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배, 올겨울 유난히 춥습니다. 단단히 채비는 하고 떠나셨죠?
선배를 알고 지낸 지 벌써 15년째네요. 다큐멘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제가 방송 외주 프로그램 PD였던 선배를 만난 건 1998년이었어요.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만드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신물이 나. 인도에 갈 거야. 살면서 내가 충분히 느끼는 이야기를 담을 거야.” 1999년 봄이었어요. ‘인도 사람들 속으로,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며 힌디어(인도어)부터 배우던 모습, 화장지도, 생수도, 게스트하우스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달리트(불가촉천민) 마을에 가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렇게 해서 만든 <보이지 않는 전쟁: 인도 비하르 리포트>는 선배에게 ‘인도’라는 화두를 던져준 작품이었죠.
세어보니 인도와 관련된 이야기로 2편의 다큐멘터리영화, 6편의 방송다큐멘터리, 1편의 극영화를 만들었네요. “거지들도 행복한 나라라고? 사람들은 인도에 대한 환상이 많아. 현실은 보지 않고 자꾸 낭만적으로만 보려고 해. 그걸 깨고 싶어.” 선배는 인도를 멋진 곳으로만 바라보는 배낭 여행자들과 참 많이 다퉜어요.
선배, 그거 알아요? 선배는 참 무모한 사람이었다는 걸. 1999년 여름 어느 날 콜카타에서 선배가 사라졌잖아요. 다음날 오후 늦게야 선배는 나타났죠. 당연히 전 밤새 걱정을 하느라 잠을 설쳤고요. “요앞 식당의 말 못하는 종업원이랑 친해졌는데 그 친구 집이 기차 타고 1시간 걸리는 시골이라더군. 거기 가서 하루 자고 왔어. 인도의 시골이 궁금해서….” 선배는 그랬어요. 몇해 전 ‘극영화 시나리오를 준비 중이다’라고 하던 말을 그냥 한귀로 흘렸어요. 2012년 가을 신인 배우들과 스탭을 이끌고 인도로 가더군요, 극영화 <시바, 인생을 던져>를 찍으러요. 프로듀서, 연출자, 배우들이 극영화 경험은 일천했다는 점도, 95% 이상을 해외에서 촬영해야 한다는 사실도 선배를 멈추게 하진 못했어요. <오래된 인력거>를 100% DSLR로 찍겠다고 했을 때도 ‘어, 그걸로 될까?’ 싶었죠. 당시 DSLR 카메라는 장편다큐멘터리를 찍기에는 기술적으로 여러 가지 부족한 게 많았잖아요. 해외 영화제에서 다른 나라 감독들이 ‘100% DSLR로 촬영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것도 그 때문이었죠. 선배는 그렇게 무모했지만 그 무모함을 현실로 바꾸는 마법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지난 12월11일, 선배가 1대 협회장이었던 한국독립PD협회 소속 PD들과 함께 병원을 찾아갔을 때 간암 말기로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선배의 모습을 보는 건 제게 고통이었어요.
이 선배, 기억나죠? 1998년, 지금은 사라진 한 PC통신 동호회에서 선배는 ‘6mm 현장 게릴라’라는 다큐멘터리 제작 소모임을 만들었잖아요. 다큐멘터리의 꿈을 갖고 있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저는 그 소모임의 열성 당원이 되어 방장인 선배를 쫓아다녔지요. 번 돈을 탈탈 털어 산 소니 VX1000으로 제가 뭐라도 촬영을 하면, “나 일하는 프로덕션에 와서 편집해. 내가 봐줄게”라며 프로덕션 대표 몰래 편집을 할 수 있게 해주었죠. “인서트 컷 없어?” “어, 이 사람 아이레벨이 안 맞잖아.” 밤을 하얗게 새우고 편집한 영상을 보며 선배가 했던 말들이 기억나요. ‘아이레벨’이 무엇인지, ‘인서트’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도 그때였어요. 선배의 말들은 저를 흥분시켰죠. 그때 선배가 제게 주었던 건 단순한 영상문법이 아니라 희망이었어요. ‘아, 다큐멘터리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 말입니다.
춘천에서 마지막으로 선배를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어요. 근데 이상해요. 집으로 돌아가는 4호선 지하철 안에서 자꾸만 눈물이 나서 고개를 숙이게 돼요. 장례식장에서 실컷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12월19일에 개봉하는 선배의 마지막 영화 <시바, 인생을 던져>에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 극장에서 전 선배와의 추억을 한번 더 떠올려보렵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걸 보니 또 눈이 올 모양입니다. 그동안 많이 고마웠어요, 선배. 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