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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앉으나 서나 연기 생각
이화정 사진 백종헌 2013-10-14

<배우는 배우다> 이준

이 정도면 배신, 배반이라는 단어를 써도 될 것 같다. <배우는 배우다>에서 이준의 이미지 변신은 파격에 가깝다. 폭력적인 베드신만 수차례, 거기다 험한 욕설을 서슴지 않으며 폭행 장면도 적지 않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아이돌’이라는 수식어를 가진 부류에게는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될 적신호이자, 허용범위를 넘긴 도전이다. 이준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이돌 연기자가 영화의 감초 역할이 아닌 주연으로 전면에 나선 것도 좀체 보기 드문 경우다. 아이돌, 예능돌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급격한 이미지 변화가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거침없이 이 길을 선택한 이유를 이준에게 듣고 싶었다.

이준과는 첫 만남이다. 날카로운 얼굴선과 홑겹의 눈매와 얼핏 차가워 보이는 마스크인지라 촬영 때도 그 특유의 카리스마가 시선을 압도한다. 화보를 찍다보면 매번 느끼지만 유독 몸의 쓰임이 자유로운 배우들이 있는데, 이준은 그중에서도 상위급이다. 그가 무용을 전공했다는 사실이 저절로 떠오른다. 어떤 주문을 해도 아름다운 선을 만들어내는 덕분에 촬영이 순조롭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웃음기를 띠고 인사를 하는 그는 180도 돌변한 순한 표정이다. “이 스튜디오에 몇번 왔는데, <노미오와 줄리엣>(2011) 목소리 연기했을 때, 그리고 <닌자 어쌔신>(2009) 때도 인터뷰하러 왔다. 이번엔 단독 커버 촬영이라니….” 게다가 <배우는 배우다>가 부산국제영화제 파노라마에 선정돼 레드카펫 행사 참석 등 주연배우로서의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정말 정신이 없다. 꿈만 같다. 가슴이 막 두근두근하면서 터질 것같이 꽉 찬 느낌이랄까.” 가요프로그램 생방송 무대의 화려한 조명에서도 활개를 펴던, 쇼프로그램에서의 냉혹한 긴장감 속에서도 거리낌 없이 토크를 풀어내던 그에게도 영화를 둘러싼 모든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흥분의 지점이다. “<닌자 어쌔신> 때는 시사회도 못 갔고, 홍보 활동에도 빠져 있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갑자기 짐이 커진 것 같아 부담이 되면서도 무척 즐겁다. 어떤 평가든 핑계대지 않고 인정하려고 한다.”

신연식 감독이 연출한 <배우는 배우다>는 <영화는 영화다>(2008), <풍산개>(2011)에 이어 김기덕 감독이 제작한 세 번째 작품이다. 배우의 꿈을 가진 오영이 단역에서 조연, 순식간에 톱스타의 자리에 올라갔다가 다시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될 수 없는 이상한 메커니즘의 세계, ‘배우는 연기만 잘하면 되지’라는 순진한 마음 하나만으로 연기를 시작했던 오영은 ‘원하는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싫은 일도 해야 한다’는 매니저의 설득에 따라 돈과 욕망, 폭력이 지배하는 난장판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경험해나간다. 성접대 의혹, 폭력단체의 스폰서 같은 사회고발성 프로그램에서 재연되었던 상황이 속출하는 가운데, 영화는 오영의 혼란을 가감없이 그려나간다. “폭력적인 섹스신에 담배 피우는 장면까지 센 장면들이 많다. 주변 동료들도 다 그러더라. 그거 해도 정말 괜찮겠냐고. 난 거리낌 없다. 언제까지나 아이돌은 아니며 예쁘고 발랄한 것만 할 수는 없지 않나. 내 미래는 내가 선택해야 하는데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는 <배우는 배우다>의 시나리오가 맘에 들었다고 한다. “재밌었다. 받자마자 단숨에 읽고, 또 읽고, 혼자 막 연습했다. 내가 원래 재밌으면 계속 연습하는 버릇이 있다.” 한 번 읽어보라고 준 시나리오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밑줄치고 암기하고 연습해서 갔으니, 신연식 감독에게 이준은 ‘싹수가 보이는 배우’였다. “감독님이 내 대본을 보고서 감동받았다고 하시더라. 그게 좀 통한 것 같다. 워낙 많은 배우들이 하고 싶어 하는 역할이었고, 난 캐스팅 후보에도 없었는데 정말 운인 것 같다. 감사하면서도 신기할 따름이다.” 이 캐스팅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 홍보로 <강심장>에 출연했었는데, 마침 이준이 그 프로그램에 대타로 출연했었고, 녹화 뒤에 이준이 김기덕 감독에게 “연기에 목말라 있다.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면서 신연식 감독과 이어졌다는 제법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다.

