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에서 일한 흑인 집사 알론소 필즈는 회고록인 <백악관에서의 21년>에 이렇게 썼다. “너무 길게 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지 마라.” 그것이 집사의 자세다. 필즈는 루스벨트 대통령 옆에서 진주만 폭격 소식을 들었고, 한국전쟁이 시작된 날엔 휴가지에서 황급히 돌아온 대통령과 수석 보좌관들의 모임을 준비했다. “우리는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역할은 매우 작지만, 어쩌면 하찮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없다면 그들은 그리 많은 일을 할 수 없다.” 필즈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그림자로 남아야만 했다.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을 목격하면서도 누구도 의식하지 못하도록, 벽지에 새겨진 무늬처럼 희미하게 존재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21년도 아니고 34년 동안 자신의 존재를 지워야만 했던 사람의 세월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흘러갔던 것일까.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이하 <버틀러>)는 그 세월을 되짚는 영화다. 1952년부터 1986년까지, 흑인들은 로자 파크스와 함께 버스를 보이콧했고, 마틴 루터 킹과 말콤 엑스를 총탄에 보냈으며, 블랙팬서스 당원들을 폭력에 잃었고, 싸워야 하는 이유도 모르는 채로 베트남전쟁에 징집되었다. 그 세월을 오롯이 백악관의 그림자로 존재했던 남자. 주연인 포레스트 휘태커의 전작을 빌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고스트 독: 집사의 길>을 따라간다.
마이너리티 집사 리포트
<버틀러>는 트루먼부터 레이건까지 여덟명의 대통령을 거친 백악관 집사 유진 앨런을 모델로 삼은 영화다(필즈는 앨런을 면접하여 뽑은 선임이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61년이 지난 1926년, 이론적으로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백인 농장주는 어린 세실 게인즈의 어머니를 강간하고 아버지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아니,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진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를 잃은 세실을 동정한 농장주의 어머니는 소년을 집안일을 하는 하인으로 키우고 그것이 세실의 운명을 바꾼다. 남편과 더불어 영혼도 잃어 목각 인형처럼 굳어진 어머니를 두고 남부의 목화 농장을 떠난 세실(포레스트 휘태커)은 호텔에서 일하다가 백악관 스탭으로 발탁된다. 그리고 아내(오프라 윈프리)와 두 아들. 세실의 가족은 이웃의 부러움을 사는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지만, 우등생이었던 아들 루이스가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흑인 민권 운동에 투신하면서 분열이 시작된다. 흑인 집사의 아들 루이스는 결코 백인에게 복종하려 하지 않았다.
이 영화의 감독 리 대니얼스는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을 하다가 <몬스터 볼>을 제작했고 <프레셔스>를 연출한 사람이다. 그리고 흑인이자 게이다. 미국 사회의 마이너리티 중에서도 마이너리티인 셈이다. 아버지에게 강간당해 두 아이를 낳은 10대의 흑인 비만 소녀 프레셔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10대도 충분히 불행했다. 어머니 때문에 백인 천지인 고등학교로 진학한 대니얼스는 학교의 유일한 흑인이자 (유일하지는 않았겠지만) 게이였다. 그래서 날마다 놀림을 당했다. 깜둥이, 호모라고. 경찰이었던 아버지가 일찌감치 순직한 10대 소년에게 이보다 가혹 한 일이 있을까.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대니얼스는 유진에 관한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를 바탕으로 삼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기둥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이끌렸다. 하지만 촬영을 시작하고서 이내 깨달았다, 이건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모델이 되기는 했지만, 앨런의 삶은 세실이 겪은 고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아버지는 살해당하지 않았고, 그의 외아들은 미국 정부의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퇴직했다. 그렇다고 해서 흑인의 노동이 미국을 떠받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미국 애틀랜틱시티의 유력 인사로 평생을 살았던 넬슨 존슨은 TV시리즈로 제작되기도 했던 저서 <보드워크 엠파이어>에 20세기 초반과 중반 환락의 전성기를 누렸던 애틀랜틱시티의 역사를 기록했다. 백인 독재자가 군림했던 그 도시의 밑바닥에는 흑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건을 팔에 걸고 관광객들의 시중을 들었고, 호텔을 청소했고, 접시를 날랐다. 그리고 선거철이 되면 푼돈에 동원되어 도시를 지배하는 백인을 위해 자신의 표를 팔았다.
핫스프링스의 리조트에서 일하다가 고객의 추천으로 백악관에 들어간 유진도 그들의 일부였다. <버틀러>에서 세실과 그의 이웃들은 세실이 백악관에 취직한 것을 축하하며 파티를 한다. 제법 출세한 것처럼 보이지만, 백악관의 식료품 저장실 담당으로 일을 시작한 앨런은 미국 평균 임금보다 1천달러가 적은 연봉 2400달러를 받았다.
