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는 “합리적”이라고 하고, 또 누구는 “깐깐하다”고도 한다. 다소 엇갈리는 평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선비나 학자 같은 스타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무언가에 꽂히면 죽어라 파고드는 성향 때문일 것이다. 삼성나이세스와 삼성영상사업단 영화팀 소속으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총잡이>(1995), <돈을 갖고 튀어라>(1995), <정글스토리>(1996) 등의 제작을 담당한 이후, 한국영화아카데미 프로듀싱 전공 책임교수를 거쳐 2005년 마케팅전략기획실 실장으로 CJ엔터테인먼트에 합류한 뒤 지금까지 기획실장(2007~2009년), 콘텐츠연구소장(2009~2011년), CJ엔터테인먼트 국내사업 대표(2011~2012년)를 역임했던 CJ E&M 길종철 상무에 대한 이야기다. 2012년 콘텐츠 개발실로 자리를 옮겼던 그는 신인 감독을 발굴해 지원하고, 원천 콘텐츠를 확보하는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건강상의 이유로 병가 중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주로 정장 차림이었던 CJ엔터테인먼트 대표 시절과 달리 캐주얼 차림이었다. “환하고 여유로워 보인다”는 안부 인사에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아파 보니 사람이 많이 바뀌더라. 몸도, 생각도. 물론 좋은 쪽으로. (웃음)”
-건강은 어떤가. =많이 좋아졌다. 수술한 부위는 계속 치료받고 있고, 지금은 회복 단계다.
-신인 감독을 발굴, 지원하는 ‘버터플라이 프로젝트’(가칭, 이하 버터플라이)의 일환으로 제작된 최진성 감독의 <소녀>와 노영석 감독의 <조난자들>(가제)이 후반작업을 거의 마쳤다고 들었다. 이 밖에도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림보>(가제),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위로공단>(가제), 권오광 감독의 극영화 <돌연변이>(가제) 등 여러 작품을 투자, 제작한다.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완성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말 좋다. 관객을 만나기 전에 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조난자들>이 제38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컨템포러리 월드 시네마’ 부문에 초청됐다). 이제는 다음 프로젝트를 어떻게 더 발전시킬지 고민해야 한다.
-그간 순제작비가 많이 투입되는 상업영화의 투자를 결정하고 제작을 진행해 오다가 3억원 미만의 저예산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니 어떻던가. =제작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저예산 프로젝트가 기획단계의 고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큰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다보니 각각의 의견이 반영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대표 시절에는 대부분의 논의를 거친 상태에서 결재 여부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정도 결정된 단계에선 내 의견이 반영될 여지가 거의 없다. 반면 저예산영화는 창작자의 아이디어에 의존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이번에는 나를 비롯한 팀원이 서로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진행할 수 있었다.
-버터플라이는 올해 초 중단하기로 결정된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이하 신디영화제) 내의 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어왔다. CJ가 영화제 운영을 중단한 뒤 이 프로젝트만 계속 유지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뭔가. =애초 신디영화제의 출발은 일반 영화제와 달랐다. 정성일 프로그램 디렉터와 영화제를 기획하면서 함께 논의했던 건 동시대의 신진 감독들이 끼를 뽐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자는 것이다. CJ는 영화제가 감독들의 새로운 등용문으로 자리잡길 원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영화제는 운영은 잘됐지만 신인 발굴에 대한 성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메인 스폰서인 CJ 문화재단이 계속 지원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영화제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영화제 운영을 재개할 수 있다는 얘기인가. =신디영화제의 시스템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누가 운영을 하든지 간에) 나중에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버터플라이는 2010년부터 이미 영화제와 별개로 CJ 내부에서 운영해온 프로그램이다. 영화제라는 쇼케이스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 영화 제작에 직접적인 지원을 하는 게 신인 발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콘텐츠 개발실에서 이 일을 이어받았다.
