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육교에 설치된 응원 문구들. 마포대교의 ‘생명의 다리’에 이은 ‘응원의 다리’다.
‘잉여’라는 말이 범람하는 세태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기시감을 느꼈다. 최근 <잉투기>와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등의 영화가 만들어져 화제가 된 것이 그 원인일 것이나 나로서는 한두번 받아본 ‘호출’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긴 담론의 측면에서 봐도 <속물과 잉여>와 <잉여사회>가 최근에 책으로 묶여 나왔으니 ‘잉여’는 여전히 생명력을 갖춘 말이며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필자들에게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일 거다.
그러나 이 ‘유행’은 제법 오래되었다. <속물과 잉여>에 수록된 글들은 여러 필자들이 몇년에 걸쳐 여기저기서 발표한 것들이 묶인 것이고 최태섭씨의 단행본인 <잉여사회>의 논의 또한 그 정도 시간 동안 숙성된 것이다. 당장에 내가 청탁받은 글에서 ‘잉여’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적어도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당시에는 FANA라는 가수의 <잉여인간>이란 노래가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잉여’란 말의 감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흔히 인용되었다. 물론 이 노래는 아주 유명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름부터가 그 현상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이 거론된 것으로 보인다. 그 단어가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정서를 가진 이들을 자극한 노래로는 2008년에 ‘디시인사이드’에서 폭발적인 지지를 받아 1만장 이상 판매된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있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젊음들은 ‘뭐 한 몇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마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살았다는 무기력함을 드러내거나 ‘방학도 아닌데 오늘도 방 안에만 처박힌 내 모습’이라며 자조를 하고 있었다. 이 ‘무기력함’과 ‘자조’는 예전에는 청년세대에 결부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던 정서들이었다.
비슷한 내용으로 수렴되었더라도, ‘속물’이란 말을 둘러싼 논의들은 서구 학자의 담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차원이었다. 반면 ‘잉여’란 말에 대한 논의는 청년층의 ‘최신 유행’에 대한 식자들의 관심으로부터 자라났다. 그러다 보니 학자나 평론가들의 논의에서 비슷한 의미를 가진 구절을 추려낼 수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러했다. 출판계 여기저기서 ‘잉여’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고 그 말을 제목으로 내세우는 책에 대해 고민했다. 내가 들은 바 ‘업계사람’들이 신기해했던 말 중에 ‘잉여력’이란 말이 있었다. 가령 동전만을 활용해 정교한 탑을 쌓는다든지, 예전 같으면 경탄의 대상이 될 만한 창작물(?)을 웹상에 찍어 올리면 청년들은 거기에 대해 “님 잉여력 쩌시네요 ㅋ”라고 경탄(?)하더라는 것이다.
경탄은 순수한 경탄에 머무르지 않았고 이내 저 사람이 얼마나 시간이 남아돌면 저러겠느냐는 조소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조소는 웹사이트 게시판을 뒤져보며 남들의 ‘잉여력’을 확인하는 나 자신을 향하면서 자조가 되었다. 남아도는 것은 일이 없는 나의 시간이었고 결국엔 나라는 인간의 존재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졌다. 출판계 사람들은 이러한 말들이 유통되는 용법들이 세태를 설명해주는 무언가일 거란 직감을 가졌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잉여’의 문제를 해명하지도 않은 필자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이란 부제가 ‘굳이’ 덧붙여진 것도 출판계 사람들의 그러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물론 이 책에도 ‘잉여’의 문제가 언급되기는 한다).
장기하와 얼굴들 싱글앨범 ≪싸구려 커피≫.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이 앨범은 1만장이 넘게 팔렸다.
