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엥겔스는 가족해체의 무의식이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적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역설적인 역사의 장난’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 ‘사생아, 불륜, 가족의 해체’ 등 자극적 소재들이 스크린을 넘나드는 것을 보면서, 유독 그의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올해 15회째를 맞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가 이 과격한 서구화의 출구를 제시할지 모르겠다. 지난 15년간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문화 인프라 개발에 기여한 이 행사는 어느덧 40개국 142편에 이르는 다양한 영화들을 선보이는, 서울 최대 규모의 영화제로 성장했다. 올해는 8월22일부터 29일까지 일주일간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과 아리랑시네센터, 성북천 바람마당과 성북아트홀, 한성대학교 등 성북구 일대에서 영화제가 진행된다.
개막작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
개막작은 스콧 맥게히와 데이비드 시겔이 연출하고, 줄리언 무어가 출연한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이다. 헨리 제임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부모들의 양육권 다툼을 소재로 해 7살 메이지가 겪는 일화를 담는다. 도입부의 설정은 원작을 그대로 따른다. 하지만 10년간의 성장 기간을 다루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시간을 압축해 각색됐다. 배경 역시 센트럴 뉴욕으로 바뀐다. 아이의 시선을 중심으로 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특히 인상적인 영화로, 아역 오나타 에이프릴의 연기가 관객의 공감을 끌어낸다.
연출자의 연령대에 따라 분류된 단편영화 상영작들은, 영화제 유일의 ‘경쟁 섹션’에 속한다. 올해 초청된 작품은 총 56편이다. 9∼12살 어린이들이 만든 영화를 소개하는 ‘경쟁 9+’ 부문에는 김준영 감독의 <지우개>를 비롯해 각국의 다양한 단편영화 10편이 초대된다. 청소년이 제작한 영화를 선정한 ‘경쟁 13+’ 부문에는 핀란드의 유호 카리알라이넨이 연출한 <눈먼 사랑> 등 26편이 초청되었고, ‘경쟁 19+’ 부문에는 일본의 다자와 우시오의 <다루의 여행기> 등 20여편의 영화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섹션마다 대상을 비롯한 예술실험상 등 10개 부문의 시상이 따로 마련돼 있다.
세개의 섹션, 두개의 특별전으로 나뉜 비경쟁부문의 프로그램 또한 풍성하다. 어린이들을 위한 ‘키즈아이’ 섹션에서는 9월 개봉예정인 <괜찮아 3반>이 포함돼 있다. 소설 <오체 불만족>의 저자로 알려진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 원작 역시 그가 직접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했다. 팔다리가 없는 선천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주인공이 초등학교 담임으로 부임하면서 겪는 일화를 담는데, 소재의 강렬함은 히로키 류이치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력으로 상쇄된다. 한편,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이들을 다룬 노르웨이영화 <캐스퍼와 엠마>는 어린이영화 특유의 발랄하고 경쾌한 분위기로 관객을 사로잡는 수작이다.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알록달록한 분위기 속에서 엠마와 캐스퍼, 그리고 그들의 봉제인형이 벌이는 에피소드를 담는다. 동화와 뮤지컬 방식이 가미된 연출이 인상적으로, 다수의 텔레비전 시리즈로 인정받은 아르네 린드너 네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청소년을 위한 최신 영화를 소개하는 ‘틴즈아이’ 부문에서는 독일의 베른트 샬링이 연출한 <업사이드다운>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평범해 보이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열살 소년 사샤이다. 아이는 나쁜 손버릇과 거짓말 탓에 엄마의 신뢰를 잃은 데다 또래에 비해 글을 읽고 쓰는 것까지 느린 편이다. 때문에 사회복지사무소에 위탁되고, 그곳에서 복지사 프랑크를 만난다. 집중력 장애 치료를 받으며 변화하기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사회화의 의미와 그 반작용을 생각할 수 있다. 이어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으로 이름을 알린 배우 출신 톰 길로이가 연출 데뷔작 <낯선 땅>을 들고 관객을 찾는다. 베를린영화제 청소년부문에 초청돼 눈길을 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십대 소년 아티커스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엄마와 함께 숲속 통나무집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반부에, 엄마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후반부에 소개한다.
올 베를린 청소년 대상작 <쇼핑> 등 주목작 다수
성인을 위한 성장영화를 소개하는 ‘스트롱아이’ 섹션에서 돋보이는 작품은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언급된 카시아 로수아니에츠 감독의 <베이비 블루스>다. 급부상한 폴란드의 신예 여성감독이 선정한 주인공 나탈리아는 17살 소녀로, 이제 막 7개월 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담지만 그렇다고 우울한 영화는 아니다. 동시대 폴란드 청춘들의 이미지를 대변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는 패셔너블한 동시에 혼란스러운 이미지로 뒤덮여 있다. ‘블로그 형태’의 편집방식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야기는 종종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정지되며 간혹 검은 화면으로 절단되기도 한다.
구성의 특이성에 있어서는 레하 에르뎀의 <진> 역시 뒤처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마찬가지로 17살이다. 그녀는 터키 군대와 쿠르드 반군간의 전쟁을 피해 홀로 숲속에서 지내는데, 감독은 자연의 정경이나 거북, 곰과 같은 피사체들을 통해 소녀의 심경을 반사해 비춘다. 영화 중반부 이후 소녀가 사회에 편입되어 도리어 상처받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누아르풍의 동화’가 된다.
‘다문화’와 ‘청소년 성폭력’을 다루는 특별전 섹션에서 눈여겨볼 작품으로는 마크 알비스턴과 루이스 서더랜드 감독이 공동 연출한 <쇼핑>을 들 수 있다. 1981년의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해 다문화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무기력한 사모아인 어머니와 폭력적 기질의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윌리와 솔로몬 형제가 주인공이다. 형 윌리가 일하는 대형 상가에, 어느 날 배짱있는 도둑 베니가 출현해 단번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아이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청소년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당시 심사위원단은 “아역들의 연기가 돋보이고, 날카로운 편집과 강력한 시각적 효과, 가족의 모순이 끌어안은 고통과 사랑의 마음을 잘 표현한 영화”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외에도 청소년 영상문화 저변의 확대에 기여할 다수의 수작들이 관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