-네 번째 버터플라이 공모전이 10월24일부터 31일까지 작품을 접수받는다(공모 페이지: http://cjenm.com/butterfly/butterfly.html). 단편/중편/장편 영화연출 경험이 있는 사람(단, 장편 극영화 1편 이내 연출자)이라면 누구나 응모 가능하다고 들었다. 영화 제작과 함께 신인 작가도 육성하겠다고 했는데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같은 다른 매체로까지 범위를 넓힌 것이 눈에 띈다. =과거 CJ엔터테인먼트는 영화사업만 했다면 지금의 CJ E&M은 영화, 방송, 음악 등 여러 부문이 합쳐진 회사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CJ E&M 출범 당시 회사 내 콘텐츠 연구소(현 콘텐츠 개발실)라는 부서가 생겼고 전사적인 측면에서 콘텐츠 개발에 대해 고민하며 ‘콘텐츠의 R&D(연구개발)’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방송, 소설, 만화, 게임 등 모든 미디어를 아우르는 원천 콘텐츠는 결국 스토리다.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방향이자 역할이다.
-한/중 합작 로맨스나 성인 멜로 같은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콘텐츠 개발도 함께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업계가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다. 창작자들이 투자자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하는 기존의 영역과 그간 시도되지 않은 영화들이 등장해 새로운 시장을 계속 개척해나가는 영역이 공존해야 한다. 주류 상업영화 중 비어 있는 장르는 없는지, 비어 있다면 왜 시도되지 않는지를 분석해서 소외된 장르를 꾸준히 만들어내야 한다.
-현재 비어 있는 장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성장영화는 10대 후반 혹은 20대 초반 배우들을 발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눈에 띄는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건 그 연령대의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는 얘기다. 이것도 산업의 문제로 인식해야 하고 R&D를 통해 해결해나가야 할 일이다.
-CJ가 검증되지 않은 신인들에게 투자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업은 결국 사업을 하는 조직이다. 사업을 통해 산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기업이 해야 할 일이고. 산업이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시장도, 기업의 이익도 성장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콘텐츠와 좋은 인력들을 발굴해야 한다. 버터플라이 프로젝트 공모전과 신인 작가 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그런 취지에서 시작했다. 물론 저예산이라는 새로운 시장도 발굴해야 하고. 사실 CJ 말고도 여러 단체에서 시행하는 신인 발굴 프로젝트들이 많다. 그래서 조금은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기획부터 배급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간다는 것. 이것이 버터플라이가 다른 사업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여기에 CJ의 노하우가 더해진다면 잘해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원천 콘텐츠 개발에 대한 열렬한 관심은 삼성영상사업단 시절부터 유명하다. 특히 CJ엔터테인먼트 대표 시절 직원들에게 소설, 만화, 영화 등 여러 장르의 책읽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콘텐츠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창작자들에게 도움이 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성공과 실패에 관련한 사례들에 대해 비즈니스적인 측면으로 분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 자체를 콘텐츠 본질로 들어가야 분석할 수 있는 경우가 더 많다. 나도 비즈니스로 영화를 시작한 사람이지만 결국 콘텐츠의 본질로 돌아오게 되더라. 스토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야 투자, 배급, 마케팅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당장은 부가적인 일이 되니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조금씩 쌓아간다면 실력으로 승화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계와 스킨십이 많지 않았던 CJ 대표였다”고 아쉬워하는 제작자들도 많더라.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개인적인 성향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술을 조금 마시기는 한다. 담배는 안 피우고. 당시 해야 할 일이 많아 시간적으로 부족했던 이유도 있고 개인적인 성향도 작용했다. 영화라는 게 관계와 네트워크가 중요하다. 하지만 내용 없는 네트워킹은 피하고 싶었다. 재임 시절이 짧기도 했고, 막상 그 자리에 올라가보니 시간을 따로 내 사람들을 골고루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쉽긴 하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 건 맞다.
-영화계의 여러 플레이어들이나 CJ 내부의 많은 사람들은 ‘선비’나 ‘학자’ 스타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학구적인 게 아니라 학구적으로 보이는 거다. (웃음) 본질을 파고들기 위해 노력하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학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이 일을 잘하고 싶을 뿐이고, 더 잘하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파고들게 된 거다.
