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인상의 사내는 눈을 내리깐 채 바닷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막 전쟁에서 돌아온 퇴역군인 프레디 이다. 전후 미국의 정신적 세계를 다룬 영화 <마스터>에서 그로 분한 배우 와킨 피닉스는 말 그대로 온몸을 동원해 그의 내면 풍경을 스크린 위에 새겨넣는다. 그 몇몇 표정들에 깊이 감화 받아 섣부르게나마 와킨 피닉스가 지나온 몇몇 영화적 풍경을 곱씹어보는 이 기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와킨 피닉스를 향해 긴 구애를 벌였던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선택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다.
Filmography
2013 <허> <인히어런트 바이스> 2012 <마스터> 2010 <아임 스틸 히어> 2008 <투 러버스> 2007 <레저베이션 로드> 2007 <위 오운 더 나잇> 2005 <앙코르> 2004 <래더49> <빌리지> <호텔 르완다> 2003 <올 어바웃 러브> 2002 <싸인> 2001 <버팔로 솔져스> 2000 <글래디에이터> <더 야드> <퀼스> 1998 <리턴 투 파라다이스> <클레이 피전스> <8MM> 1997 <악의 꽃> <유 턴> 1995 <투 다이 포> 1989 <우리 아빠 야호> 1987 <러스키즈> 1986 영화 데뷔작 <스페이스 캠프> 1982 TV시리즈 <일곱 형제의 일곱 신부>로 데뷔
여기, 등이 굽어 슬픈 사내가 하나 앉아 있다. 바람을 타고, 파도를 타고,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는 반듯한 자세를 하고 새로운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가지 못한다. 대신 고향으로 돌아가 고단한 몸을 누일까 생각해보지만, 아직 순결을 벗지 못한 그곳은 포성과 화염을 채 씻어내지 못한 그에게 어쩐지 벅차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움츠러뜨린 어깨와 삐딱하게 휜 허리를 짊어진 채로, 다시 바람을 타고 파도를 타고,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서툰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여로의 가장 충직한 벗은 되는대로 만든 독주(毒酒)뿐. 어떤 ‘마스터’도 그 취한 동물의 굽은 등을 완전히 굴복시켜 그에게 영원한 안식처를 선물하지는 못하리란 불길한 예감이, 숙취만큼이나 끈질기다.
영화 <마스터>에서 퇴역군인 프레디 의 굽은 등이 말할 수 없이 서글프다면, 그것은 그에게 자신의 육체를 온전히 내준 배우 와킨 피닉스 덕분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고향 미국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들어가는 데 완전히 실패하는 프레디와 함께 기꺼이 연기의 정도에서 벗어나보았고, 그 탈선의 연기로부터 하나의 얼굴에 비견될 만한 육체의 표정을 빚어내는 데 이르렀다. 그 표정이야말로, 자신의 마음과 몸을 통제하려 애쓰는 인간들의 초상에 관한 이 영화가 결코 통제하지 못한 무언가가 아닐까. 직사각형의 스크린 속에서 잔뜩 기울어진 피닉스의 실루엣은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예민하게 인간이란 존재의 불안을 응시한다.
필사적 추락만이 전능한 동력
불안하니까 배우다. 피닉스는 어느 시집의 제목을 이렇게 바꿔 읽도록 만드는 배우다. 일찍이 그(<투 다이 포>(1995))와 형 리버(<아이다호>(1991))를 모두 연출해본 바 있는 구스 반 산트는 그들의 차이를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다. “리버는 자신이 잘했는지 못했는지 스스로 잘 알았다. 만약 누군가가 다르게 해보라고 제안하면 근거를 들어 ‘아뇨, 방금 한 게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와킨에게 그러면 완전히 자신감을 잃고 자기비판에 빠져버린다. 결국에는 둘 다 좋은 결과물을 내놓지만.” 불혹을 넘긴 나이에 30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지금도 그는 여전히 ‘안전’한 연기를 불신한다. “내 생각에 진실한 연기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통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뿐이다.” 그렇듯 그는 불안해서 필사적으로 헤매고, 헤매면서 불안을 증폭시키고, 그 커진 불안을 다시 연기의 동력으로 끌어들이는 유형의 배우다. 단언컨대, 불안은 그의 힘이다.
