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본 피칭 중 가장 흥미진진했다.” 다큐멘터리 피칭 포럼 2013을 지켜본 영화산업 관계자들은 긴장감 넘치는 행사였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ㄷ’자 형태로 앉은 패널 11명과 투자자를 비롯해 영화산업의 여러 플레이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가작 8편의 감독과 프로듀서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패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답하는 시간도 가졌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연출의 비밀을 훔쳐가려는” <진경산수, 임권택>을 준비하고 있는 정성일 감독은 “15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다소 긴 것 같다”는 패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좋은 영화를 찍는 감독이 있으면 기다리는 관객이 있습니다, 라고 왕빙 감독이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단 한명의 관객, 임권택 감독님만을 생각하며 만들겠습니다.” 해외 방송을 타깃으로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박혁지 감독의 글로벌 프로젝트 <춘희막이>는 국내 극장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으며 극장 개봉이라는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게 됐다.

12월6일과 7일 양일간 인천아트플랫폼과 하버파크호텔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피칭 포럼 2013에 참가한 작품은 총 8편. <길 위의 피아노>(감독 최정민)는 거리에 나간 피아노가 세상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사연을 관찰한다는 독특한 설정의 이야기다. <레드 마리아2>(감독 경순)는 감독의 전작 <레드 마리아>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으로, 일본 위안부와 성노동자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작품. <림보에서 보낸 한철>(감독 이창재)은 호스피스 병동이라는 공간과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반짝이는 박수소리>(감독 이길보라)는 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청각장애 부모를 소재로 한 사적 다큐멘터리. <살아남은 아이들>(감독 전상진)은 최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소재로 해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재연 등 여러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작품이다. <조국 땅을 떠나며>(감독 윤재호)는 한 탈북 여성을 소재로 한 휴먼다큐멘터리다. <진경산수, 임권택>은 신작 <화장>의 현장을 따라다니며 임권택 감독의 연출 비밀을 탐구한다. <춘희막이>는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온 두 여자, 춘희와 막이의 삶을 다룬 이야기다.

영화계, 방송다큐멘터리 진영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창작자들이 투자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 피칭 포럼 2013은 의미가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조지훈 PD는 “행사가 잘 끝났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행사 이후 작품이 완성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내년에는 패널의 구성, 파트너 매칭을 더 세심하게 준비해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없던 영화산업 관계자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아시아 각국 다큐멘터리들도 함께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극장개봉지원상, KT&G 상상마당 씨네랩 후반작업 지원 등을 수상한 <살아남은 아이들>의 한선희 프로듀서는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많이 나오고 있고, 보다 많은 관객과 호흡하려는 작품들이 기획되고 있는 만큼 영화진흥위원회와 여러 창투사들이 다큐멘터리 지원과 투자에 눈을 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다큐멘터리 피칭 포럼 2013 수상 리스트

-극장개봉지원상 <살아남은 아이들> -KT&G 상상마당 씨네랩 후반작업 지원 <살아남은 아이들> <진경산수, 임권택) -스타이스트 디지털랩 후반작업 지원 <춘희막이> -푸르모디티 영어자막 번역 및 제작 지원 <살아남은 아이들> <춘희막이> <림보에서 보낸 한철> -KCA 베스트 피칭상 <춘희막이> -KCA & 펀딩21상 <길 위의 피아노> -방송콘텐츠진흥재단 펀드 지원작(3천만원) <살아남은 아이들> -SJM 문화재단 펀드 지원작 <춘희막이>(6천만원 지원), <림보에서 보낸 한철>(2천만원 지원)

방송다큐, 극장 개봉해볼까

4관왕에 오른 <춘희막이> 박혁지 감독

-스타이스트 디지털랩 후반작업 지원, 푸르모디티 영어자막 번역 및 제작 지원, KCA 베스트 피칭상, SJM 문화재단펀드 지원작 등 4관왕에 올랐다. =피칭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된 건 2009년이었다. 혼자서 촬영하거나 소규모의 스탭을 이끌며 작업하는 까닭에 작품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감이 안 잡힐 때가 많다. 그렇다고 극영화처럼 스탭들과 논의해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피칭 행사를 통해 내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이번 피칭 포럼은 어땠나. =얼마 전 다녀온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피칭 포럼을 벤치마킹한 것 같은데 정말 열심히 준비를 했더라. 여의도쪽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내가 이런 행사 아니면 언제 또 평소 좋아했던 정성일 감독을 만날 수 있겠는가.

-피칭을 하면서 제작 방향이 달라진 점은 뭔가. =원래는 방송다큐멘터리를 염두에 두고 진행해왔다. 그것도 우리나라보다는 해외 방송을 대상으로 한 글로벌 프로젝트로 만들고 싶었다. 피칭 포럼에 국내 극장 관계자들이 많이 왔는데 우리 영화에 관심을 많이 보이더라. 극장 개봉은 다른 나라 얘기인 줄 알았는데, 잘 준비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다 싶더라.

-<춘희막이>는 어떻게 구상하게 된 작품인가. =한 남자의 두 아내로 50여년을 함께 살아온 춘희와 막이를 알게 된 건 2009년이었다. 방송용으로 촬영한 까닭에 제작 기간이 무척 짧아 아쉬웠다. 정실과 후실은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인데 두 할머니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한이불을 덮고 자는 게 가능할까 궁금하더라. 그래서 2011년 다시 두 사람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해 지금까지 진행해오고 있다.

-현재 진행은 어떻게 되고 있나. =80% 이상 촬영했다. 워낙 사건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까닭에 옆에서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웃음)

최정민 감독(왼쪽).

순간의 진실을 믿는다

KCA & 펀딩21상을 수상한 <길 위의 피아노> 최정민 감독

-투자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칭을 한 소감이 어떤가. =피칭은 처음이었다. 경험이 없다보니 남들 앞에서 프로젝트를 소개한다는 게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해볼 만하더라. 팀 안에서만 생각했던 문제의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거기서 발생한 대중적인 리액션이 프로젝트를 정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무엇보다 영화계와 방송다큐멘터리 진영이 힘을 합쳐 창작자와 투자자가 만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길 위의 피아노>는 어떻게 구상하게 된 프로젝트인가. =영국 버밍엄에서 시작된 공연 퍼포먼스다. 서울시에서도 문화 행사로 진행한 적이 있다. 피아노 위에 놓인 카메라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사연을 담아내는 리얼리티쇼 같은 다큐멘터리다. 어떤 사람은 피아노 전공자인데 생계 문제로 피아노를 포기했다. 또 어떤 사람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피아노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인물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유행인 지금, 피아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는 방식은 신선하다. =관찰이 수동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대상을 만나는 순간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이 프로젝트는 여러 삶의 조각들이 모여 진실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또 이건 아주 음악적인 다큐멘터리다.

-피칭 과정에서 들었던 다른 사람의 의견 중 도움이 된 건 뭔가. =피아노가 가진 음악적인 부분을 좀더 대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의견. 음악다큐멘터리지만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접점을 찾아야 할 것 같다.

-현재 진행 사항은 어떻게 되나. =현재 40% 정도 촬영을 진행했다. 아무도 없는 곳, 도시 외곽의 골목길, 눈 오는 날의 거리, 시골 창고, 요양원 등 아직 촬영을 해야 할 곳이 많다.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