-어쨌거나 그런 성향을 두고 누구는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깐깐하다”고 하더라. =개인적인 성격도 그렇거니와 겪어온 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다. 나의 커리어는 삼성영상사업단 시절의 전과 후로 나뉜다. 삼성전자에서 일을 시작했다는 것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자회사가 영상사업을 한다는 데 우여곡절이 많지 않았겠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공부했다. 지금 하는 일의 기반은 그곳에서 배웠다고 말할 수도 있다. 영화는 단기 프로젝트들의 연속이지만 나는 제조업 출신이다보니 사업 자체를 길게 보는 경향이 있다. 지금 나의 업무 방식이 거기에서 굳어진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게 어울린다.
-삼성영상사업단 시절, “영화가 산업 시스템을 갖춰야 대기업 자본이 산업에 머무른다”는 말을 한 적 있다. 그 생각은 아직도 유효한가. =산업화가 됐느냐, 안됐느냐의 척도는 기업들이 계속 이 업계에 머물고 있는가에 대한 여부다. 기업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건 더이상 산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시스템이 중요하다. 기업으로선 이 산업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산업을 큰 규모로 키워내고 시스템을 갖춰 영화 생태계가 잘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대표 시절, 영화계 안팎으로 CJ의 수직계열화에 대한 비난이 거셌다. 당시 말을 많이 아꼈다. =개인적으로 쉽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생각으로 이야기를 꺼내도 나라는 사람은 회사의 대변인으로만 비쳐진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내 나름의 산업에 대한 생각, 그리고 CJ에 대한 의견이 쉽게 반영되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고, 노력을 쏟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당연히 산업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한 논의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산업적인 이슈가 나왔을 때 논의의 당사자들이 노력을 하고 해결점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데 기업과 창작자들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사실 지금 업계에 있는 수많은 이슈들이 오랫동안 제기되어왔던 논의의 재탕이지 않나. 여전히 진영 논리로만 남아 있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내가 되묻고 싶다. 학생, 창작자, 기업가 등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목표가 동일할까? 다툼이 있다면 여러 테이블을 통해 양보를 하든 합의를 하든 해결점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대표 재임 기간이 약 8개월로 짧았다. 시간이 주어졌더라면 길종철의 색깔이 좀더 묻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쉽진 않나. =지금도 여전히 같은 회사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영화사업에 관여하지 않아도 같은 논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종 의사결정권자의 위치에 올라간 경험이 콘텐츠 개발 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원천 콘텐츠에 대한 소비가 남다르다고 들었다. 요즘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콘텐츠가 있나. =나는 잡식성이다. 한 분야를 심도있게 접근하기보다는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다 겪어보고 싶다.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서다. 재미없는 영화와 소위 망한 영화도 일부러 찾아본다. 왜 재미없는지, 왜 망했는지 생각하면서 보면 다 재밌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영화는 다 재미있다. (웃음)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보면 스토리나 캐릭터, 시대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설국열차> <더 테러 라이브> <감기>에 이르기까지 최근 영화는 다 정의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콘텐츠 소비의 시간은 항상 유익하다.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회사로 복귀할 텐데 언제를 목표로 하고 있나. =지금은 콘텐츠 개발실과 온라인으로만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한번 아파 보니 충분히 몸 상태가 회복된 상태가 아니라면 금방 또 몸이 망가질 것 같다. 오랫동안 제대로 일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듯하다. 회사와 논의하며 결정할 부분이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시간으로 삼고 있다.
인터뷰가 이루어진 곳은 길종철 상무의 자택 부근이자 평소 자주 찾는다는 CGV오리였다. 이곳에서 영화 감상은 물론이고 종종 콘텐츠 개발실 팀원들과 함께 업무 점검과 진행도 하고 있단다. 이날도 인터뷰와 40여분간의 대화가 끝난 뒤 직원들과 업무를 이어갔다. 기자가 인터뷰 장소를 떠나는 순간까지 버터플라이 프로젝트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을 정도로 그는 열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