남아도는 인간의 시대
이전 세대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잉여’란 말의 용례는 마르크스주의의 ‘잉여가치’였을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마르크스는 상품의 잉여가치가 생산에 투입된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본가가 이윤을 얻고 있다면 그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결론이 가능했다. 인간을 착취하여 가치가 생산된다고 믿었을 때, 잉여는 인간이 만들어낸 사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넘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인간의 시대가 되었다. 마르크스의 가설은 현재의 경제체제를 살아가는 이들의 느낌으로 본다면 꽤나 낭만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 감상을 품은 것이 되었다. 물론 너무 많은 인간이 사라진다면 자본주의는 지속될 수 없겠지만, 현존하는 회사들은 추가적인 고용 없이도 추가적인 생산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새로운 빈곤>에서 말했듯 회사가 노동자들 몇 천명을 구조조정했다고 뉴스가 뜨면 그 회사의 주가가 상승하는 상황이 종종 연출되었다. 설령 회사가 성장해도 고용이 증대되지 않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가 되었고 이미 고용된 이들이 아닌 고용될 필요가 없는 이들은 ‘남아도는’ 인간이 되었다. 그렇게 노동시장의 후발주자로 집단적으로 생산에서 배제된 이들이 무기력감과 자조감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엄기호와 박권일이 여기저기서 지적했던 것처럼, 자본주의가 상승하는 시기에 살았던 이들이 체제의 착취를 피해 그에서 탈주하기 위해 고민하고 투쟁했다면, 오늘날의 청년들은 체제가 자신을 착취하지 않고도 생산을 완료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고 두렵다. 그들이 불만을 터트리는 것은 ‘체제가 왜 나를 착취하는가’라는 지점이 아니라 ‘체제는 왜 나를 편입시켜주지 않는가’라는 부분이다. 하강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불만은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도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자의 칭얼거림’이었지만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도 ‘체제 바깥을 고민하지 못하는 순치된 이들’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들은 예전의 자신들보다 훨씬 덜 진취적이고 훨씬 더 영악해진 청년들의 ‘인성’을 보았다. 보수주의자들은 변화된 세상에 대응하기 위한 혁신을 말했고 진보주의자들은 세상이 변화했기에 다른 투쟁이 필요하다 외쳤으나 그들 역시도 자신이 성장한 시대의 상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편차는 있다. 가령 “예전에도 취직을 하지 못한 이들은 그런 감상을 지니지 않았겠느냐. 그리고 설령 숫자는 다소 줄었다고 해도 오늘날에도 취직을 한 이들은 그런 감상에서 벗어나 있는 게 아니겠느냐”라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 문제를 ‘세대문제’가 아닌 ‘계급문제’로 봐야 하는 게 아니겠느냐는 지적이 이어진다. 당연히 시대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듯 거기엔 계층의 문제가 있다. 공무원이나 대기업 정규직을 노리는 이들의 ‘잉여’ 정서와 애초에 그것을 포기한 이들의 ‘잉여’ 정서는 결이 꽤 다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시대의 모든 사회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특징으로만 분석될 수 있고 나머지 논의들은 부차적이거나 허위의식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굳이 그 어휘체계 속으로 들어가 얘기해본다 하더라도, 자본주의가 어떤 구간을 지나고 있고 어떤 전략으로 그 상황에 대처하고 있느냐에 따라 자본가가 창업하고 경영하는 방식도 노동자 계급이 분화되고 모종의 의식을 가지게 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세상사의 문제가 깃들어 있고 그 문제를 인식해야 투쟁도 가능할 것이다. 종종 좌파들은 “자본주의는 보편적인 체제가 아니고 역사적인 체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내심 ‘내가 배운 그 자본주의만이 보편적 자본주의이며 자본주의의 역사성에 대한 다른 분석은 불필요하다’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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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바꿀 수 없는 창작물
오늘날의 ‘잉여’ 정서는 계층별로 다소 다르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특정 계층만의 일은 아니다. ‘자리’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잉여’ 정서는 이전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학벌 사회의 승자인 명문대생 사이에도 침투했다. 1970년대의 10대를 다룬 <말죽거리 잔혹사>는 물론 1990년대의 10대를 다룬 <비트>에서도 ‘잉여인간’이란 말은 대학을 못 간 이에게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 학생들도 광범위하게 무기력감과 자조의 감정에 휩쓸린다.
이에 대해선 이전 시대보다 대학생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문제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못지않은 ‘스펙’을 맞추고 취직 준비를 열심히 하는 이들에게도 다른 사정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자기 학대에 가까운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야 심신의 안정을 찾고,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못할 때에는 그런 자신을 자기 학대에 가깝게 엄청나게 비난한 이후에야 심신의 안정을 찾는다. 이런 이들은 그들의 상황에 대해 ‘괜찮아. 잘될 거야’라는 위로를 듣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을 준비만 하지 살아가지는 못하는’ 느낌에 휩싸여 다른 방식의 무기력감과 자조에 빠진다. 공무원이나 공기업이나 대기업 정규직의 ‘관문’을 통과한 이들도 그 이전의 몇년을 생각하며 그와 같은 정서에 쉬이 공감이 간다고 말하는 경우도 제법 있다.
