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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위] 보이지 않는 적과의 사투

<일대종사> 양조위

인터뷰룸에 들어선 양조위는 한숨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침부터 분단위로 배정된 인터뷰 루트에서 이제야 좀 벗어난다는 안도감으로 읽혔다. 한국에서 가지는 마지막 인터뷰, 그의 밝은 미소는 ‘이제 좀 편히 있어도 좋지 않을까’라고 무언의 동의를 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구석자리를 골라 앉은 그는 바짝 의자를 당겨 기자와의 거리를 좁히는데, 양조위의 눈빛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다. 몇 차례 양조위와 가진 인터뷰에서 절절히 깨달은 것 하나. 그는 눈빛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엽문을 말하기 전에, 그는 <비정성시><화양연화> <무간도>에서 보았던 깊은 슬픔이 모두 뒤엉켜 있는 눈빛을 내놓는다. 배우의 정수를 훔쳐보는 것 같아 숨이 턱 막히는 경험이다.

<일대종사>에서 양조위는 영춘권을 전파한 실력자이자 이소룡의 스승으로 알려진 엽문(1893∼1972)을 연기한다. 엽문은 1930년 일제침략기 혼란스러운 정국, 남방무술의 새로운 실력자로 급부상한다. 당시 전국 무술계를 통합한 궁가의 궁 대인은 자신의 후계자로 제자 마삼(장첸)이 아닌 엽문이 적임이라 생각한다. 날카로운 칼을 품은, 공격적인 기질의 마삼과 다르게 엽문은 “쿵후라는 것은 오직 하나의 수직과 수평의 만남”일 뿐 실력의 우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인물이다. 왕가위 감독은 “내가 파악한 엽문은 전형적인 무술인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무술에 능하지 못한 배우 양조위에게 엽문을 굳이 맡긴 이유를 설명한다. “감정을 잘 조절하고 겉으로 잘 표현하지 않는 실제 양조위의 면모는 엽문과 무척 닮아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일대종사>에서 그는 영웅으로 소비된 기존 엽문에 대한 이미지가 무색하게, 관조자 같은 모습을 선보인다. 혼란한 정세를 타개하려는 적극적인 행위 대신, 그 시련의 중심에 서서 어떤 풍파도 다 맞고 있는 모양새다. 시대의 아픔을 그러안은 존재, 양조위 특유의 애잔함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양조위가 왕가위의 ‘엽문’을 아무런 부담없이 떠안은 건 아니다. “엽위신 감독의 <엽문> 시리즈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견자단은 홍콩을 대표하는 최고의 액션 배우 아닌가.” 왕가위 감독의 제안이 가장 의외였던 건 양조위 자신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왕가위 감독이 이 작품을 선택하는 데 많은 고민이 있었겠다 싶더라. 워낙 싸우는 장면이 많으니 얼마나 힘들지 예상이 됐지만, 도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촬영 전부터 오랫동안 양조위는 영춘권을 배우며 엽문의 무술에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엽문의 아들을 직접 만나 인물에 대해서 탐구해 나갔다. 엽문의 체형을 닮고자 했고, 걸음걸이와 자태까지 모두 습득했다. 무술인이지만 학자적인 면모를 갖춘 문인의 모습에 가까웠던 엽문. 양조위는 첫 장면부터 관객을 사로잡는다. 아마도 <일대종사>의 많은 결투 신 중 최고로 기억될 오프닝 신. 잿빛 화면 속 양조위는 절제된 움직임으로 우중결투를 펼친다. 상대를 제압하는 움직임이지만, 상대가 아무도 없는 듯한 움직임. 미세한 파동까지 잡아내는 왕가위의 카메라 앞에서 펼쳐지는 빗속의 춤사위에서 양조위의 ‘엽문’ 은 광채를 발산한다. “말도 말아라. 그 장면 촬영하는 데 50일이 걸렸다. 연일 날씨도 추웠는데, 비 때문에 온몸이 젖은 상태에서 액션을 하다 보니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이 영화가 엽문의 액션보다는 다른 지점에 주목했다고 하지만, 난 액션의 강도가 높다고 평가하고 싶다. (웃음)”

<중경삼림>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 <화양연화> 등을 통해 왕가위와 꾸준히 작업해왔으니 둘의 인연도 꽤 깊다. 촬영에만 꼬박 3년을 매달려야 하는 지난한 시간, <일대종사>는 그 신뢰가 바탕이 된 협업이었다. “20년 동안 왕가위 감독을 알고 지냈는데 그는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늘 그랬듯 이번에도 미리 나온 시나리오가 없었는데, 그 스타일에 난 이제 완전히 적응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이번엔 엽문이라는 인물이 있어서 참고할 거라도 있었고, 상황이 좋았던 편이다.” 양조위가 습득한 엽문. 그걸 털어내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그는 “올해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내게 영화는 인연이다. 좋은 인연을 만나야 좋은 작품도 나온다. 적어도 당분간은 좀 쉬고 싶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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