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카 폴리>에서 엉뚱한 말괄량이 진 역을 맡은 소연 성우.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어네스트 목소리 더빙 중인 장광 성우.
올겨울 극장가는 <겨울왕국>앓이 중이다. 개봉 27일 만에 800만 관객을 돌파한 <겨울왕국>은 역대 애니메이션 흥행 1위는 물론 역대 외화 흥행에서도 <아바타>(1330만명), <아이언맨3>(900만명)에 이어 3위에 올랐다. 흥행뿐이 아니다. 가창력이 있다 싶은 여자가수들은 너도나도 <Let it go>를 따라 부르고 <겨울왕국> 셜록 버전이나 설날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떡국왕국’ 등 네티즌이 제작한 각종 패러디 영상이 연일 화제에 오른다. 영화관 밖에서도 꾸준히 진행되는 ‘겨울왕국’ 놀이가 새로운 관객을 끊임없이 불러모은 덕분인지 개봉 5주차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매율 1위, 주간 박스오피스에서도 2위를 기록하는 등 당분간 <겨울왕국> 열풍은 쉽게 식지 않을 기세다. 한편 TV에서는 또 하나의 앓이가 진행 중이다. <BBC>에서 제작한 <셜록> 시즌3가 그 주인공이다. 탐정 셜록 홈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 드라마는 심야시간대인 만큼 시청률은 접어두고서라도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팬층을 형성해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셜록 역의 마성의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있다. 오죽했으면 컴버배치의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다며 더빙 대신 자막으로 방송해달라고 요구했을까.
성우는 배우다
여기서 두 ‘앓이’를 엮어주는 고리가 하나 있다. <겨울왕국>과 <셜록> 모두 유독 목소리 연기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점이다. <겨울왕국>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현지화 전략에 맞춰 기용한 국내 성우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엘사 역을 맡은 소연, 안나 역을 맡은 박지윤 성우는 영화를 본 관객 사이에서는 이미 스타다. 월트디즈니컴패니코리아 장혜조 부장에 따르면 “성인 관객은 전통적으로 자막 버전을 선호하기 마련인데 <겨울왕국>은 일부러 더빙판을 관람하거나 자막 버전을 본 뒤 더빙 버전으로 재관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공주와 개구리>의 샬롯, <라푼젤>의 라푼젤 역 등 그동안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주 역을 자주 맡았던 박지윤 성우 역시 “이렇게 폭발적인 반응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동안 해오던 일을 했을 뿐인데 자고 일어나니 화제의 인물이 된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반면 <셜록>의 더빙을 두고는 작은 논란이 있었다. 컴버배치의 목소리를 원하는 팬들과 성우들의 더빙판을 선호하는 팬들 사이에 신경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두고 권창욱 성우가 “더빙으로 볼 권리를 지켜달라”며 SNS를 통해 호소하기도 했다. <겨울왕국>과 <셜록>앓이는 얼핏 국내 성우 연기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반응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그간 수면 아래 묻혀 있던 성우들의 존재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한때 <명화극장> <주말의 명화> 등을 통해 TV외화를 주름잡던 스타 성우들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최근 다시 한번 성우들의 존재감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한때 성우는 외국 배우들의 페르소나였다. 1970년대 외화가 TV를 통해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성우들은 새로운 성격을 창조해내는 목소리로 시청자에게 각인되었다. “형사 콜롬보의 목소리에 최응찬, 배한성이 아닌 실제 배우 피터 포크의 목소리가 더해지면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성우들은 대중의 귀에 익숙한 존재였다. 방송 3사가 외화의 비중을 줄이는 것과 맞물려 2000년 이후 케이블 채널, 인터넷을 통한 자막이 일상화되면서 더빙 연기는 차츰 우리 곁에서 멀어져 갔다. 그렇다고 성우의 영역이 한번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생활 모든 곳에서 성우들의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다. 박영재 성우는 “은행에서 돈을 찾을 때, 버스, 지하철을 탈 때, 심지어 밥솥에서 취사가 끝났다고 알려주는 소리도 성우들이 녹음한 것”이라며 “더빙, 라디오 드라마 등 목소리 연기를 하는 것이 주요 활동이지만 광고, 방송 내레이션, 게임, 행사 진행은 물론 목소리가 들어가는 모든 영역에서 활동을 한다”고 전했다. 