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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과 시선의 액션쾌감

순수한 취향에서 출발한 <감시자들>은 어떻게 유능한 오락물이 되었나

무릇 한편의 액션영화라고 한다면 과격한 격투와 폭발 장면이 많아야 한다는 선입관은 이제 버리자. 영화 <감시자들>은 액션영화에 관한 통념을 근사하게 비껴가는 오락물이다. <감시자들>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인지 짚어보았다. 그리고 <감시자들>을 공동으로 연출한 조의석, 김병서 감독도 만났다.

경찰청 감시반원들에게 골치 아픈 적수가 하나 나타난다. 대담하게 은행을 털고 손쉽게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한 무리의 강도단과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그림자’(정우성)가 그 유능한 적수다. 넉살 좋고 지도력 있어 보이는 감시반 황 반장(설경구)은 이제 막 신입으로 들어온 총명한 여형사 하윤주(한효주)를 포함하여 동료들과 함께 이 사건에 뛰어든다. 황 반장은 어렵사리 CCTV를 통해 강도단 무리 중 한명을 찾아내고 그를 실마리 삼아 강도단의 실체를 파악하고 마침내 그림자와도 대면하게 된다. 감시반과 강도단의 감시극, 추적극, 대치극이 서울 시내 주요 도심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감시자들>은 1990년대 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미션> <흑사회> <맹탐> 등 두기봉 영화의 각본에 다수 참여하고 있는 주요 각본가 유내해의 감독 데뷔작 <아이 인 더 스카이>(2007)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일단 두 작품에는 공유되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수사극에서 감시란 수사 과정상의 일부분에 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소극적이고 정적인 최소한의 수사행위로 다뤄져왔으며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실제로 일선 경찰의 감시반 업무가 <아이 인 더 스카이>나 <감시자들>의 그것과 같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두 영화의 감시반원들은 영화적 상상과 함께 활발해져 있으며 다른 영화에서는 주변에 불과했던 그들의 업무가 지금은 가장 중요하다. 그들은 감시를 넘어 추적과 대치라는 동적 액션에까지 전적으로 가담하고 있다.

반면에 <감시자들>은 원작과 차별화도 모색한다. 두 가지가 주요하게 강조된다. 감시와 추적을 위해서는 동원이 불가피한 첨단 기술, 그것의 쓰임이 가져오는 긴장감이 첫 번째다. 어떤 신생 기술의 탄생은 어떤 서사를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가령 휴대폰이 상용화된 이후에 다음과 같은 장면은 동시대적 영화 서사로 선택되는 데 곤란을 겪는다. 여주인공이 황무지의 어딘가에서 악랄하고 잔혹한 살인마에게 쫓기고 있다. 그녀는 구조요청을 위해 얼핏 보아두었던 공중전화 박스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린다. 몇 십년 전의 관객이라면 손에 땀을 쥐었을 그 장면을 보며 당대의 관객은 심드렁하게 물을지도 모른다. 휴대폰을 쓰면 될 일 아닌가. 공중전화를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손에 쥔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쪽의 긴장이 더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영화 <추격자>의 살인마가 살고 있는 그 집, 특히 도륙이 자행되던 욕실, 그곳에서 휴대폰은 끝내 터지지 않았고 위험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드라마의 반전 대신 액션의 템포

고도로 디지털화된 CCTV와 휴대폰이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감시자들>의 어떤 서사는 거의 진행이 불가능하다. 아니 실은 그것들을 적극 활용할 때에야 주요 국면을 넘어간다. 영화의 초반부, 일명 물먹는 하마라고 불리는 강도단의 일원을 CCTV가 발견하게 해주었으며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청계천 신에서도 휴대폰은 여러 차례 긴장의 국면 한가운데에 들어선다. 원작에서도 그러한 편이지만 <감시자들>의 기술 세계는 훨씬 더 세련되고 복잡하고 빨라지고 중요해진 느낌이다.

