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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발기하는 인간과 발화하는 인간
신형철 2013-10-09

김기덕과 홍상수를 비교하면 더 잘 보이는 것들

<뫼비우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1960년에 태어나 1996년에 데뷔한 두 감독, 김기덕과 홍상수의 신작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었고 나는 연중행사처럼 두 영화를 보았다. 두 감독의 이전 작품에 대해 이 지면에서 이미 한번씩 다루었기 때문에 반복할 생각이 없었으나, 두 영화를 거의 동시에 보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다. 두 사람 각각에 대해서는 다시 할 얘기가 없을지 몰라도 두 사람을 함께 얘기한다면 다른 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거의 극단적인 고유함을 갖고 있는 두 영화 작가를 비교하는 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비교할 때 더 잘 보이는 것이 있다면 해볼 만한 것이다. 이번 영화들에는 특히나 대조적인 데가 있다. 두 감독 모두 욕망에 대해 사유하고 있는데, 김기덕의 <뫼비우스>에는 대사가 없고 행위만 있으며, 홍상수의 <우리 선희>에는 대사만 있고 행위는 거의 없다. 요컨대 이 두 영화는 욕망에서 몸과 말이 각기 맡고 있는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한 사람은 몸을 다루면서 욕망의 순교자가 되고, 다른 한 사람은 말을 다루면서 욕망의 현자가 된다.

발기하는 인간의 비극, 김기덕의 <뫼비우스>

놀라운 이야기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지만(이에 대해서는 다시 얘기하자) 그 납득할 수 없음 조차도 김기덕 영화의 한 부분인데, 실로 김기덕의 영화는, 지적할 가치도 없는 단점들에 비하면 지적할 가치가 있는 어떤 단점은 작품에 기이한 방식으로 강력한 힘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희귀한 사례다. 이 영화에는 ‘남근을 은유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남근 그 자체’가 나온다. 이 영화의 제목을 홍상수의 근작들처럼 다시 지어본다면 ‘남근의 영화’(<옥희의 영화>)나, ‘누구의 것도 아닌 남근’(<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나, ‘우리 남근’(<우리 선희>)정도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재미없는 농담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욕망에 대해 말하기 위해 남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것을 자르고 붙이고 또 자르는 김기덕 영화의 이 단순성과 원형성과 저돌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인생은 고통이고 그것은 집착에서 오니 이를 멸해야만 도에 이를 수 있다)로 대강은 요약될 이 영화의 노골적인 메시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초반 10분을 견뎌낼 수 있다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의 당당한 외도에 격분한 아내는 남편의 성기를 자르려 하지만 실패한다. 그러자 아내는 놀랍게도 아들의 성기를 거세하고 만다. 아내가 극도의 심신 불안정 상태임을 감안하더라도 이 선택은 언뜻 납득하기가 힘들다. (이 장면 이전에 그녀가 자신의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아들을 보며 눈물겨워하는 장면을 두번이나 보여주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이 행위의 목적이 분명해지기는 한다. 한발 늦게 현장에 도착한 남편이 아이의 절단된 성기를 손에 쥐고 있는 아내를 설득하자, 아내는 맹렬한 적대감과 복수의 환희에 정신을 잃은 눈으로 남편을 노려보면서, ‘그것’을 입속에 넣고 씹어 먹는다. 그렇다, 이 여성은, 아들의 성기를, 씹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공연을 볼 때 그리스 관객이 체험했을 경악과 공포가 어떤 것이었을지 최초로 실감했다. 새장가를 들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남편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메데이아는 남편과 함께 낳은 제 아이들을 죽였다.

도입부의 이와 같은 강렬한 아수라장 이후에 아내는 집을 나가고 거의 한 시간 동안 영화에 복귀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 때문에 성기를 잘린 아들에게 속죄하기 위해 두 가지를 결행한다. 첫째, 내연녀와 결별하기. 둘째, 장차 가능할지도 모를 성기 이식 수술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잘라 병원에 보관하기. 이제 이 영화는 속죄를 완성하기 위해 고뇌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또 의지할 수밖에 없는(내 성기를 앗아간 것은 그이지만 그것을 되돌려줄 수 있는 사람도 그뿐이므로) 아들이 보여주는, 기구한 부자의 드라마가 된다. 그러나 2인극은 아니다. 아내가 퇴장한 서사 공간에서 내연녀가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자신을 찾아온 남자의 아들에게 가슴을 보여주면서 그녀는 이 욕망의 드라마에 끼어들고 이후 남자의 아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는다. 왜? 그녀의 냉소적인 표정으로 짐작하건대 이 행위는 자신을 버린 남자의 아들을 유혹함으로써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고 일단은 그렇게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그 남자는 자신의 아내만이 아니라 외도라는 수단으로 또 다른 여자를 가졌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 몫이 아닌 것을 추가로 누렸는데, 심각하게도, 그 때문에 아들은 거세되고 말았고 자기 몫의 쾌락을 박탈당했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아버지의 외도는, 여느 외도와는 달리, 아들의 몫으로 할당돼 있는 장래의 쾌락을 아버지가 당겨쓰는 일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속죄할 수 있는 방법은, 애초 자신의 몫이 아니었으나 자신이 향유하고 만 그것, 즉 자신의 여자와 성기를 아들에게 ‘되돌려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 앞에서 정리한 아버지의 두 결단이 여기에 대응한다. 그는 여자와 결별함으로써 그녀를 아들에게 넘겼으니, 곧이어 성기마저 넘김으로써 자신의 속죄를 완성할 것이다. 성기 없는 쾌락을 탐구해보기도 하고,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의 성기를 강탈하려는 시도도 해보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성기는 아들에게로 이식되는 데 성공한다. 이것으로 끝인가. 그러나 이런 원상복구 서사는 김기덕의 것이 아니다.

