 숏은 극장을 나온 뒤에도 계속 쑥쑥 자라나 가슴을 파고들고 뇌리에 우거진다. 노예가 된 솔로몬(치웨텔 에지오포)은 백인 감독에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간신히 발끝만 땅에 닿도록 목이 매달린다. 버둥거리는 그의 등 뒤에서 다른 노예들은 일과를 계속하고 벌레가 울고 바람이 분다. 이것이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평화로운 세계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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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의 포크 싱어 르윈(오스카 아이작)은 고생스런 여행 끝에 유명 매니저 버드 그로스만(F. 머레이 에이브러햄) 앞에서 실력을 보일 기회를 얻는다. 르윈의 노래를 듣고 난 버드의 평은 명쾌하다. “솔로로는 안 되겠어. 듀엣이었다고? 재결합하게.” 그러나 르윈의 파트너는 자살했으며 르윈에게는 듀엣이건 트리오건 새로운 팀의 일원이 될 의지가 없다. 더 애쓸 기력이 그에겐 없다. 아무런 부언 없이 르윈은 답례한다. “좋은 충고네요. 고맙습니다.” 필요한 것이 예술성이 됐건 대중의 귀에 감기는 호소력이건 임계점에 이르기에는 딱 한되만큼 부족한 재능을 안고 중년에 접어든 아티스트의 피로에, 나는 예술가가 아님에도 설복되었다. 길의 막다른 끝이 보이는데 뒤돌아보니 기력을 소진한 다리로 되짚어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날의 아득함.

형제 감독이 ‘악동’으로 불리던 시절부터 조엘과 에단 코언의 작품 대다수는 내게 경탄의 대상이었고 재미의 보증수표였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적은 없었다. “코언 형제는 아주 많은 걸 아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것이 정확히 무엇일까.” 90년대 후반 평론가 애덤 마스 존스가 <파고>에 대해 쓴 한 줄과 비슷한 감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굉장한 장치를 설계했군, 이라는 감탄이 매번 우선했다. 극도로 총명한 두뇌가 지상으로부터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며 조망하는 군상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사랑>(2003)과 <레이디 킬러>(2004)가 연타석 내야 플라이를 친 다음부터, 코언 형제의 영화는 예전에 없던 황량한 온기를 띠기 시작했다. 더 황량해지면서 더 따뜻해지다니, 모순형용으로 들리지만 사실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와 <시리어스 맨>(2009), <더 브레이브>(2010)가 이 시기의 목록이다. 그리고 <인사이드 르윈>에 이르러 마침내 나는 코언의 관객으로는 처음 영화가 내게 개인적으로 말을 걸고 있다고 느꼈다. 결국 나는 코언 형제의 전작들을 <인사이드 르윈>의 은은한 가스등 불빛에 거꾸로 비춰보게 되었으니 야릇한 조화다. 초기작부터 코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유약하고 사회적 박탈감을 짊어진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범죄를 무릅쓰며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기도했을 때 늘 사달이 일어났다. 다년간 줄거리를 요약하며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인사이드 르윈>까지 보고 나서야 나는 혈을 짚인 환자처럼, 코언의 인물들이 소동을 피우며 가지려고 했던 인생의 의미, 목표, 더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을 나와 관련된 욕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흡사 야옹거리는 소리에 이끌려 골목으로 나섰으나 번번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수염과 꼬리만 봤던 길고양이를 드디어 몇초나마 품에 안아본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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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르윈>에서 얻은 포만감은 비단 이 드라마가 심금을 울려서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코언 형제의 저수지 같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의 유장한 쓸쓸함,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의 생생한 시대성,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장엄미, <시리어스 맨>의 성격 연구, <위대한 레보스키>의 설상가상 점입가경 코미디, 복잡한 연산 끝에 원점으로 수렴하는 <번 애프터 리딩>의 구조적 유희가 모두, 이 조촐한 영화 안에 단정히 자리잡고 있다.

