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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의 날씨] 죄와 인간, 무엇을 미워할 것인가
김영하(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김현영(일러스트레이션) 2013-07-29

<에브리데이>의 아버지가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

지난 4월의 일이다. 남쪽 지방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배가 자기 학교에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했다. 그 선배도 보고 싶고 해서 흔쾌히 수락했다. 강연을 그럭저럭 마치고 학교 직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러 갔는데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사람이 교직원이 되어 거기 있었다. 반가웠다. 좀 후덕해지긴 했지만 옛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정확히 20년 전, 경기도 화성의 한 부대에서였다. 당시 나는 사단 헌병대 수사과 소속이었고 그는 내 바로 밑의 후임이었다. 그 사단은 사건이 많기로 유명했다. 수원, 화성, 안양, 과천, 평택, 오산, 송탄을 아우르는 넓은 관할 구역 탓이었다. 그 부대 병사들보다는 휴가를 나와서 사고를 치는 다른 부대 병사들 때문에 사건이 넘쳤다. 강도/강간이나 패싸움, 탈영 같은 굵직한 사건부터 교통사고 같은 시답잖은 사건까지 종류도 가지가지에 건수도 많았다. 이렇게 사건이 많이 터지는 수사과에서는 과원들끼리의 팀워크가 중요하다. 수사 진척이 느리다며 수사과장은 하루 종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고 검사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고 온 수사관들은 의견서를 박박 찢으며 짜증을 부려댄다. 그 와중에 육군본부 같은 상급부대에서 난데없이 오래전에 처리한 사건을 전화로 문의해오기도 하는데, 누군지 묻지도 않고 친절하게 대답해줬다가는 함부로 기밀을 누설했다고 날벼락을 맞기도 한다. 이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서로 돕지 않으면 바로 사달이 난다. 워낙 사건이 많다보니 나는 사격이나 유격, 태권도 같은 야외에서 하는 훈련에는 거의 한번도 가보질 못했다. 헌병대에서 보내지 않겠다면 안 보내는 것이다. 나는 바깥 구경 한번 못해보고 꼼짝없이 붙들려 피의자 신문조서나 의견서 같은 서류를 타이핑하면서 군 생활을 보냈는데 내 후임인 그도 나와 똑같은 신세였다. 우리는 탁구의 복식조처럼 눈부신 속도로 4벌식 수동타자기와 2벌식 전동타자기, 갓 도입되기 시작한 QWERTY 자판의 286컴퓨터 자판을 번갈아 두들겨대며 정신없이 서류를 꾸며 법이 정한 시한 안에 사건을 검찰로 송치하는 작업을 도왔었다.

“참,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형이 제대한 직후에 헌병대가 발칵 뒤집혔어요.”

새로 부임한 헌병대장이 불시에 영창에 쳐들어가 소지품 검색을 했는데, 영창 곳곳에서 다수의 담배가 발견된 것이다. 대다수는 영창에서 근무를 서는 헌병들이 준 것이었다. 관련되지 않은 대원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의 사건이었는데 새 헌병대장은 원리원칙대로 헌병대 사병 거의 전원을 영창에 처넣고 정식으로 사건처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수사과 인원들까지 모두 영창에 들어가는 바람에 조서를 타이핑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고 하는 수 없이 수사과의 간부들이 내 후임인 그만 영창에서 빼내왔다는 것이다.

“있었으면 형도 걸렸을 거예요. 참 운도 좋은 사람이라고 그랬죠.”

우연히 마주친 후임 덕분에 20년 전의 영창의 모습과 거기에서 있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영창에 깔려 있던 노란색 모노륨부터 완강한 철창, 양반 자세로 앉아 억지로 잠을 쫓으며 독서를 해야만 했던 수감자들, 선량하고 평온한 얼굴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까지.