또 ‘관문’을 통과한 이들도 한시름은 놓겠지만 자기 눈에 보이는 회사 선배들의 인생경로를 그대로 모방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진보주의자들은 청년들이 부도덕한 재벌기업의 간부가 되고 싶어 하는 세태를 비판하겠지만 오히려 최근의 세태는 대기업 정규직들도 첫 직장에서 몇년 동안 ‘커리어’를 쌓고 적정한 시기에 이직하거나 돈을 모아 창업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입사 과정과 입사 이후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요구받고 그것에 순응하지만 그 충성심이야 회사를 다닐 동안에만 유지되는 것일 뿐 회사를 떠날 조건이 되었을 때 제 선택을 돌이킬 동기로는 기능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는 ‘잉여’나 ‘잉여력’이란 말에 호기심과 기대를 가진다. 이들이 보여주는 어떤 생산력에 천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환전 불가능한 생산물’이다. 부모 세대가 쌓아올린 물질적 부를 활용해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며 감수성을 길러온 청년세대는, 그렇게 길러진 ‘환전 불가능한 재능’을 웹에서 공짜로 풀어낸다. 드라마나 영화를 활용한 2차 창작물은 기본이요, 스포츠나 게임에 대한 패러디는 중계에도 반영되는 유행어를 낳을 정도다. 디지털 컨버전스로 인해 창작의 기술적 문턱은 낮아졌지만 경기 불황으로 인해 ‘환전 가능한 창작물’을 만들기는 쉽지 않은 시대에서, ‘잉여’들이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저 많은 것들은 모종의 활력으로 비칠 법도 하다. 오히려 체제에서 벗어나길 원했던 이전 세대의 진보주의자가 볼 때, 그것들이 모여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기대하는 듯하다(그리고 대체로 이 가능성도 결국엔 ‘환전 불가능하던 재능의 환전 가능화’의 영역에 머문다). 그래서 ‘잉여’를 소재로 한 많은 문화적 창작물들은 청년층이 스스로를 잉여로 칭할 수밖에 없는 세태를 일정 부분 묘사하면서도 모종의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그런 종류의 달달한 환상을 양념처럼 뿌린다.
그러나 그러한 ‘잉여들의 유희’도 기본적인 생활수준 위에서야 가능할 것이다. 또 청년 세대의 많은 이들이 ‘잉여’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들의 유희가 청년 세대 모든 이들에게 환영받지도 못한다. 가령 ‘잉여를 벗어난’ 이들과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사는데도 잉여’라고 느끼는 이들은 더이상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을 배척할 것이다.
정치의식뿐만이 아니라 취향도 파편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유희의 파급력도 대체로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문다. 2012년 거대한 축제로까지 발전한 T-24 축제(‘벌레’라는 네티즌의 내기로부터 출발한 24인용 지휘소 텐트 혼자 세우기 놀이)가 징병제 군대의 경험이라는 강제적인 보편적 체험의 기반에서야 가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잉여’가 공통적인 정서라고 해서 이들이 정서적으로 하나의 집단으로 묶일 근거는 되지 못하는 것 같다.
프리랜서와 직장인의 관계처럼
필요한 것은 가진 자들이 흔히 가진 ‘배제된 자들이 세상을 뒤엎을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이 아니다. 그런 힘은 대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괴물이 되었으니 다음 세대를 기다려야 한다는 복음도 불가능하다. 이런 조건에서라면 다음 세대 역시 출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정치적 주체로 각성시키려는 욕망을 모두가 품고 있지만 냉소의 장벽이 크다는 현실을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잉여정서를 가진 이’와 ‘잉여담론을 만드는 이’의 관계는 프리랜서와 직장인의 관계와 흡사하다. 모든 직장인은 제 월급의 2/3 정도는 버는 프리랜서를 욕망한다. 그리고 모든 프리랜서는 퇴근 뒤의 자유시간이 보장된 직장인을 욕망한다. 그리고 양자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세계의 문제다. 잉여로 살더라도 괜찮을 수 없고, 잉여를 벗어나더라도 행복할 수 없다.
결국 ‘잉여담론’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힘은 ‘잉여’의 거울상이다. 이 동전의 양면을 직시하고, 상대방을 악마화하지도, 신비화하지도 말고 이 세상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섣불리 결론을 내리고 행동을 요구하기 전에,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감각을 복원해내거나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잉여’는 당신의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