요즘 목발 신세인 나는 <인사이드 르윈>을 보다가 실제로 다리가 쑤셔왔는데 스크린 속에서 르윈이 많이도 걸었기 때문이다. <인사이드 르윈>은 로드무비에 일가를 이룬 코언 작품 가운데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로드무비? 과연? 극중에서 여행다운 여행은 시카고 여정 하나뿐이다. 우주비행은 노래 가사로만 등장하고 선원이 되어 항해를 나가려는 르윈의 계획도 어그러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로드무비로 기억될 까닭은 르윈이 정해진 주소지 없이 남의 집 소파에서 소파로 전전하며 살아서다. 르윈의 여행에서 핵심은 그가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덫에 걸린 르윈의 상황은 그가 묵는 복수의 거실과 복도, 지하철, 휴게소가 엇비슷하게 생겼기에 더욱 강조된다. 여기에 거의 동일하다시피한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못을 박는다.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는 서사는, 코언의 데뷔작 <분노의 저격자>부터 되풀이되는 패턴이다. 심지어 코언의 영화 세계를 한줄로 요약하면 “되는 일이 없다”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인물들이 고비마다 잘못된 패를 뽑는 이야기도 있고 모두가 최선의 선택을 했는데 더하면 엉뚱한 합이 나오기도 한다. 개별 영화의 골조는 이 영점 회귀가 얼마의 간격으로 어떻게 배치돼 있는가에 의해 결정되곤 하는데 <인사이드 르윈>의 경우는 촘촘하다. 신의 결말마다 규모도 포즈도 다양한 실망이 기다린다. 가스등 카페 무대에서 첫 등장하는 르윈은 노래하는 동안 성인이나 예술가처럼 조명되지만 공연이 끝나자마자 얻어터지고, 멋진 아파트에서 깨어나나 싶더니 유숙한 남의 집이다. 급전을 택하느라 저작권을 포기한 노래는 히트 조짐이 있고 최후의 생계수단이었던 항해사 자격증은 르윈 본인이 버리라고 말한 상자에 들어 있었다. 급기야 친구가 투신자살한 다리마저도 “틀렸다”라는 지적을 당한다. “자살 하면 브루클린 브리지지, 조지 워싱턴 브리지가 뭐야?” 이쯤 되면 <카이에 뒤 시네마>가 봉준호 영화의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뽑은 ‘아트 오브 삑사리’라는 발문을 적용하고 싶어진다. 늘 마지막 단추 하나를 잘못 채워 옷매무새가 엉망이 되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그리하여 <인사이드 르윈>은 코언 형제 시나리오가 지닌 신통한 개성을 어떤 전작보다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그들은 쓰면서 지워가는 이야기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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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윈 데이비스를 연기한 배우 오스카 아이작이 <인사이드 르윈>을 스크루볼 비극(screwball tragedy)이라고 표현한 인터뷰를 접하고 무릎을 쳤다. 코미디와 짝지어다니는 스크루볼이라는 단어는, 주고받는 대사가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고 호각지세를 이루는 쾌감에 더해 말의 반복과 리듬 자체가 영화에 음악성을 더할 때에 쓰인다. 쿠엔틴 타란티노나 최동훈의 영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대사가 주는 최상의 재미를 즐기게 해준다. 이들의 세계는 (작가 본인과) 말투가 비슷한 달변가로 가득 차 있다. 한편 코언 형제에게 있어 한층 경이로운 재능은 ‘버벅거림’을 기가막히게 쓰는 데에 있다. 동문서답, 서툰 표현이 초래하는 오해, 반쯤 삼켜버린 문장, 무의미하게 반복됨으로써 거꾸로 캐릭터의 중요한 성격을 드러내는 말버릇. 코언 영화에서 이 모든 역기능을 일으킨 말들은, 일회적 유머를 자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주제나 영화의 스타일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위대한 레보스키>의 주인공 듀드(제프 브리지스)는 동명이인인 부자로 오인되어 고초를 겪는데 그의 곤경이 깊어지는 원인은 본인의 처지를 똑똑히 설명 못해서다. 그런가 하면 게으름뱅이 듀드와 마초 퇴역군인 월터(존 굿맨)의 마이동풍식 대화는 온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둘의 성향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둘이 친구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파고>에서는 미네소타 사투리 추임새 “야?”(yah)가 단칼에 영화의 정서를 규정하고, 정작 누구를 죽이러 가는지 이름도 모르는 청부살인자와 의뢰자의 한심한 대화( “진은 어쩌고 있어요?” “진이 누군데?”)는 이 스릴러의 구성 원리를 축약해 보인다. 이 장면의 유머에 빗댈 만한 복장 터지는 대화가 <인사이드 르윈> 초반에도 있다. 가는귀 어두운 늙은 매니저와 비서가 서로의 질문에 질문으로 연신 받아치는 장면이다. 코언 형제는 르윈을 무엇보다 말을 하려다 쉽게 포기하는 인물로 썼다. 르윈은 주장을 내놓았다가 자조적으로 남보다 앞질러 그것을 스스로 반박한다. 어차피 통할 리 없다는 체념때문인데 그가 문장을 온전히 맺는 경우는 무대 위에서 노랫말로 이야기할 때뿐임을 깨달을 즈음 우리는 부쩍 울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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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무비>의 조립법

휘황찬란한 거대로봇의 향연으로 탈바꿈한 <트랜스포머>나 전함이 나온다는 전제만 장난감에서 가져온 <배틀쉽>과 대조적으로 <레고 무비>는 원작인 특정 완구의 속성을 전면적으로 영화에 반영한다. 깍둑썰기한 요철로 이뤄진 디자인과 원색 팔레트, 스톱모션의 움직임을 재현한 CG애니메이션은 기본이고, 레고를 갖고 노는 아이들의 이중적 욕구- 포장에 인쇄된 사진과 똑같이 조립해보려는 욕심과 그것을 부수고 변용하고 싶은 충동- 를 고스란히 영화의 주제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사회민주주의가 강세인 덴마크가 고국인 장난감이라서인지(설마!) 로드 비즈니스라는 이름의 자본가가 악당이다. 레고 세계와 인간계를 병치한 설정도 유사하지만 <매트릭스>의 카피대로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뜻밖의 가족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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