마조히즘적 기질이 다분한 그는 연기를 일종의 고의적 추락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위 오운 더 나잇>(2007)을 끝내고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많이들 물어보는데, 말도 안되는 질문이다. 그건 20m 높이 건물에서 뛰어내린 사람에게 어떤 자세로 떨어졌냐고 물어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도 모른다. 어떤 때는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질 수도 있는 거고. 떨어지고 나면 다 끝이다.” 그 추락을 견뎌낸 몇몇 영화가 그를 주목할 만한 동시대 미국 배우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첫 번째 생존자는 <투 다이 포>의 덜떨어진 고등학생 지미였다. 그는 남편의 죽음을 이용해 전국구 방송에 출연하려는 미모의 기상 캐스터에게 홀려 살인범이 되고 만다. 하지만 사건보다 인상적인 것은 어딘가 나사가 풀린 지미의 캐릭터다. 저 맹하고 지질한 캐릭터를 피닉스는 마치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과 헐렁하게 늘어뜨린 말투로 완성해냈다. 형의 죽음을 뒤로하고 스크린에 복귀하자마자 그런 식으로 자신을 기꺼이 놓아버린 그의 연기에 대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정확하면서도 유약한” 연기라, <LA타임스>는 “중도에서 벗어난 섬세한 연기”라 호평했다. 이 역할로 그는 향후 몇년간 <악의 꽃>(1997), <유 턴>(1997), <클레이 피전스>(1998) 등의 영화들에서 형 리버와 마찬가지로 심란한 청춘을 연기하게 된다.
그러나 첨언하자면, 피닉스의 연기는 중력가속도로 낙하하는 쪽보다 서서히 곪아 문드러지는 쪽이다. 그가 청춘 배우에서 다시금 성인 배우로 성장했음을 증명한 영화,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명장 막시무스에 왕위를 물려주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코모두스의 뒤틀린 욕망이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앓고 또 앓는다.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와 어둠 속에 반쯤 잠긴 얼굴은 권력과 탐욕이란 병의 증상을 고스란히 비춰낸다. 그리하여 그는 생애 처음으로 오스카를 비롯한 수많은 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콜로세움에서는 막시무스에게 왕좌를 위협당했지만, 스크린이라는 전장에서는 그와 팽팽한 무승부 경기를 펼쳐 보인 셈이다.
그의 ‘앓는 과정’으로서의 연기는 <앙코르>(2005)로도 이어진다. 로큰롤의 전설 조니 캐시로 분한 그는 실제로 알코올중독에 빠졌고 급기야 스스로 치료시설을 찾았다. 이 범작에서 일말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것도 그 육체적 리얼리티다. 그는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부담감에 대해 오히려 “그토록 복잡한 인간을 연기할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는데, 실존인물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자신을 물리적으로 그 정도의 수준으로 망가뜨릴 수 있는 배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그를 ‘메소드 배우’라는 말로 격하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연기에의 헌신은 지독하게 자기 확신을 결여하여 캐릭터와 배우 사이에 놓인 벽에 마구 자기 머리를 찧어대는 배우에게서만 드물게 발견되는 것이다.
그의 불안증을 영화적 에너지로 가장 훌륭하게 활용해낸 작가가 제임스 그레이다. 피닉스와 그레이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뛰어난 화학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던 까닭에 관해 그레이 본인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와킨 과 나는 세상을 보는 방식이 매우 비슷하다. 우리 둘 다 인간의 행동을 정직하고 진실한 방법으로 살펴보는 일에 관심이 많다. 특히 와킨은 복잡한 감정이나 내면화된 갈등 등을 굳이 언어화하지 않고 관객에게 전달하는 데 진정으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느낄 수 있다. 그건 배우에게 아주 중요한 자질이며, 그런 자질을 발견했을 때 감독은 그걸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드라마의 정수가 있으니까.”
내면을 투영해낼 줄 아는 재능
그레이가 말하는 배우에게서 드물게 발견되는 ‘드라마’의 자질이란, 인간이라는 한 우주 속의 카오스를 투시해내는 능력이 아닐까. 피닉스가 조니 캐시를 가리켜 ‘복잡한 인간’이라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그레이가 말하길, “와킨이 지닌 귀중한 자질은 로버트 드 니로나 알 파치노처럼 1970대에 활동했던 위대한 배우들 혹은 그보다 앞 세대인 몽고메리 클리프트 같은 배우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것들이다. 그들은 항상 자신을 향한 분노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런 혼돈과 분노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갈등으로 가득한 내면을 그들은 어떻게든 (밖으로) 투영해낼 줄 알았다.”
그러고 보면 피닉스의 별로 흥미롭지 못한 몇몇 작품들은 그런 인간 내면의 혼돈을 외부 세계의 풍경으로 손쉽게 치환해버린 탓에 피닉스의 매력을 십분 활용하지 못한 경우들이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싸인>(2002)과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의 <올 어바웃 러브>(2003) 등이 그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소방관들의 삶을 다룬 <래더49>(2004)가 밋밋한 액션에 그치는 까닭도, 그의 얼굴에서 어떤 소용돌이의 흔적을 지워버린 데 있다.