김기덕은 우리가 말리고 싶어 하는 그 방향으로 기어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여자에 이어 성기까지 (되돌려) 받았으나 아들의 성기는 발기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가 서사에 복귀하고, 아들의 성기는 어머니 앞에서 마침내 발기한다! 급기야 어머니가 성기 없는 남편을 내치고 아들의 발기한 성기를 갈구하며 달려드는 장면에까지 이르면, 이 영화는 비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비논리적이어서 납득하기가 어려워진다. 눈앞의 모자를 견딜 수 없어서 아버지가 아들의 성기를 다시 잘라오기 위해 칼을 드는 장면까지를 보고 나면 우리 눈앞에는 그야말로 지독한 ‘뫼비우스의 띠’ 하나가 완성되는 것이지만(어머니가 아들의 성기를 자르려고 하고 아버지가 이를 말리며 시작됐는데, 70분 뒤에는, 아버지가 아들의 성기를 자르려 하고 어머니가 이를 말리며 끝나가고 있으니), 철사로 된 그 뫼비우스의 띠에는, 감독이 자신의 욕망이론을 관철시키기 위해 완력으로 무리하게 서사를 꺾은 흔적이 남고 만다. 그러나 김기덕이 아니라면 누가 굵은 철사로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수 있겠는가. 나에게 이 영화는 넌더리가 나는 걸작이다.

<우리 선희>

발화하는 인간의 희극, 홍상수의 <우리 선희>

세 번째 영화인 <오! 수정>(2000) 이래로 <옥희의 영화>(2010)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에 이어 <우리 선희>에 이르기까지 홍상수 감독은 귀찮다는 듯이 자주 주인공의 이름으로 제목을 삼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한국인들에게 특별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평범한 이름들이다. 1600년대 초반에 셰익스피어는 자기가 누구인지 잘 몰라서 비참해진 자들의 이야기를 쓰고 주인공의 이름을 작품의 제목으로 삼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름이라는 것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고, 나의 존재에 그 어떤 확실성도 부여해주지 않는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인 물음 에 ‘나는 햄릿(오셀로, 리어, 맥베스)이다’라고 답하는 사람만큼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비참해진 이들이 그들인데, 정작 그들의 이름이 저 비극의 제목이 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흔한 관례였다고는 해도 지금에 와서 보면) 좀 아이러니하다. 홍상수 영화의 제목에 사용된 이름들도 ‘이 이름들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홍상수의 그것과는 가장 거리가 먼 종류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일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꺼낸 것은 <우리 선희>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이동진이 이 영화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리어왕>의 대사를 20자평으로 얹기도 했지만) 이 영화의 서사 구조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리어왕>의 1막 1장의 구조를 확대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늙은 왕 리어가 은퇴를 앞두고 영토를 분할/증여하기 위해 자신의 세딸들에게 묻는다. “말해보아라, 나의 딸들아! (…) 누가 짐을 가장 사랑한다 말하겠느냐?” <우리 선희>는 유학을 앞둔 선희가 미래에 불안을 느끼는 와중에 세 남자를 차례로 만나는 이야기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데, 그래서 그녀에게는 이국의 타인들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는 추천서가 필요한 것이지만, 그 추천서를 읽어야 할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다. 그래서 선희는 세 남자를 만나 이렇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해보아라, 나의 남자들아! 누가 나를 가장 잘 안다 말하겠느냐?”

