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란(26)은 여자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을 부를 때 ‘헤이 맨’이거나 ‘행님아’ 둘 중 하나고, 술은 말술에다, 욕도 잘하고 거짓말도 수준급이다. 경상도 사람 앞에선 경상도 사투리 척척 써대고, 전라도 사람을 만나도 “동향”(同鄕) 소리부터 찾는다. 사기를 쳐도 한몫 단단히 잡았겠다는 말에 “버얼써 협찬사들 상대로 숱하게 사기쳐먹었다”고 능글능글 대꾸하는 그녀는… 몹시 터프한 여자다.
한때 남자들이 무지 싫어 일부러 여대 가고, 술을 먹다가도 남자들이 접근하면 술상까지 뒤엎은 그녀였지만 지금은 남자 스탭이 80%인 현장 탓에 많이 나아졌다. 그래도 남자에게 지는 건 여전히 못 참는다. 짐이 무거워 보인다고 혹여 선심 쓰듯 거들었다가는 오히려 분위기 험악해지기 일쑤다. 작업 배분할 때 그래서 그녀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진다. 그녀에게 “여자니까” 혹은 “힘들까봐”란 구구한 주석은 “남보다 못하니까”라는 의미 이상으로 들리지 않는다.
제작부일만큼은 여자가 더 잘할 수 있는 분야라는 게 그녀의 생각. 집 헌팅 나가서 초인종이라도 누를라치면 남자 스탭들은 열에 일곱이 문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퇴짜를 맞지만, 여자가 서 있으면 대부분 순순히 들여보내 주는 것도 한 이유다. 술 먹고 촬영장에 나타나 깽판 놓는 동네 아저씨들에게도 여자 스탭이 특효다. 혹시나 위압적인 분위기로 어떻게 하려다 보면 더 틀어져 아예 눌러앉는 게 그들의 심리. 그럴 땐 눈웃음에다 애교 작전으로 ‘제 발로’ 걸어나가도록 하는 게 최고다. 애교 못 부리는 그녀도 그럴 땐 천상 여자 흉내를 낸다.
대학교 2학년이 되던 98년, 그녀는 학교와 부모에겐 “취업이 됐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영화 제작부일을 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다단계 판매업까지 뛰어들어 근근이 연명하던 6개월이 지나고 드디어 구리에 있는 조명회사에 취업하면서 영화와의 긴 인연에도 출근 도장을 찍는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현장으로 출근하라는 말이 없었다. 스스로 일정을 알아내 현장에 서 있기를 몇 개월, 첫 영화 <퇴마록>은 그녀의 인내심만으로 채워진 쓰지만 보람있는 ‘첫 경험’이었다. 애초 제작부일을 원했지만, 운전면허증도, 컴퓨터 운용 실력도 없는 나이 어린 여자에게 쉽사리 기회가 올 리 없었고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한 게 조명일이었다. 하지만 하다보니 정도 붙고, 재미도 쏠쏠해 3년간 <가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등 7작품이나 찍었다.
<휴머니스트>로 비로소 제작부에 합류한 뒤에 두 번째로 찍은 게 이번 <공공의 적>이다. 스탭들의 끼니 해결부터 장소 헌팅, 도로 통제, 조연 및 엑스트라 캐스팅, 주민들에게 양해 구하고 공문 보내고, 나중에 제작비 정산까지 그녀의 말마따나 “좋게 말하면 스탭들의 어머니요, 나쁘게 말하면 시다바리”인 제작부일이지만, 그녀에겐 여전히 감독보다 더 파워있는 위치다. “전 끝까지 이 길만 갈 거예요. 그러다 나중에 제가 쓴 시나리오로 영화 한편 만들거고요. 물론 제작자 국수란으로 말이죠.” 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
프로필
1977년생
조명
<짱>(1998)
<이재수의 난>(1998)
<퇴마록>(1998)
<거짓말>(1999)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가위>(2000)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제작부
<휴머니스트>(2000)
<공공의 적>(2001)
(2002)(김상진 감독)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