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시사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인터뷰 장소로 넘어와서인가. 소이현은 무대 인사 때 입었던 빨간 드레스 차림으로 자신의 밴에서 내렸다. 170cm의 큰 키에서 나오는 시원한 발걸음, 훤히 드러나는 어깨선,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정리정돈된 단발머리, 앵두 같은 입술 등 그의 외모는 ‘인간 레몬’이라는 별명을 무색하게 할 만큼 ‘자체 발광’했다. “시나리오에서 미나는 존재감이 없었는데 소이현이 캐스팅되면서 비중을 크게 만들어야 했다”는 박중훈 감독의 말이 과장은 아닌 듯했다. 하긴 소이현의 상큼한 매력을 그냥 지나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미모와 카리스마를 겸비한 여자. 고급스럽고 도도한 여자. 그런 면모들이 일상인 여자. <어느날 갑자기>(2006) 이후 7년 만에 출연한 영화 <톱스타>에서 소이현이 연기한 영화/드라마 제작자 미나는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아니, 하이에나 같은 수컷들이 득실거리는 연예계에서 젊은 나이에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톱스타 원준(김민준)을 자신의 남자로 손에 넣은 미나는 대단한 여자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원준과 태식(엄태웅)에 비하면 물리적인 출연 분량은 적지만 “두 남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의 시발점이자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조차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까닭”에 미나는 소이현에게 “근사한 여자”로 다가왔다. “제 기준에서 영화는 근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사회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영화도 있겠죠. 하지만 어린 시절 동경하며 봤던 영화는 주로 근사한 배우들이 근사한 옷을 입고 나온 영화들이었어요. 그래서 미나 역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신데렐라가 되기 위해 악착 같은 신분 상승을 욕망했던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2012)의 서윤주가 후천적 ‘청담동 사모님’이라면 미나는 친절함과 여유 그리고 도도함이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밴 선천적 ‘청담동 사모님’이다. 미나의 첫 등장이 중요한 것도 대사나 행동이 아닌 분위기만으로 어떤 여자인지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원준의 흰색 셔츠만 헐렁하게 걸친 채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원준을 데리러 온 매니저 태식을 뒤돌아보는 영화의 초반부다. 박중훈 감독은 “미나의 뒤태만 보고 태식이 넘어오게 해야 한다. 죽여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어떻게 해야 죽여줄 수 있는 거지? (웃음) 어쨌거나 뒤태 운동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감독님은 ‘이 장면이 미나의 반이야’ 그러시는데 저는 그 장면을 다시는 못 보겠더라고요. 닭살 돋아서.” 좋지 않은 날씨 속에서 수차례 계속된 뒤태 열연(?) 덕분에 태식은 미나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것은 원준과 태식 사이를 갈라놓는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남성의 마음을 뒤흔들어놓는 여성적 매력만큼이나 여성 제작자라는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했다. 다행스럽게도 명필름 심재명 대표, 영화사 집 이유진 대표, 비단길 김수진 대표 등 소이현이 참고할 만한 모델은 영화계에 많다. “참고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인데 대표님들과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에요. 감독님으로부터 들은 게 다죠. 누구의 어떤 습관을 참고했다기보다 여자가 이쪽 일을 하는 건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남자 스타와 제작자들과 대등하게 보여야 한다는 점에서 눈빛부터 달라야 할 것 같고,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뼈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볍게 있을 때도 가벼워 보이지 않아야 하고. 때로는 좌중을 압도할 수 있는 말도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그런 애티튜드를 몸에 갖추는 게 힘들었어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전문직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본 관객이 미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건 소이현이 오랫동안 드라마를 통해 쌓아온 도도하고 당돌한 이미지 덕분일 것이다.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하다”는 드라마 <자체발광 그녀>(2012)의 전지현은 허점은 많지만 제 잘난 맛에 사는 당돌한 교양 작가였다. “캐릭터는 얄밉지만 입고 나온 옷을 따라입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20, 30대 여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의 서윤주는 도도한 ‘청담동 사모님’이었다. “스릴러라는 장르가 요구하는 연기를 할 수 있었던” 드라마 <후아유>(2013)의 양시온 역시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한고집하는 여경찰이었다. 작품마다 맡은 역할도, 성격도 제각각이었지만 대체로 도도함과 당돌함 사이를 오가는 캐릭터였다는 건 공통적이다. 어쩌면 박중훈 감독도 소이현이 구축해온 이미지를 보고 미나라는 중책을 맡겼는지도 모른다. “그걸 감안하셨을 것 같아요. 대중이 제게 당돌하고, 도도한 모습을 기대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재수없는 모습도 제가 연기하면 ‘쟤는 그럴 것 같아’라고 하시면서 미워하지 않는 것 같아요.”