반면 그레이의 작품들은 피닉스의 어둠을 함부로 희석하지 않는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어둠을 영화의 결정적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마크 월버그가 그레이의 영화에서 사회적 시스템 안으로 진입하며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특히 그레이의 영화들은 어떤 장르 안에서 움직이는 가운데 그 장르를 초과하는 인물들의 비극적인 표정에 집중하는데, 그 표정은 종종 미국 사회의 이방인을 연기하는 피닉스의 얼굴에서 가장 잘 발견되는 듯하다. <더 야드>(2000)에서 누구의 가족도 되지 못한 윌리 쿠티에레즈가 절박한 심정으로 계단 위의 약혼녀를 향해 몸을 던질 때, <위 오운 더 나잇>에서 경찰 가족과 러시아 마피아 고용주 사이를 오가던 바비 그린이 아버지를 죽인 놈을 처단하기 위해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갈대밭 안으로 다시 들어설 때, 그 사내들은 갱스터적인 액션의 쾌감을 뒤로한 채 멜로드라마적인 흐느낌 속에 던져진다. 그 흐느낌이 환기하는 것이란, 그 사내들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과오다. 그리고 그 과거와 과오 가 폭발하기 직전의 자리에 그레이는 종종 피닉스의 눈물 흘리는 얼굴을 위치시킨다.
물론 불안한 예술가로서의 피닉스의 장점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낸 영화는 <투 러버스>(2008)였다. 자신의 기억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과거의 여자와, 현재 창문 너머로 올려다 보이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자와,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지켜주고 싶다고 말하는 여자. 세 여자로 향하는 갈림길 위에서,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남자 레너드 크래디토는 정처없이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관객의 마음까지 요동치게 하는 까닭은, 피닉스가 그 흔들림을 ‘연기’하지 않고 그냥 진짜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 야드>를 시작으로 그레이와 세 작품을 함께한 그는 그레이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핵심을 찌르는 연기로부터 벗어날 줄 아는” 용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그는 참고 작품이나 현장 모니터링은 물론 자신이 경험한 감정에도 닻을 내리지 않은 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감정의 물결에 떠내려간다. 그 위태로운 몸짓이 더없이 측은해지는 순간들이 <투 러버스>에는 수없이 많다.
얼굴 표정보다 더 쓸쓸한 육체
<마스터>의 프레디 도 레너드 크래디토의 연장선상에 있는 캐릭터다. 피닉스는 폴 토머슨 앤더슨 감독과의 작업에서도 그레이의 영화들에서와 비슷한 방식을 취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그 결과, 정도(正道)에서 비껴나 마구잡이로 달리는 프레디의 이미지가 피 닉스의 육체 위에 새겨졌으며, 그 육체가 미장센의 일부를 형성하고, 나아가 이 영화의 지배적인 감정까지 결정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먼저 그의 굽은 등이 그러하다. 앞서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앙코르>에서 조니 캐시 역에 키도 훨씬 작고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피닉스를 캐스팅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와킨은 뒤에서 찍어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도,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전달이 된다.” 맨골드의 표현을 확장하자면, 그 등은 <마스터>에서 하나의 얼굴로 쓰이고 있다. 프레디가 막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함께 돌아온 전우들 사이에 섞여들지 못한 채 스크린의 한쪽 끝에 위태롭게 서 있을 때, 바다를 향해 홀로 자위에 몰두할 때, 백화점 사진관에서 어느 중산층 고객을 불만 섞인 표정으로 쳐다볼 때, 새로운 삶을 약속했던 ‘마스터’와 감옥에서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격렬하게 들이받을 때, 수직의 스크린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그 휘어진 등선은 인간이 얼굴로 써낼 수 있는 어떤 표정보다 쓸쓸하다.
그렇다고 피닉스의 얼굴이 이 영화에서 덜 중요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흑발에 가까운 머리칼(피닉스는 헤어스타일로 캐릭터에 변화를 주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과 짙은 눈썹, 깊게 팬 눈, 매서운 콧날, 찢어진 윗입술은 모조리 비대칭을 이루며 그의 얼굴에서 무엇보다 균열을 먼저 감지하게 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이 그의 얼굴을 굳이 65mm 필름으로 찍으려고 했다면, 아마도 그 얼굴을 화면 가득히 키워놓고 보았을 때 비로소 느껴지는, 마치 스크린을 찢어내는 듯한 그 격렬한 비대칭의 미장센에 이끌렸던 게 아닐까.