앨런은 대통령과 그 가족들과 사이가 좋았다. 트루먼은 그를 ‘진’이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재클린 케네디는 영화에서처럼 실제로도 그에게 남편의 유품인 넥타이를 건넸다. 그리고 낸시 레이건은 그를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의 방미 만찬에 초대했다. 앨런의 아내 헬렌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던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날 샴페인을 마셨다우”라고 웃으며 남편을 건너다보았지만, 앨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샴페인을 정리한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단 한번도 결근한 적이 없다고 자부심에 차서 말한 앨런은 충직한 집사였다. 케네디의 장례식에 초대받았지만 손님들을 접대해야 한다는 이유로 백악관에 남아 다과를 준비했다. 그는 직업 정신이 투철했다. 그리고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의 자질이라고 선언한 품위가 있었다. 앨런뿐만이 아니었다. 서비스 산업에 종사한 많은 흑인이 자신의 일에 충실했다. 그러나 거기엔 비애가 있었다. <버틀러>에서 나이 먹은 흑인 바텐더는 말한다. “백인의 눈으로 보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려면 마음을 읽어야 한다. 백인을 미소 짓게 하라.” 그들에겐 백인만을 위한 얼굴이 따로 있었다.
한 가족의 역사가 한 민족의 역사가 되기까지
<버틀러>에서 세실의 동료로 출연한 쿠바 구딩 주니어도 그랬다. 백인 스포츠인 아이스하키를 했던 그는 백인 동료들이 가득한 로커에서 쓰는 얼굴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그 다른 얼굴을 요즘 나는 내 아이들이 다니는 비싼 사립학교에서 쓰곤 한다.” 하지만 변하는 것도 있다. 34년을 일하면서 앨런은 동료를 제외하고는 백악관에서 흑인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백악관 살림을 지탱하는 건 흑인 노동력이었다. 케네디의 보좌관 한명은 백악관 구석구석에 흑인만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시대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앨런은 백악관에서 훗날 미 합참의장과 국무장관이 되는 콜린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에게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 <버틀러>에서 세실은 “세상은 변하고 있었는데 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고 독백하지만, 앨런은 그날 아내에게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충격적이었던 대니얼스의 전작 <프레셔스>와 달리 <버틀러>는 조용한 영화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세실은 현대사를 바꾼 순간들에 함께 머무르며 그저 조용히 차만 따른다. 하지만 그것이 올해 쉰세살인 대니얼스가 자신의 부모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부모님은 마틴 루터 킹을 존경했지만, 그가 가져온 변화에 조금 불안해했다. 말콤 엑스는 두려워했다.” 그의 부모는 침묵하는 다수에 속했지만 그래도 된다고 백인에게 동의한 적은 없었다.
대니얼스는 <버틀러>를 만들면서 비로소 자기 부모의 마음에 공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근무 중에 순직하기 전까지 아들을 자주 두들겨 팼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아버지가 그랬던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어릴 적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세대를 이어온 문제였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조용하게 미국을 견뎌온 흑인의 역사로 확장되었다.
오바마가 당선된 2008년,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유진 앨런의 기사로 시작된 한 과묵한 집사의 이야기는 다른 이들의 마음도 움직였다. <버틀러>의 제작비는 A급 스타 한명의 출연료도 되지 않는 3천만달러에 불과했지만 그걸 모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흑인 기업가와 스포츠 스타들이 여력이 되는 대로 직접 영화에 투자했다. 이 영화의 프로듀서가 41명이나 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주연 포레스트 휘태커를 비롯해 오프라 윈프리, 테렌스 하워드, 쿠바 구딩 주니어 등이 약소한 출연료를 받았고, 머라이어 캐리와 제인 폰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로빈 윌리엄스, 존 쿠색 등의 스타들이 조그만 배역으로 등장했다.
대니얼스에게 <버틀러>를 위해 자기 인맥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겠다고 장담한 윈프리는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의 역사를 배운 학생이다. 그것은 아프로-아메리칸의 역사이기도 하다. 당신이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 당신은 스스로의 힘뿐만 아니라 모든 선조의 힘과 더불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건 <버틀러>가 우리 역사의 일부를 경험하는 기회를 이 세상 나머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동력이기도 하다.” 한 가족의 역사는 한 민족의 역사가 된다. 그렇게 <버틀러>는 노예나 다름없는 목화밭 일꾼들에서 넬슨 만델라의 석방을 외치는 자유로운 흑인 시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역사를 접시에 얹어 관객에게 건넨다.
을(乙)트라맨이야
픽션을 넘나드는 유명한 집사들
소설 <남아 있는 나날>에는 어느 전설적인 집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도로 부임한 주인을 따라간 그는 오후 만찬을 준비하다가 식탁 아래에서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공손한 태도로 주인에게 총을 빌린 그는 세발의 총알을 발사한 다음 돌아와 조용히 말했다. “식사는 평소와 같은 시각에 제공될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집사는 현실에도 존재한다. 후버부터 아이젠하워까지, 백악관에서 21년을 일한 집사 알론소 필즈는 휴가를 떠났던 트루먼 대통령이 갑자기 워싱턴으로 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느닷없이 대통령과 수석 보좌관 열네명을 위해 칵테일과 정찬을 준비해야 했던 필즈는 운전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주방에 있는 재료를 검토해 메뉴를 짰고, 마찬가지로 휴가를 떠났던 백악관 요리사 두명을 경찰에 긴급 수배했다.