영화를 보면 오영 캐릭터의 진짜 도전 지점은 노출 수위나 설정에 있지 않다. 한 배우가 무명에서 톱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굴곡을 연기해야 하고, 오영을 연기하는 동시에 오영이 극속에서 연기하는 배역들의 톤도 다르게 연기해야 한다. 감정과 기술이 모두 필요한 배역이라 자칫 톤을 잡지 못하면 모든 게 과장된 제스처로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다로운 연기다. 게다가 주변 인물들의 중심에 항상 오영이 있다는, 원톱의 부담감도 안고 가야 했다. “초반에는 저돌적으로 돌파하는 오영의 모습이 100% 공감이 가더라. 오영의 가난한 환경도 나랑 닮아 있었고. 그런데 그가 겪는 인생의 굴곡을 표현하자니 쉽지가 않더라. 워낙 다혈질이라 욱하다가도 금세 애절한 감정을 오고 가야 했다. 어느 한 장면이 어렵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매 장면이 힘든 연기였다.” 그에겐 고충이었지만 관객으로서는 찾아야 할 배우 이준의 매력이 발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 데뷔작인 <닌자 어쌔신>에서 그는 라이조 역을 맡은 정지훈의 십대 시절을 연기했는데, 정지훈이 영화 후반의 화려한 액션을 담당했다면, 철저하게 감금된 채 인간병기로 키워지는 라이조의 고뇌와 멜로적인 측면을 아우르는 감정 연기는 십대 시절의 이준이 도맡아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이준의 데뷔전을 기억한다면, 오영의 내면 역시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준의 연기에 화려한 수식을 더하는 게 아직은 낯설어 보일지 모른다. <닌자 어쌔신> 이후 <정글피쉬2>(2010), <아이리스2>(2013) 등의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이준의 주활동 영역은 어디까지나 예능이었다. “원래 부끄러움도 많고 조용한 편인데, 주변 환경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 같다. 예능에서 인기를 얻고 그러는 건 나도 생각 못해본 내 모습이었다. 그땐 여기서 열심히 해서 유명해지자, 이 방송을 내 걸로 만들어야겠다, 이런 각오가 컸다. 예능은 힘들고 지칠 때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주는 기능을 한다. 그게 내 몫이라면 열심히 해야지 생각했다. 바보처럼 보여도 그런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거리낌 없었다.” 중학생 때부터 연기가 하고 싶어서 몸연기를 연마할 수 있는 무용을 전공했고, <닌자 어쌔신>을 하면서는 어렵게 들어간 한국예술종합학교까지 자퇴하고 나왔지만, 가수가 된 이준은 그렇게 한동안 연기와 멀어졌다. “연기는 하고 싶었다. 변명 같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예능할 때는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루하루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고 끊임없이 일거리가 밀려드니 자연스럽게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잊게 되더라. <배우는 배우다>를 하면서 처음으로 여유를 가져보고 진지하게 나를 돌아보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이 내겐 고맙다.”

이준은 오영을 연기하고 싶어서 처음으로 소속사에 자기주장을 펼쳤노라고 했다. ‘다음에 더 좋은 역할을 하면 되니까 지금은 좀 보류하라’고 했던 주위의 말들에 처음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려서 그렇기도 했지만, 회사와 항상 상의했다. 너무 하고 싶어도 아니라고 하면 포기한 것도 많다. 지금은 내가 연기를 하는 거고 내가 활동을 하는 거라는 자의식이 강해졌다. 백이면 백 다 아니라고 해도 내가 맞다고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배우는 배우다>는 그가 사실상 연기자임을 공포하고 나선 시작점이다. “아이돌이라는 규정 같은 게 너무 싫다. 나는 그냥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다행히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영화 속, 실없는 웃음기를 걷어낸 오영을 마주하노라면, 그가 무대나 브라운관에서 보던 아이돌임을 잊고 빠져들게 된다.

이준은 요즘 예능프로그램 출연을 쉬고 처음 연기할 때처럼 연기 공부를 하며 지낸다고 한다. “무용할 때도 그랬지만 배우들은 엄청난 실력을 가진 분들이 많다. 정말 신적인 존재들이라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따라갈 수 있을까 싶다. 그러니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무용도 노래도 예능도, 모두 열심히 하면 된다는 믿음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온 그는, 연기 역시 늘 하던 대로 매달려보려고 한다. “영화 제의도 몇편 들어왔는데 워낙 장르가 들쑥날쑥이다. 다음 작품은 오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 들고 온 가방 속에 대본 몇권이 들어 있다며 꺼내 보여준다. 아무래도 가장 너덜너덜한 낙서가 된 대본이, 곧 그의 다음 작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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