비대칭적인 미장센으로서의 그의 얼굴은 즉각적으로 다른 비대칭적인 미장센들과 겹쳐진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순식간에 지나가는 숏 하나가 있다. 프레디가 갑판에서 술병들을 들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화면은 흔들리는 배에 고정된 카메라에 의해 절반의 안정된 선상과 절반의 광포한 파도로 분열돼 있다.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아슬아슬하게 대면하고 있는 그 숏이 안기는 두려움과 불안함은 피닉스의 사선으로 찌그러트린 얼굴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앤더슨이 이 영화와 관련해 자주 언급한 오슨 웰스의 <미스터 아카딘>에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기울어진 숏의 벡터들이 피닉스의 삐딱한 이목구비 안에 응축돼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그의 삐딱한 미장센은 ‘마스터’의 숏과 맹렬히 충돌하거나 찢어져나가며 한장의 격렬한 멜로드라마로 완성된다. 그러니 반듯반듯한 연기론과 일찍이 갈라선 피닉스의 육체 없이는 이 멜로드라마의 정조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배우 일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한 것이 싸우는 신이었다”는 배우 피닉스에게는 연기 자체가 “싸움”이다. 자기와의 싸움, 도그마와의 싸움, 시스템과의 싸움. 그는 심지어 자신을 비추는 조명과도 싸우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그 싸움을 통해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을 앓아내고 그리하여 스크린 위에 그만의 불온한 아름다움을 새겨넣을 때, 관객은 그 싸움의 보이지 않는 응원군이 되지 않기가 힘들다. 훌륭한 연기란 종종 미지의 행로에 들어선 탐험가만이 발견해낼 수 있는 것임을 새삼 일깨우는 <마스터>의 배우 와킨 피닉스의 차기작들이 더욱 기다려지는 까닭이다.
와킨 피닉스를 얼마나 아세요?
-그의 필모그래피에 종종 등장하는 ‘Leaf’ 피닉스는 누군가요? =리프가 와킨입니다. 어릴 때부터 자연을 참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 누나, 동생들은 다 리버, 서머, 레인 같은 자연적인 이름들인데 왜 자기만 발음도 헷갈리는 와킨이냐며 이름을 바꿨었답니다. 그러다 다시 와킨으로 돌아간 게 형의 죽음 이후 첫 복귀작 <투 다이 포> 때부터입니다.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나요? =어릴 때는 ‘신의 아이들’이란 컬트 종교 단체에 속한 부모를 따라 중남미를 떠돌며 살았던지라 기회도 없었고, LA에 정착한 뒤에도 9학년 때 아예 학교를 그만뒀습니다. 근데 “학교에서 가르치는 연기론을 거스르라”고 늘 주장하는 그를 보면 연기과를 갔다고 해도 바로 뛰쳐나왔을 것 같습니다.
-은퇴선언을 한 적 있지 않나요? =<투 러버스> 홍보 때 흡사 중동 대사 같은 비주얼로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나가서 자기는 이제 연기 안 하고 힙합 랩에 열정을 불태울 거라며 대대적으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 <아임 스틸 히어>라는 셀프 페이크 다큐를 위한 설정이었습니다.
-<아임 스틸 히어> 봤는데요, 그게 연기인가요? =그가 처남이자 동료인 케이시 애플렉 감독과 1년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해서 완성한 ‘와킨 피닉스를 연기하는 와킨 피닉스’의 비주얼과 애티튜드에 놀라셨나보군요. 그럴 만도 합니다. 절친으로 알려져 있는 제임스 그레이조차 몇몇 인터뷰에서 “웬 멍청한 짓이냐”며 화를 냈었으니까요. <투 러버스>에서 잠깐 보여줬던 것보다 크게 나을 게 없는 자작 랩을 들고 디디를 찾아가 온갖 수모를 당하질 않나, 마이애미에서 가장 핫하다는 클럽에서 싸움을 벌이질 않나, 보고 있으면 아무리 연기라도 좀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피닉스 본인은 그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배우로서 자신이 지닌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진짜 자기가 나온 영화를 보지 않나요? =그뿐인가요. 현장에서 모니터도 절대 안하고 감독들이 보라는 영화도 말로는 봤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안 보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 걸 보면 “스스로의 연기를 너무 의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답니다. 알고 보면 이 막 나가는 아웃사이더에게도 그런 소심한 면이 있답니다.
-차기작은 뭔가요? =우선 올해 칸에서 공개된 그레이의 신작 <이민자>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 그는 쇼걸들을 데리고 있는 쇼단의 단장이자 그녀들을 창녀로 팔아먹는 포주 브루노 역을 맡았습니다. 브루노는 한 폴란드인 여자를 이용하려다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사랑에 실패하는 사내입니다. 그다음으로 후반작업 중인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허>(Her)가 있습니다. 한 고독한 작가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는 여성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 SF로맨스입니다. 한편 폴 토머스 앤더슨과 다시 뭉친 <인히어런트 바이스>도 촬영 중입니다. 토머스 핀천 소설을 각색한 영화에서 그는 1970년대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마 좀 피우는 사립탑정 주인공을 맡았는데요. 구글에 검색하면 현장 스틸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보시면 코미디영화를 찍고 있나 싶을 정도로 수상한 외모에 놀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