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순, 제주를 방문한 심광진(왼쪽) 감독과 함께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의 촬영지였던 다랑...
성주 형이 한줌 재가 되어 회색빛 바다에 뿌려진 날, 제주도엔 종일 비가 내렸다. 제주도로 이주한 뒤 자신의 삶을 안식하고 위로받았던 이 예래포구에서 그는 생을 내려놓았다. 실족으로 인한 사고사로 결론지어졌지만 나는 형이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를 미필적 고의로 놓아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형이 평소에 삶에 관해서보다는 죽음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구성주 감독은 자기의 마지막 영화 <모크샤>(Moksha)의 제목처럼 죽음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 해방을 이루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형은 장선우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거쳐 1996년 영화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로 감독 데뷔했다. 이때부터 촬영의 주무대였던 제주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는데 무엇보다도 형은 제주도의 원시적 미학성과 처연함에 흠뻑 젖어들었다. 당시 형의 조감독이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구성주 감독의 독특한 작가적 시각과 영화적 감수성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고 점차 인간 구성주의 매력에 빠져들어갔다.
구성주 감독의 시나리오에는 일관되게 영적인 종교성과 무의식에 대한 천착, 그리고 허무주의가 담겨져 있는데 이는 동시대 그 어느 감독에게서도 발견하기 힘든 그만의 영화적 특질이자 고집이었다. 물론 그만큼 대중적 호응과 상업적 성과를 이뤄내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형의 작가적 자존심 또한 대단한 것이어서 자신만의 영화적 상상력이 영화시장의 논리에 의해 변질되는 것을 참아내지 못했다. 시나리오의 대부분은 제작이 무산되었고 그 신산한 과정 속에서 형은 지쳐갔다. 그래도 끊임없이 시나리오를 썼지만 끊임없이 거절당했다. 형은 내가 아는 가장 왕성하고 독창적인 창작자였다. 다만 친절하게 시대를 설득하는 재주가 없었다. 그는 너무 순수하고 솔직했다. 오랜 망설임 끝에 지난 1월, 형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곳으로의 회귀였다. 생을 마치던 그날 오후, 형은 마을 지인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고 한창 집필하고 있던 판타지 소설 <오늘은 죽기 좋은 날>의 성과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이 소설은 초등학교 3학년인 사랑하는 딸 성현이를 위한 작품이었기에 더욱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삶에 대한 애착이 가장 강렬하던 순간, 역설적이게도 형은 느닷없이 삶을 내려놓았다.
형의 주검 앞에서 지인들이 통곡하며 허물어진 것은 상실감과 더불어 갚아낼 길 없는 커다란 부채의식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가 생전에 선물했던 기쁨의 무게를 우리는 감당하기 힘들다. 자신은 번민과 자학 속에서 헤매면서도 남에겐 즐거움을 주려고 부단히 애썼기 때문이다. 세상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해학과 익살로 끊임없이 사람들을 웃겼다. 그와 한 번만 자리를 하고 나면 사람들은 모두 구성주에게 중독이 돼버렸다. 사람들은 즐거워했고 형은 행복해했다. 지금 이 순간, 그 찬란하고 유쾌했던 기억들이 우리를 미치도록 슬프게 만든다. 인간 예수와 인간 부처, 그리고 인간 김대중을 사랑했던 사람, 그러나 정작 자신은 사랑할 줄 몰랐던 천하의 바보, 구성주가 먼 길을 떠났다. 먼저 간 친구, 조명남 감독이 형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형의 원고를 정리하다가 발견한 시 하나를 마지막으로 눈물의 글을 마친다.
마지막 詩 _구성주
이제는 사라질 때 오래 머물렀다.
이제는 갈 때 오래 머물렀다.
한 순간이었다. 이제 갈 때 이제 사라질 때
아이야, 너는 남아 있거라. 너는 들을 달리거라. 바람을 가르거라. 한없이 까르르 웃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