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다. ‘최신가요인가요’라는 난데없는 제목의 음악글 연재 이후 1년 만이다. 돌아오게 되어 기쁘고, 다시 지면을 얻게 되어 기쁘다. 이상하게 <씨네21>에 글을 쓰게 되면 수다스러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아마도 <씨네21>이라는 잡지를 그만큼 좋아하고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씨네21>의 내용도 무척 좋아하지만, (만드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어도) 주간지라는 형식이 주는 반복 역시 나를 평온하게 만든다. 할 말이 많든 적든, 재미있는 이야기든 아니든, 일주일에 한번은 영화 이야기가 나를 찾아온다는 게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위해, 오직 나를 위해, 글을 쓰고 있고, 카툰을 그리고 있고, 영화를 보고 있고, 정보를 모으고 있다. 그 결과물을 집결한 다음 일주일에 한번씩, 주간지라는 형식으로 나에게 배송해준다. <씨네21>의 필자들이 오직 나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나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그렇다, 이것은 정기구독 유혹 글이다).
인간은 사소한 반복이 주는 안락으로 삶을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요일이 있어야 6일이 경쾌해지고, 월급날이 있어야 나머지 29일이 의미 있고, 생일이 있어야 364일 동안 선물을 기다릴 수 있다. 과장하자면 그렇다. 일주일과 한달과 일년의 구분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일상성의 도를 깨닫거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멸종했을 것이다.
몸과 스포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인간은 결국 (맙소사!) 잘 반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반복을 잊을 정도로 짜릿한 욕망을 찾으며 살아간다. 가끔 한 인간이 살아온 삶의 단면을 떠올릴 때가 있다. 수많은 반복의 겹이 차곡차곡 쌓인(음, 제주 오겹살 같은?) 단면을 떠올린다. 흉측하지만 아름답고, 현기증 날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단면의 겹을 생각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말처럼 인간이란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층위가 차곡차곡 쌓인 비밀스럽고도 불가해하며 신성한 장소’다. 아, 이제야 알겠다. 우리 배에 둘린 ‘배 둘레 햄’은 반복과 경험이 만들어낸 신성하고 종교적인 장소였다. 살 빼려 애쓰지 말자. 그게 다 훈장이었다.
오래전부터 몸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몸에 쌓이는 반복과 몸이 겪는 스펙터클한 경험과 몸이 말하는 언어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영화야말로 몸이라는 주제에 가장 어울리는 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연기를 할 때 가장 힘든 게 손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중학생 때 교회의 크리스마스 연극에서 예수님이 태어난 걸 원망할 정도로 망신을 당한 이후에는) 연기를 해보지 않았지만, 그게 어떤 말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 앞에 섰을 때 그 어색한 손의 움직임 때문에, 내 팔이 조립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사진 찍을 때는 나사를 풀어서 떼어내고, 영화 볼 때도 떼어내고 (거 참, 극장 관계자 여러분, 팔걸이 좀 넓게 만듭시다), 잠잘 때도 떼어내면(팔 저리는 건 막을 수 있겠지만 어디 긁지는 못하겠군) 얼마나 편할까 생각했다. 사진 찍는 데도 그렇게 불편한데, 영화를 촬영할 때면 얼마나 팔을 주체하기 힘들까. 얼마나 어색할까(<설국열차>에서 팔을 냉동시킨 다음 부러뜨리는 장면이 갑자기 떠올라서 팔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취소하기로 했다).
영화를 볼 때면 배우들의 손을 유심히 관찰한다. 배우들의 어깨와 다리를 관찰한다. 거기엔 분명히 뭔가 이야기가 있다. 어떤 배우들은 캐릭터를 위해 어마어마하게 몸무게를 감량한다. 어떤 배우들은 반대로 살을 찌운다. 어떤 캐릭터는 다리를 절고, 어떤 캐릭터는 팔자걸음으로 걷는다. 몸이 더 잘 말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나는 <그래비티>에 등장한 샌드라 불럭의 몸을 보면서 무척 슬펐다. 그 어떤 대사보다도 몸이 슬펐다(언젠가 이 얘기를 길게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일대종사>를 생각하면 주인공 양조위가 한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막고, 또 다른 손으로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하는 무술 자세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언젠가 이 영화도…).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에서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라이언 고슬링의 등은 보는 사람을 순식간에 압도한다. 그는 정말 ‘등 연기’에 있어서는 최고봉이다.
스포츠에 대한 관심 역시 몸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됐다. 언젠가부터 나는 영화를 스포츠 보듯 하고 스포츠를 영화 보듯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저녁 맥주 한캔 앞에 두고 텔레비전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보고 있으면, 선수들의 움직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일 때가 많다. 경기의 전개가 드라마틱하기도 하지만 (아스날이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맨체스터 시티나 리버풀 같은) 훌륭한 팀의 선수들은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정확히 안다. 자신의 대사와 동선을 정확히 안다(정말이지 아스날팀의 벵거 감독과 선수들은 ‘미장센’이 뭔지를 알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배우들의 몸을 읽듯 축구를 보면서 선수들의 몸을 읽는다.
훌륭한 스포츠영화가 많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영화가 보여주고픈 몸의 매력과 스포츠에서 드러나는 몸의 속성이 어긋나기 때문일 것이다. 스포츠에서는 미장센이 중요하지만 영화에서는 몽타주도 필요하다. 위대한 스포츠 경기의 맥락을 편집하는 순간, 결정적인 순간을 하이라이트로 보여주는 순간, 몸은 사라지고 이야기만 남게 된다. 현명한 스포츠영화들은 아예 다른 방식을 택한다. <머니볼>처럼 몸을 포기하고 야구의 본질에 접근하거나 <록키>처럼 영화의 리듬에 가장 잘 들어맞는 스포츠 종목을 선택한 다음 몸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한 경기가 3분 내외의 여러 라운드로 분리된 권투는 스포츠 종목 중 가장 영화적이다, 라고 쓰면서도 영화적인 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미장센이네 몽타주네, 거창하게 둘러대고 있지만 결국 몸과 스포츠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 <노브레싱>은 실패한 수영영화인지 <리얼스틸>은 알리의 로프 어 도프(rope a dope) 전략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미식축구와 징크스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전혀 없지만 어쩐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앞서 주간지의 소중함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고서는 격주로 연재하는 게 민망하긴 하지만, 몸의 아름다움과 격렬함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써볼 생각이다.
건강히 시작해보아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다. 원문의 어감은 전혀 다르다. 고대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도 깃들길 기도한다’면서 몸만 가꾸지 말고 정신도 좀 가꾸라는 뜻으로 빈정거렸다. 원문의 의미가 어찌 변했건 간에 나는 저 말을 좀 믿는 편이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는 너무 식상하니까 조금 바꿔 말하면, ‘아프면 만사 다 귀찮다’는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요약한 느낌이고, ‘앉을 기운이 있어야 뭐라도 글을 좀 쓰지’는 너무 작가적인 변형 같고,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져야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는 피트니스센터의 회원 모집 문구 같고, ‘울림통이 좋아야 소리를 제대로 담을 수 있다’는 <K팝스타> 박진영씨의 심사평 같지만 모두 비슷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새해도 되었으니 모두들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씨네21>에 글을 쓰면 수다스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내 문제가 아니라 <씨네21> 문제다. 본격적인 ‘바디무비’는 다음 회부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