집사는 또한 세심하고 예민해야 한다. 영화 <고스포드 파크>에 기술 자문으로 초빙된 베테랑 집사 아서 인치는 저택 세트에 들어가자마자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발견했다. “제복을 입은 하인은 하얀 타이를 매야 하는데 검은 타이를 매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집사는 은퇴하는 순간까지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 <남아 있는 나날>의 스티븐스는 이미 늘그막에 접어들었는데도 자신에게 결핍된 유일한 자질인 농담을 수련하기로 결심한다. 잘되진 않겠지만.
픽션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집사는 아마도 <배트맨> 시리즈의 앨프리드일 것이다. 웨인 가문의 집사로 영국 특수부대 출신인 그는 다양한 배우들이 거쳐갔는데, 요즘은 마이클 케인이 연기하고 있다. 덕분에 반세기 넘게 연기를 해온 거장이자 작위까지 받은 케인 ‘경’은 젊은 관객에겐 집사 이미지로만 남을 위기에 처했다. 신작도 <해리와 집사>인데, 해리가 아니라 집사다.
빅토리아 시대에 절정기를 누렸던 집사 자리는 차츰 여성에게도 개방되었다. 여집사가 처음 문헌에 등장한 것은 1892년. 남자를 쓰기가 비싸서 정원 일을 하던 소녀를 집사로 키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남녀 구별이 엄격한 중동 출신 가정에서 주로 여집사를 선호한다고 한다.
우리의 이름 없는 영웅들에게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 리 대니얼스 감독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끌린 점은 이것이 흑인 민권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내가 러브 스토리라고 생각한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나도 아버지가 있고, 10대인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리 대니얼스는 게이지만 부모가 양육을 포기한 갓난 조카 둘을 입양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피부색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러브 스토리다. 하지만 촬영을 시작하고 KKK가 버스에 화염병을 던지는 장면을 찍으면서, 비로소 이 영화가 그보다 거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버스 장면은 물리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힘든 장면이었나. =맞다. 가장 힘든 촬영이었다. 우리는 무척 더운 날 버스 안에 있었는데, 고증을 위해 동원한 그 버스는 1960년대에 제작된 것이어서 에어컨이 없었다. 촬영을 시작하자 KKK가 다가왔다. 나와 아이들, 그러니까 배우들은 진짜 무서웠다. 그리고 “컷”을 외쳤지만 창문이 닫혀 있어서 밖에선 듣지 못하고 계속 다가왔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런 거였구나, 이게 그 아이들이 겪은 일이었구나. 전선(戰線)에 있던 아이들, 흑인과 백인이 섞여 있었던 그 젊은이들은 영웅이었다.
-세실의 아들 루이스는 현대 미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지나치게 많이 겪는다. 작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지. =아니, 세실이 아들이 주도하는, 만델라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장면을 제외하곤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살았던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내 삼촌은 마틴 루터 킹과 함께 시위를 했고, 그 뒤엔 말콤 엑스와 함께했다. 그다음엔 블랙팬서스 당원이 되었고. 많은 아프로-아메리칸이 삼촌과 비슷했다. 그들은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했지만 그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급진적이 되었으며, 다시 그보다 더 급진적으로 변했다. 많은 이가 죽었다. 그들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었다.
-이 영화엔 오스카 수상자인 포레스트 휘태커를 비롯하여 쿠바 구딩 주니어, 제인 폰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로빈 윌리엄스, 테렌스 하워드, 그리고 오프라 윈프리 등이 출연했다. 어떻게 이런 배우들을 모을 수 있었는가. =내가 평소 하는 대로 그물을 던지고 낚아올렸다. (웃음) 사실은 주제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접근한 배우들은 대부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줄 돈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사실 그들에겐 손해 보는 거래였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많은 배우가 다양한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활동가였던 것이 도움이 됐다.
-호텔에서 세실에게 일을 가르친 흑인 선배는 백인들을 대하는 방법에 관해 의미심장한 설교를 한다. 그런 설교에 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우리 가족도 하인으로 일했다. 나는 그렇지 않은 아프로-아메리칸을 거의 알지 못한다. 아프로-아메리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많은 흑인 여성들이 보모로 일하고 있다. 내 백인 친구들은 어머니보다 보모와 사이가 좋았던 사람들이 많다. 어머니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기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어머니를 부끄러워한 적이 몇번 있는데… 후, 너무 감정적이 되는 것 같지만, 그래서 오프라에게 “이 영화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라고 말한 적도 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이 영화에 보다 가깝게 다가설 수 있었다.
-이런 질문을 싫어하는 건 알지만 이 영화로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이름 없는, 잊혀진 영웅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보다 많은 영웅을 발견해야 하고, 우리 스스로 영웅이 되고자 노력해야 한다. ‘자유 버스’를 탔던 젊은이들은 민권 운동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들이 정말 무엇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는 그 젊은이들이 했던 일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가. 이따금 우리는 “누군가 위대한 사람이 그 일을 해주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바로 우리 자신이 그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