2001년 SBS슈퍼모델로 데뷔한 뒤 매년 많게는 4편, 적게는 2편씩 쉴 새 없이 드라마를 찍어온 소이현이지만 영화는 <맹부삼천지교>(2004), <중천>(2006) 이후 <어느날 갑자기>가 마지막이었다. “20대 초반에 찍은 영화들이었어요. 너무 어려서 연기가 뭔지도 몰랐어요. 회사에서 찍으라고 하니까 찍었어요. 간절함이 없었던 거죠. 그때 많이 배웠어요. 영화는 다시 올 수 있을 때 와야겠다. 섣불리 도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면 연극을 해? 연기 선생님께 연기를 배워? 고민을 하던 중 최고의 연기 연습은 현장에서 부딪히면서 배우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쉬지 않고 드라마를 찍었어요. 성격상 휴식을 싫어하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재충전 없이 달려온 꾸준함은 대중에게 ‘배우 소이현’을 각인시키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게 있다면 소이현 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이 아직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대표작을 만들고 싶은 욕심도, 톱스타가 되고 싶은 욕심도 없어요. 물론 있으면 좋겠죠. 데뷔한 뒤 지금까지 크게 추락한 적도, 톱스타가 된 적도 없어요. 저는 그게 좋아요. 다만 어떤 작품,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 ‘소이현이라는 배우는 나쁘지 않아’ 정도의 믿음만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막 서른에 진입한 그는 과거에 비해 훨씬 여유로워졌단다. 얼굴부터 발끝까지 모두 꾸며야 밖에 나갈 수 있었던 20대와 달리 지금은 맨 얼굴에 추리닝 차림으로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고. “꾸미지 않아도 여자 같은 느낌이 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여유롭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파릇파릇한 20대 여배우와 경쟁할 게 아니라 김희애 선배님처럼 우아하고 멋지게 늙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의 말은 아직 보여주지 못한 얼굴이 한참 남았다는 뜻으로 들렸다. 배우 소이현의 30대가 기대되는 이유다.
magic hour
실제 소이현과 가장 닮은 캐릭터
드라마든 영화든 감독들은 소이현이 가진 도도함과 당돌함 사이에 있는 이미지를 원한다.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의 서윤주나 영화 <톱스타>의 미나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소이현은 그런 캐릭터들을 두고 “실제 성격과 많이 다르다”고 말한다. “전주의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어요.” 그간 연기했던 캐릭터 중 소이현의 실제 모습과 가장 닮은 역할은 드라마 <자체발광 그녀>에서 연기한 시사교양 작가 전지현이라고. “제 몸에 딱 맞는 옷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당찬 것 같은데, 또 어떻게 보면 덜떨어진 것 같고. 대본을 한번 읽으면 다 외울 정도로 작업하기가 편했어요. 드라마를 본 일본 사람들이 ‘파이팅걸’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셨어요.” 소이현이 전지현이라는 캐릭터에 유독 애착이 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드라마 속 전지현이 제작자가 된다면 <톱스타>의 미나 같은 캐릭터가 되어 있지 않을까? “글쎄요. 영화 속의 우아한 미나보다는 좀더 억척스러운 미나가 되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