내가 그들과 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은 특별한 계기 덕분이었다. 어느 날 헌병대장이 나를 부르더니 수감자들의 수양록(수감자들의 일기)을 편집해 책으로 펴내고 싶다고 한 것이다. 평소 수사과 업무가 바빠 영창 근무를 거의 서지 않던 나는 그 일 때문에 자주 영창에 내려가 수감자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때 영창에는 고등학교 시절 자기와 친구들을 괴롭히던 선배를 칼로 찔러 죽인 일이 뒤늦게 들통 나 잡혀들어온 이병과 탈영 기간 중에 수십 차례의 강도, 절도, 강간을 저지른 혐의로 체포된 하사가 있었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이 하사는 강도를 하러 들어갔다가 여자가 있으면 강간을 했는데 옆에 시아버지가 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죄질이 아주 나빴다.

영창의 수감자 전원이 수양록을 써내야 했지만 잡범들의 글은 하나같이 한심했다. 그들에게 수양록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숱하게 썼던 반성문과 다를 바 없는 지겨운 의무에 불과했다. 그러나 1심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각각 구형받은 이 두 중범들은 달랐다.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었던 이들은 당시 스무살, 스물두살에 불과했고 맞춤법도 엉망이었지만 삶과 죽음의 문제가 코앞에 닥쳐온 이들의 글에는 진중한 무게가 있었다.

먼저 재판을 마친 하사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2심을 거치고 사단장의 감형까지 더해져 15년으로 형이 줄었다. 그의 수양록은 길었다. 어떤 날은 수십 페이지에 달할 때도 있었다. 마지못해 의무로 쓰는 글이 아니었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형이 구형된 날의 일기에는 죽음에 대해 썼고, 15년으로 감형된 날의 일기에는 서른일곱살이 되어 출소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담히 그리고 있었다. “아직은 너무 멀게만 느껴지지만 희망을 버리지 말자. 하루하루 의미있게 살아가자”고 씌어 있었다. 그의 글을 읽고, 그의 눈을 보면 그가 1년이 넘도록 남의 집 담장을 넘어다니며 그토록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눈은 맑고 문체는 명징하고 말투는 공손했다. 언젠가 그에게 물었다. 후회하느냐고. 그는 그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 1년이 그냥 하룻밤의 꿈 같습니다. 현실 같지가 않습니다.”

그에게는 여자가 있었다. 그가 기술 부사관으로 입대하자 여자는 그를 떠났다. 휴가를 나온 그는 자기를 버린 애인을 찾아다니다가 귀대 시간을 놓쳤고 그대로 탈영병이 되어 수원까지 흘러갔다. 수원의 한 술집에서 그는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남자를 만났다. 이름이 같은 이 남자는 하사를 데리고 어떤 집으로 가더니 갑자기 남의 집 담을 넘었고 하사는 그가 다시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자기도 모르게 망을 보게 된 셈이었고 그게 시작이었다.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의 <에브리데이>는 마약 밀매 혐의로 수감된 남자와 그 가족의 5년간의 삶을 보여준다. 마약 밀매라는 범죄는 분명한 피해자가 없다. 사고 팔지 말아야 할 물건이라서 문제지 본질은 장사고 거래다. 영화는 주인공의 수감 생활과 면회 장면만 거듭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그가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단지 가족과 떨어져 거친 범죄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네 남매의 아버지로만 보인다. 만약 주인공이 저지른 범죄가 20년 전의 그 하사가 저지른 성질의 것이었다면 영화는 좀더 어려운 질문을 감당해야만 했을 것이다.

20년 전 운명은 나에게 독특한 임무를 맡겼다. 나는 맑은 눈의 탈영병이 1년 동안 저지른 끔찍한 죄상을 낱낱이 내 손으로 직접 기록한 뒤, 바로 그 주인공의 입으로 자신이 저지른 그 모든 일이 그저 ‘모든 것이 하룻밤의 꿈만 같다. 비현실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도록 했다. 그런 뒤에 그가 진심을 다해 적은 참회와 반성의 일기를 받아 그걸 편집하도록 했다. 조서 속 흉악범과 무책임한 회상의 주체, 참회하는 어린 양은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막상 겪어보면 죄와 인간을 함께 미워하는 일이 의외로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그들이 우리 눈앞에 있을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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