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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패틴슨] 낯설고 차가운 피
장영엽 2013-07-01

로버트 패틴슨

어쩌면 후대에 로버트 패틴슨의 일대기를 서술하는 평자는 이런 말을 남길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코스모폴리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통해 할리우드 10대 소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뱀파이어는 6월27일 개봉예정인 <코스모폴리스>에서 작가 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의 협업을 통해 배우 인생의 제2막을 열어젖히려 한다. 이 글은 새로운 잠재력의 배우를 발견하는 마음으로 쓴, 로버트 패틴슨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코스모폴리스>가 영화로 제작된다는 사실에 기뻐해야겠지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로버트 패틴슨을 캐스팅한 건 완전히(totally),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독립영화전문지 <인디와이어>의 2011년 기사다. 그저 캐스팅 소식만 들려왔을 뿐인데, 아직 영화현장에 얼굴도 들이밀지 않은 배우를 이토록 직설적으로 반대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코스모폴리스>의 주연배우가 콜린 파렐(그는 리부트되는 <토탈 리콜>의 출연을 위해 영화에서 하차했다)에서 로버트 패틴슨으로 바뀌는 순간, 수많은 영미권 매체들이 <인디와이어>와 비슷한 난색을 표하거나 그 계기를 궁금해했다. 예측 가능한 반응이다. 심오하고 철학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작가 중의 작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미국 10대 소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로버트 패틴슨의 접점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로버트 패틴슨은 연기로 주목받는 배우가 아니라 그저 뱀파이어 역할로 유명세를 얻은 스타에 가까웠다. 대중은 패틴슨이 어떤 영화에 출연했는지보다 그가 어떤 옷을 입고 누구를 만나는지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둘러싼 열광적인 팬덤에도 그 이유가 있겠으나, 대중의 시선을 자신의 영화로, 캐릭터로 인도하지 못한 패틴슨의 부족한 연기력에도 책임은 있다고 여겨졌다. 그는 <트와일라잇> 프랜차이즈의 막간을 틈타 <리멤버 미> <벨 아미> <워터 포 엘리펀트> 같은 영화의 주연을 맡았지만, 노련한 상대배우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거나 캐릭터를 소화하기에 역부족이었다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그런 그였기에 차기작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기대감은 온전히 감독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코스모폴리스>의 로버트 패틴슨을 보면서는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그와 전작을 함께했던 감독들이 이 배우를 활용하는 방법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저 머리를 자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미국을 가로지르는 <코스모폴리스>의 억만장자 에릭 패커는 이제까지 로버트 패틴슨이 맡아온 모든 캐릭터를 통틀어 가장 기괴한 인물임이 분명하다. 그림을 완전하게 소유하고 싶어서 그 그림이 걸려 있는 교회를 통째로 사려 하고,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며 보디가드에게 전기총을 쏴달라고 말하는 그는 도무지 다음 행동을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로버트 패틴슨은 꽤 만족스럽게 소화해낸다.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며 긴 호흡의 대사를 쏟아내고, 줄리엣 비노쉬, 마티외 아말릭, 폴 지아매티 같은 훌륭한 배우들과 장면을 공유해야 하는데도 이 배우의 집중력은 후반부까지 밀도있게 유지되는 것 같다. 로버트 패틴슨의 이러한 모습은 발견일까, 발전일까.