그는 “기업 프레젠테이션 때 ‘회장님 들어가십니다’ 같은 멘트를 한 적도 있다”며 성우들의 활동 범위가 상상 이상으로 넓음을 강조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 중이긴 하지만 ‘목소리 연기자’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성우는 어디까지나 목소리를 도구로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겨울왕국> 주인공 엘사 목소리를 연기한 소연 성우는 <겨울왕국>의 열풍이 “특별히 최근 목소리 연기에 반응했다기보다는 늘 익숙하게 들어왔던 목소리와 작품에 어울리는 연기가 적절히 결합한 사례”라며 연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얼마 전부터 규모가 작은 수입 애니메이션의 목소리 출연에 연예인들이 많아진 것에 대해서도 밥그릇 문제가 아니라 완성도가 아쉽다는 견해를 밝혔다. “성우는 긴 시간 훈련이 필요한 직업이다. 정확한 발음과 전달력, 호흡 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마케팅의 필요성도 인지하지만 목소리 연기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진 않을지 걱정되는 측면도 있다”라며 성우들의 전문성을 강조했다. 박영재 성우 또한 “성우는 목소리 좋고 특이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목소리로 연기하는 사람을 뽑는 것”이라며 연기력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성우가 되는 길은 그리 쉽지 않다. 현재는 아카데미나 독학으로 수업을 쌓은 뒤 주로 방송국 공채를 통해 성우로 입문한 뒤 프리랜서로 전향하는 구조인데 “예닐곱번 정도 떨어지는 건 예사”일 만큼 까다롭다. 예전에는 KBS와 MBC밖에 없었지만 케이블 방송이 생기면서 대원, 투니버스, 대교방송 등에서도 공채를 시행해 길이 넓어졌다. 하지만 더빙 외화의 축소로 TV환경이 변하면서 MBC 공채를 뽑지 않은 지 10년이 다 되어갈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비정규직 법안 때문에 합격을 해도 전속으로 2년간 근무한 뒤 바로 프리랜서로 전향해야 하는 구조다. 프리랜서 전향 뒤엔 유일한 사단법인인 한국성우협회에 소속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성우들을 위한 매니지먼트가 따로 없는 만큼 2년차부터 바로 무한경쟁 체제에 돌입하는 셈이다. 협회에 가입되지 않은 인디 성우들도 있지만 이 경우 캐스팅 과정을 뚫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박지윤 성우는 <겨울왕국> 이후 받았던 질문 가운데 재미있었던 것 중 하나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뭐냐는 것이었다고 했다. “오해가 많은데 한국 시장에서 성우는 작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는 입장이다. 제의가 들어오면 피치 못할 경우를 빼곤 거의 거절하지 않는다.” 더빙의 경우 캐스팅이 곧 캐릭터의 완성인 만큼 일반 배우와는 방식이 다르다. “감독이나 프로듀서, 캐스팅 디렉터들이 확보하고 있는 인력 안에서 해당 작품에 가장 적절하다 싶은 캐릭터 목소리를 골라 연락하는데 나는 음색 때문에 주로 공주 역할을 맡아왔다.” 이는 목소리 색에 이미 캐릭터가 포함되어 있어 할 수 있는 역할도 제한적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더불어 무한경쟁인 까닭에 아직 충분히 캐릭터를 쌓지 못한 신인 성우의 진입 장벽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성우들이 정형화된 연기만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갈고닦기에 따라 얼마든지 확장과 변형도 가능하다. 소연 성우처럼 인기 애니메이션 시리즈 <원피스>의 니코 로빈 역 같은 소위 쿨한 여성에서부터 <주먹왕 랄프>의 바넬로피 같은 귀여운 아이 목소리까지 광범위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성우들도 적지 않다. ‘목소리’라는 재능만큼 ‘연기’라는 전문성이 더해져야 하는 분야이기에 발성, 호흡, 연기력 등을 통해 캐릭터는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득 없는 무한경쟁의 악순환을 벗어나려면
지난해 한국성우협회 조사에 따르면 750명의 회원이 번 총수입은 약 60억원, 1인당 800만원꼴이다. 등록만 되어 있는 비활동 성우 등 평균의 함정이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생존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게 당연할 정도로 벌이가 적다. 최근 애니메이션 더빙 문제와 관련한 성우들 혹은 팬들의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 방송국 공채를 중심으로 형성된 성우 인력은 선발 뒤 2년간 전속 성우로 소속되어 주로 라디오 방송에서 활동한다. 전속 기간이 끝나면 일괄 프리랜서로 전환되는데 이후 이들에 대한 안전망이 전혀 없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일찌감치 매니지먼트를 기반으로 성장한 일본 성우 산업의 경우 성우의 수요와 공급이 자연스럽게 시장 환경에 맞춰 조절된다. 이에 반해 우리의 성우 시장은, 양성은 방송 중심이고 활동은 프리랜서로 이분화돼 있어 그 사이에 끼어 보호받지 못하는 인력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는 단순히 업계의 규모 때문은 아니다. 시장이 크고 팬층이 두터운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우간의 소득 격차나 인력 공급 과잉의 문제는 존재한다. 