또 하나는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있다. 구식으로 보이기 짝이 없지만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는 인간 본연의 본능적 감각이다. 이 문제는 물론 유내해가 각본으로 참여해온 두기봉의 영화세계에서 이미 하나의 계열을 이루고 있다. 때로 두기봉의 인물들은 하늘을 날거나 건물을 들어올리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자신들만의 부분적인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초능력을 지닌 자들은 언제나 한계나 장애도 함께 지니고 있다. 최근작 <맹탐>에서도 눈이 보이지 않는 형사는 오로지 후각과 후각이 이끄는 상상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초능력을 선보인다. <감시자들>에서는 이 초능력이 디지털 세계에서의 아날로그적 본능으로 발휘된다. <감시자들>의 황반장은 부하직원들에게 감시반은 오로지 발로 쫓고 눈으로 관찰하고 머리로 기억하는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의 활동에는 제약이 따르지만 그럴수록 그 제약을 타개하는 자신들만의 초능력으로서의 출중한 지각력과 기억력은 더욱더 빛나게 된다.

<감시자들>은 저 두 가지 차별화를 강조하여 수사 과정에 긴박감을 가한다. 드라마의 반전 대신 액션의 템포를 중시하는 쪽이다. 알고 보니 내부에 스파이가 있었고 그 스파이가 바로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국장이었다는 식의 반전이 이 영화에는 없다. 영화는 아군과 적군을 처음부터 분명히 나누고 대략 몇개의 시퀀스(신이 아니다) 별로 굵직하게 단위를 형성한 다음, 시퀀스마다 한 차례씩 집중적으로 감시와 추적의 액션들을 포화하듯 쏟아붓는다. 비교컨대 <감시자들>은 <본 얼티메이텀>이 워털루역 장면에서 이룩했던 활극의 느낌을 자신의 영화의 매 시퀀스에서 성취하기를 바란 것 같다.

감시라는 특수한 분야를 상상한 스페셜리스트

<감시자들>의 액션은 빈번한 물리적 타격이나 충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벌어지는 동선과 시선 혹은 교신과 수신을 중심으로 하는 액션이다. 동선과 시선이 배제되는 액션영화란 거의 없는 편이지만 유독 <감시자들>의 긴장은 누군가를 내내 남모르게 쫓아다녀야 한다는 것(동선)과 쫓아다니되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로 한시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시선)에서 발생한다. 더군다나 감시반원들의 경우라면 그들의 모든 수사 행위가 본부와 혹은 수사에 참여한 모든 동료와 연계되어 있는 일이므로, 이때의 긴장이란, 그들 사이에 오고 가는 긴밀한 무전의 송수신 상태(또는 종종 끊기는 송수신의 불안정한 상태)에 의해서 발생한다. 황 반장이, 하윤주가 그림자를 쫓을 때 이들은 서로의 상태를 교신받지 못해 애가 타거나 어느 찰나에 교신받기 때문에 다시 액션에 불이 붙는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끝을 맺어 도리어 심원한 철학적 문제를 촉구하는 <아이 인 더 스카이>의 결말은 그 영화만의 독특한 매력일 것이다. 하지만 그 영화에는 적지 않은 느슨함도 있었다. 그건 흠이었는데 그 흠을 리메이크 과정에서 보완한 것이 오락물로서 <감시자들>의 성취로 보인다. 예컨대 캐릭터들의 적절한 균형감과 성격화가 보완되었다. 인물들은 보다 자신들을 도드라지게 보일 수 있는 몇 가지 주특기나 대사 내지는 일화들을 충실히 부여받았고 그 디테일들의 힘으로 전체의 분위기가 왕성해지는 힘까지도 얻게 됐다. 한편 전반적으로 빠른 속도감을 지향하는 가운데에도 어떤 통일성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것도 이 영화의 큰 장점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감시자들>은 가치있어 보인다.

적어도 <감시자들>은 요즘 한국 영화계에 유행하는 적당주의 기획 상품들과는 다소 차별점이 있다. 이것은 소재를 어디서 구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구한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이 영화는 창작자들 자신의 순수한 취향과 애정에서 출발한 듯한 느낌을 충분히 전한다. 특수한 소재를 고르고도 거기에 일반화된 코드들을 총집결해 두루뭉술한 감동만을 좇다가 결국에는 제 스스로 무너지는 한국영화들이 수두룩하다. <감시자들>은 감시라는 특수한 분야의 특수한 성질을 성실하게 각색하고 상상하고 활용한 스페셜리스트를 자처함으로써 하나의 유능한 오락물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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