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그때였다. 허릿병이 도진 나정에게 과자봉지를 툭 던져두고 나가던 그 시점. 정우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저분하고 바보 같아 ‘쓰레기’라고 불리던 오빠는 알고보니 천재과 레지던트였고 나정의 친오빠도 아니었다. 이 경상도 남자는 막말 속에 따뜻한 애정까지 장착한 고품격 멜로남이었다. <응사>가 시작된 이래 매 화 ‘정우의 멜로 폭탄’이 터지는 중이다. 나쁜 남자로 점철된 ‘실장님’ 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멜로드라마계에서 쓰레기는 흥미로운 별종이고, 매력적인 이단이다. ‘그 드라마 봤어?’가 ‘정우 봤어?’로 회자되고, 일찌감치 메인 CF 출연까지 대거 예약했으니, 그야말로 정우의 나날이다.
“닮긴 했는데 난 쓰레기보다 더 따뜻한 남자다. (웃음) 쓰레기는 나보다 열살 정도 어리니까 철부지인 면을 보탰다. 진지함과 코믹함의 적정선을 찾는 게 관건이었다.” 정우에게 쓰레기는 회심의 도전은 아니었다. 장르는 다르지만 액션영화 <바람>의 ‘짱구’를 쏙 빼닮은 데다, 차진 사투리도 그대로다. 신원호 감독은 이런 정우를 ‘생활형 멜로’가 되는 배우라고 칭했다. “목숨 걸고 하지 말자는 게 이번 작품의 목표였다. 그전까지 계속 목숨 걸고 작품을 했는데, 그러다보니 연기에 힘이 들어가고, 그 욕심이 화면에 비치더라.” 그는 2001년 영화 <7인의 새벽>으로 데뷔한 연기 생활 12년차. 줄잡아 15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그는 군대를 다녀오고 서른이 넘으면서 나름의 평정을 찾았다고 말했다.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잊고, 기다림의 여유를 갖게 됐다. 언젠가는 내 연기가 통할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이 생기더라.” 돌이켜보면 정우는 <사생결단> <짝패>같이 선 굵은 영화에서, 남성적인 이미지와 액션 연기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해온 단골 배우였다.
항상 선택을 받는 입장이던 그를 주연의 자리에 있게 한 터닝 포인트는 오랜 조/단역 생활 뒤에 얻은 첫 주연작 <바람>이었다. 부산에서 자란 고등학교 시절을 바탕으로 그가 직접 원안을 쓴 <바람>은 정우만의 색깔을 알려준 작품이었다. “열심히 하면 한번은 기회가 오겠지. 그 생각만 십수년을 했는데, <바람> 끝나고 바로 군대를 가는 바람에. (웃음) 1천만 든 영화, 500만 든 영화를 놓친 일이 많았다. 신원호 감독님도 <응칠> 때 날 찾았다고 하니까.” <응사>는 어쩌면 새로운 발견이 아닌, <바람>으로 촉발된 정우의 매력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정우는 어릴 적에 춤을 추다 무대에서 조명을 받는 직업의 매력을 알게 되면서 연기를 전공하고 배우가 됐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연극배우였던 아버지는 그가 택한 배우의 길을 지지해주셨고, 그 마음은 고향 부산에서 서점을 운영하시는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정우는 지금 김기덕 감독이 제작한 영화 <붉은 가족>의 개봉(11월6일)을 막 앞두고, <바람>의 두 번째 이야기의 시나리오 작업도 해두었다. 정우의 다음을, 손꼽아 기다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