다만 우리의 경우 외화 더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협소한 애니메이션 시장 때문에 몇 가지 갈등 요소를 추가로 지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최근에 부각된 연예인 더빙에 관한 불만이다. <겨울왕국>을 계기로 애니메이션의 완성도를 위해 전문 성우를 써야 한다는 의견이 팬들 사이에 급격히 힘을 얻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을 근거로 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날아라! 호빵맨 극장판: 구하라! 코코링과 기적의 별> <쾌걸 조로리의 대대대대모험> 등을 수입한 얼리버드의 박기원 실장에 따르면 “주로 작은 규모의 중소 수입 애니메이션을 알리고자 마케팅의 일환으로 기획된 연예인 더빙의 경우 역으로 영화를 보지도 않고 성우 팬들에게 공격을 당해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박탈당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이에 대해 <마당을 나온 암탉>의 오성윤 감독은 “방송국의 TV더빙이 줄어들며 수요가 줄어든 성우 인력을 TV, 극장용 애니메이션쪽에서 충분히 받아주지 못하면서 생긴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오직 마케팅만을 목적으로 목소리 배역을 캐스팅하는 일부 업체도 문제지만 작품과 배역에 맞는 캐스팅일 때는 마케팅적인 요소도 얼마든지 고려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이상적으로는 “스타 성우들이 나와준다면 애니메이션 업계와 성우들이 발전적으로 공생할 수 있을 것”이란 견해도 함께 밝혔다.
소연 성우 역시 “절대적인 제작 편수와 출연 기회가 부족한 것이 문제”라는 데 동의했다. “소위 스타 성우가 나오려면 그만큼 대중에 다가갈 기회가 많아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외화 더빙의 기회도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장혜조 부장은 “<겨울왕국>의 경우 뮤지컬을 관람하듯 더빙판을 재관람하는 관객이 많았지만 실제로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자막에 관대하고 더빙을 아동용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더빙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은 것이 퀄리티의 문제라기보다 저항감의 문제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물론 TV외화조차 더빙이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극장에서까지 ‘자막과 더빙의 선택권’을 바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요원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빙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또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제2의 창작이다. 최근 <겨울왕국>이나 <셜록>의 더빙판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예전 70, 80년대 성우 전성기 때처럼 새로운 세대의 성우들도 대중적인 스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우의 수입은 기본적으로 ‘박리다매’다. 작품당 많은 돈을 받지는 않지만 녹음에 걸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많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반대로 말해 많은 작품에 출연해야만 일정 이상의 수입이 보장된다는 말이다. <겨울왕국>의 흥행과 더불어 수입이 크게 늘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박지윤 성우는 “<겨울왕국> 이후에 연달아 영화들이 개봉하면서 많은 작품을 소화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단가가 그리 높지 않다”라고 밝혔다. 보통 극장판 애니메이션 작품의 녹음에 4∼5시간이 소요되는데 출연료는 낮고 러닝개런티의 개념도 없어 TV, OVA, 광고 등 다른 녹음을 쉬지 않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일부 ‘잘 팔리는’ 성우들 이야기다. 최근엔 공중파 외화더빙 등 기존 성우가 하던 일들이 줄어든 반면 상대적으로 케이블 방송, 게임 등 다른 영역에서 성우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증가했다. 그럼에도 편당 출연 단가가 낮아 전문적인 매니지먼트나 체계화된 관리 시스템이 자리잡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결론적으로는 성우들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과 작품들이 좀더 늘어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겠지만 동시에 “목소리 연기에 대한 인식 변화”도 동반되어야 한다. 서유리 성우의 매니지먼트를 맡고 있는 락키미디어웍스의 이원준 이사는 “분야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지금 시점이말로 성우 고유의 경쟁력을 살리면서 새로운 분야로의 진출을 모색해야 할 기회”라고 매니지먼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같은 환경의 변화가 일본처럼 대규모 팬덤을 이끄는 스타 성우의 출연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아니면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위기가 될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