그래서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논평이 전적으로 당연해 보인다. “나는 <우리 선희>가 실체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말의 한계를 보여주는 영화라는 세간의 평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선희>는 오히려 그 실체라는 것이 말로 따라잡을 수 없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말의 작용, 행로와 함께 변하는 것이라고 믿는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선희는 세 남자의 선망을 받으면서도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끝내 말로 표현 불가능한 기이한 여인이 아니라, 말의 행로 속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길 멈추지 않는 여자다.”(남다은, <씨네21> 922호) 왜 아니겠는가. 선희의 ‘실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 자신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뒤에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고, 여기서 다시 몇겹의 막을 걷어내고 나면 애초의 물음은 사실상 ‘나는 타인이 욕망할 만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희만의 물음이 아니다. 언제나 이것보다 더 절실한 물음이 우리에게 있었던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선희의 물음은 리어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말해보아라, 나의 남자들아! 누가 나를 가장 욕망한다 말하겠느냐?” 이렇게 바꿔 묻는 순간 우리에게 타자의 인정(認定)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가 또렷해진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으려면 끝까지 파고들어가야 한다”라고 부르짖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자기 안을 향해 수직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틈만 나면 타인을 향해 수평으로 귀를 기울인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달라고,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욕망할 만한 사람인지 말해달라고. (예전에 홍상수의 인물들은 타자의 인정을 통한 자기 긍정을 위해 허망하게도 자주 섹스에 기대었다. 그들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섹스를 하는 데 성공하고 나면 치워버려야 할 사다리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최근 몇편의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이제 말이 섹스를 대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 때문에 홍상수를 김기덕의 반대편에 세워놓고 비교하기가 더 수월해졌다.) 그런데 타자의 말이라는 것,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홍상수의 영화처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타자라는 존재들은 나에게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기는커녕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영화 전체의 프롤로그가 되는 장면에서 선배 상우(이민우)는 선희에게 최 교수(김상중)가 해외 출장을 갔다는 이상한 거짓말을 했다가 이내 들통나자 농담이라고 둘러댄다. 물론 그것은 농담이 아니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그 자신도 모를 것이다. 아마도 선희에 대한 어떤 욕망이 그의 말을 일그러뜨렸을 것이다. 이 프롤로그는 이 영화 전체가 욕망에 의해 일그러지는 말들의 풍경을 보여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상우에 이어 등장하는 세 남자의 말들이 그렇다. 선희가 내가 누구인지를 물을 때 그녀가 타인의 인정(욕망)을 은밀히 바라듯이, 선희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말하는 남자들 또한 그녀의 인정(욕망)을 은밀히 바란다. 같은 욕망이 말을 끌고 가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다른 사내의 그것을 복제하면서 결국 비슷해지고, 선희가 어떤 여자인가 하는 물음 따위는 어느새 무의미해져버린다.

상우의 말은 명백한 거짓말이었고 그래서 선희는 상우를 향해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지나치게) 화를 낼 수 있었지만, 선희와 세 남자의 술자리에서 오가는 말들은 취기가 오를수록 더이상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없는 말이 되고 만다. 다른 사람에게서 주워듣고 즉흥적으로 내뱉는 말이라는 점에서는 거짓이라 해야 하겠지만, 그 일그러진 말들이 그때 그들의 욕망을 정직하게 실어 나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런 상황은 선희의 입장에서나 세 남자의 입장에서나 실패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이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고, 그로부터 또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욕망과 관련해서 말들은 실패하면서 성공하는데, 그 지긋지긋하면서도 정겨운 순간들에서 같은 노래(<고향>)가 세번 흘러나올 때, 그 노래는 ‘다 그런 거다, 어쩌겠는가,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고, 그때 이 영화는 ‘말은 인간의 못난 숙명이지만 그 말들 속에서도 때로는 봄날의 창경궁처럼 고요한 날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인간을 다독이는 현자의 우화처럼 보인다.

인간의 생일

이제 위에서 언급한 두편의 영화를 중심으로 김기덕과 홍상수의 세계를 비교해보려고 한다. 욕망과 관련해서 김기덕은 몸의 실패를 다루고 홍상수는 말의 실패를 다루는데, 김기덕은 몸의 실패를 비관적으로 심화시키고 홍상수는 말의 실패를 낙관적으로 다독인다. (누가 더 강자인지 나는 모르겠다.) 김기덕에게 인간의 삶이 멀리서 본 비극이라면(그래서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홍상수에게 인간의 삶은 가까이에서 본 희극에 가깝다(말의 뉘앙스가 그에게는 중요하다). 김기덕이 원형적인 인간을 다룬다면, 홍상수는 전형적인 인간을 다룬다. 원형은 과장된 것처럼 보이고 전형은 쇄말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욕망의 진실은 원형에도 있고 전형에도 있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피에타’나 ‘뫼비우스’ 같은 상징적인 제목을 붙이는 것은 자신이 다루는 날것의 원형성을 형이상학적인 뉘앙스로 눅이는 효과를 낳고,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에 평범한 일상어나 의미 없는 고유명사를 자주 제목으로 붙이는 것은 자신이 다루는 전형성이 쇄말성이라 비판당할 수 있는 여지를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다, 운운.

이런 거친 비교로 둘을 멀찍이 떨어뜨려놨으니 이제 다시 포개놓으면서 글을 끝내려고 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고 그것이 날짜로 표기될 수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지만, 여하튼 그날이 바로 인간의 생일이 될 것이다. 나는 김기덕과 홍상수라는 두명의 영화 작가가 (대체로) 1년에 한편씩 만들어 보여주는 영화들이 마치 해마다 돌아오는 ‘인간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짓궂은 선물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조건(즉, 욕망)을 탐구한 결과인 그것들, 잊을 만하면 우리가 인간임을 다시 상기하게 만드는 선물. 조물주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가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것을 만들어 넣은 것은 인간이 계속 살아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그는 인간의 삶이 그 욕망과 더불어 장차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미리 계산하지 못했거나 안 한 것 같다. 그 계산을 대신 해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나는 그동안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 상투적인 말을 딱 한번 진심을 다해 하려고 한다. 이런 예술가들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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