뱀파이어 그대, 해석을 버리고 직관을 좇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코스모폴리스>는 배우 로버트 패틴슨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인 동시에 크로넨버그라는 거장과의 만남을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간 패틴슨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영화다. 먼저 ‘발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패틴슨의 전작 <트와일라잇>과 <리틀 애쉬: 달리가 사랑한 그림>(이하 <리틀 애쉬>), <리멤버 미>를 본 뒤 <코스모폴리스>의 에릭 패커에 그가 적역임을 확신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세편의 영화에서 그가 어땠냐고? 좋은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유일하게 마음이 읽히지 않는 인간 소녀 벨라에 대한 뱀파이어 에드워드의 본능적인 끌림을 표현할 때(<트와일라잇>), 동성의 예술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살바도르 달리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보여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을 때(<리틀 애쉬>) 패틴슨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완전히 흡수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릭터에 대해 관객이 느끼는 거리감은 어쩌면 로버트 패틴슨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낯섦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크로넨버그는 간파한 듯하다. 창백한 피부와 상반되는 남성적인 이목구비, 상대 배우의 연기에 반응하거나 대사를 말할 때 느껴지는 어떤 머뭇거림. 패틴슨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공기를 낯설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배우다. 그의 이러한 개성은 뱀파이어를 연기해야 하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엔 긍정적으로 작용했겠지만, 정극 연기를 선보여야 하는 시대극 영화나 멜로영 화에선 극으로의 몰입을 방해하는 단점이 되기도 할 것이다. <코스모폴리스>에서 패틴슨의 낯섦은 확실한 장점이다. 자본주의와 돈에 대한 불길한 정조가 있을 뿐, 인물의 행동에 대한 명확한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그는 안성맞춤이다. 들쥐가 화폐의 역할을 하고, 인물 사이에는 해럴드 핀터의 부조리극을 연상케 하는 파편적인 대화만이 존재하는 <코스모폴리스>에서 로버트 패틴슨은 리얼리티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특유의 연기를 묵묵히 해나가면 될 뿐이다.

촬영에 임하는 순간마다 혹독하게 자기 검열을 하고, 역할을 맡을 때마다 그 인물에 도움이 되는 참고 자료에 열중해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유형의 배우인 로버트 패틴슨에게 “어떤 것도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는 크로넨버그의 연출론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대개 시나리오를 읽을 때에는 이 작품이 어떤 내용의 영화가 될지, 어디로 흘러갈지, 어떻게 끝날지 금세 알 수 있다. 플롯이 예상을 벗어나거나 정교하게 뒤틀려 있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코스모폴리스>는 정반대였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로버트 패틴슨은 <코스모폴리스>의 출연 제안을 심사숙고했던 일주일 동안 어떻게 크로넨버그에게 거절의 말을 건네야 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고 한다. “마침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그랬더니 감독님이 이렇게 말하더라. ‘나도 잘 몰라요.’ 우리의 협업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로버트 패틴슨은 에릭 패커를 연기하는 내내 크로넨버그가 직조해낸 <코스모폴리스>의 미로에서 “길을 잃은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그러한 심리를 유지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단 한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억만장자에서 빈털터리로 추락하는 남자, 에릭 패커의 심정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계산과 해석을 버리고 매 장면을 직감과 본능에 의존한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는 그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배우로서의 그의 행보가 <코스모폴리스>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 기대해볼 만큼.

한편 자신의 영화에 대해 완벽한 통제력과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의 작업은 <트와일라잇> 프랜차이즈와 병행한 출연작들의 부진으로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졌던 로버트 패틴슨에게도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트와일라잇>이 개봉한 뒤로부터 4년 동안, 나는 점점 더 작은 상자 안에 갇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상자를 부수고 나오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크로넨버그 이전의 누구도 로버트 패틴슨이 로맨스영화의 남자주인공 이상으로 소비될 수 있다는 걸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코스모폴리스>에 출연한 이래 그의 입지는 달라졌다. 그는 크로넨버그가 다시금 차기작 <맵스 투 더 스타스>를 함께하고 싶은 배우가 되었고, 미래 세계를 배경으로 한 웨스턴영화 <로버>, 사담 후세인을 뒤쫓는 조사관으로 분하는 <미션: 블랙리스트>에 출연을 확정지으며 배우로서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을 시험해보려 한다. 이제는 누구도 그의 가능성을 2년 전 그때처럼 섣불리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로버트 패틴슨은 <트와일라잇> 이후의 세계를 향해 조심스럽게 미지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중이다.

magic hour

<코스모폴리스> 죽음의 심연으로

“에릭 마이클 패커!!” <코스모폴리스>의 후반부, 어둠 속에서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영화 내내 무표정했던 에릭 패커의 얼굴엔 그제야 활기가 돈다. 마치 자신의 곁에 바짝 다가온 죽음과 숨바꼭질이라도 하겠다는 양, 에릭 패커로 분한 로버트 패틴슨은 영화를 본 관객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암호, “낸시 바비치”를 외치며 죽음을 향해 힘차게 돌진한다. 그 장면에서만큼은 패틴슨을 물리적인 육체를 가진 배우가 아니라 하나의 상징으로 보게 된다. 그건 에릭이 그토록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뿜어내는 죽음의 심연으로의 본능적인 이끌림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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