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스를 연기한 역대 수십명의 배우 중에 캐릭터보다 더 희한한 이름을 지닌 유일한 배우.” 2010년 <BBC> 시리즈 <셜록>이 방영됐을 때 처음 접한 베네딕트 컴버배치에 관한 묘사는 그랬다. 미확인 비행 물체처럼 대중의 시야에 진입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마이클 파스빈더와 더불어 대서양 양쪽에서 가장 주목받는 영국계 남자배우가 되었다. 규모로는 몰라도 열성으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팬덤도 거느리고 있다. 신작 <스타트렉 다크니스>에서 컴버배치는 J. J. 에이브럼스가 꼼꼼히 조립한 이 영화의 무게중심을 기우뚱하게 할 만큼의 카리스마를 발산하는데, 그 카리스마의 색깔은 셜록의 캐릭터와 통하는 바가 있다. 남은 2013년 공개될 예정인 컴버배치의 영화는 편수로나 화제성으로나 만만치 않다. <호빗: 스마우그의 페허>, 비틀스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으로 분하는 <더 맨 후>, 메릴 스트립과 공연한 <오거스트: 오세이지 카운티>, 파스빈더와 호흡을 맞춘 스티브 매퀸 감독의 <트웰브 이어스 어 슬레이브>, 줄리언 어산지 역의 <제5계급>이 줄을 서 있다. 오, 물론 가을에 전파를 탈 <셜록> 시즌3를 향한 기대도 시한폭탄처럼 달아오르는 중이다. 컴버배치의 쓰나미가 들이닥치기 직전 짧은 고요를 틈타 이 기묘한 스타의 매혹을 살펴보기로 한다.
2014 <모방 게임>(The Imitation Game) <호빗: 또 다른 시작>(The Hobbit: There and Back Again)
2013 <제5계급>(The Fifth Estate) <더 맨 후>(The Man Who)(Brian Epstein) <오거스트: 오세이지 카운티>(August: Osage County) <트웰브 이어스 어 슬레이브>(12 Years a Slave) <스타트렉 다크니스>(Star Trek Into Darkness)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The Hobbit: The Desolation of Smaug) <셜록>(Sherlock) 시즌3
2012 <호빗: 뜻밖의 여정>(The Hobbit: An Unexpected Journey) <셜록>(Sherlock) 시즌2 <퍼레이드의 끝>(Parade’s End)
2011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 <워 호스>(War Horse)
2010 <내부 고발자>(Whistleblower) <반 고흐: 언어로 그린 초상>(Van Gogh: Painted with Words) <셜록>(Sherlock)
2008 <천일의 스캔들>(The Other Boleyn Girl)
2006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스타터 포 텐>(Starter for 10)
2005 <세상 끝까지>(To the End of the Earth)
2004 <호킹>(Hawking)
2003 <40대>(Fortysomething)
지난 5월9일 <스타트렉 다크니스> 홍보를 위해 데이비드 레터먼의 <레이트 쇼>(Late Show)에 출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진행자로부터 당황스런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큰 영화 출연은 첫 경험인가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워 호스>의 배우로서는 순간 얼음이 될 만한 상황이었다. 스크린 이미지와 딴판으로 겸손하고 유쾌한 이 배우는 아무도 무안주지 않는 기지를 발휘했다. “예. 이 정도 메이저 영화는 처음이죠. <워 호스>도 꽤 큰 영화였지만 배역은 작았으니까요.” 반전은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짧은 자료화면이 나온 다음 일어났다. 컴버배치의 이름조차 가까스로 발음했던 레터먼은, 악당 존 해리슨(컴버배치)이 유리 감옥 너머에서 커크 함장을 압도하는 34초짜리 클립을 본 다음 넋을 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정신을 수습해 덧붙였다. “다른 배우를 깎아내리는 건 아니지만, 당신은 자신 말고 별로 필요한 게 없을 것 같군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에는 그처럼, 보는 사람을 다짜고짜 감전시키는 특수한 자질이 있다. 훌륭한 연기에는 툭툭 건드리는 연기도 있고 스며드는 연기도 있는데, 컴버배치의 필살기는 단칼에 관객의 심장을 찌르는 연기다. 퍼뜩 돌아보면 어느새 그의 칼날이 등 뒤로 튀어 나와 있는 것이다. 배역에 따라 다르지만 <호킹> <셜록> <스타트렉 다크니스>처럼 비범한 캐릭터를 연기할 경우 컴버배치의 주술은 대략 10분이면 통한다. <USA 투데이>는 <셜록>이 첫 방영된 2010년 7월25일 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저녁 8시59분까지 컴버배치는 실력은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배우였다. 9시20분경 그의 이름은 트위터를 타고 전세계에 퍼졌다.”
인간 이상 신 이하의 알파맨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존 해리슨은 필마단기로 9.11급 참사를 일으키는 23세기의 테러리스트다. 엔터프라이즈호 대원들에게 자진해서 체포된 그는, 밀폐된 유리방에 감금돼 있는데도 위협적이다. 커크(크리스 파인)를 나직이 부르는 “캡틴”이라는 호칭 하나에도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표면적으로 우위에 있는 커크 선장과 대원들을 오히려 쥐락펴락하는 이 신은 정확히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를 연상시킨다. 컴버배치의 존은 인간을 넘어서는 지성과 인간을 넘어서는 야만성을 한몸에 지닌 존재다. 신 이하 인간 이상이라는 정의는, <프로메테우스>에서 인류를 지구에 데려온 ‘엔지니어’를 생각나게 하지만, 존의 경우 인류가 만들어낸 우성 유전자의 집합체라는 점이 다르다.
슈퍼맨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보다는 월등한 힘을 지닌 존의 액션은 빠르고 우아하다. 이 우아함은 안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과시적 군더더기 없이 목표만 달성하는 정확성과 경제성에서 나온다. 공격하지 않을 때 척추를 90도로 세우고 미동없이 앉아 있는 존은 똬리를 틀고 먹잇감의 사이즈를 가늠하는 비단뱀처럼 보인다. 한편 엔터프라이즈호의 지성을 대표하는 스팍(재커리 퀸토)과 존이 항복 조건을 협상하는 장면은 2대의 슈퍼 컴퓨터가 교신하는 광경을 방불케 한다. 존의 카리스마를 완성하는 화룡점정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음색이다. 사운드 믹싱의 영향도 있겠지만 그의 음색은 한마디로 반역도 정당화한다. 셜록이 파가니니가 바이올린 켜듯 생각과 동시에 문장을 퍼붓는다면, 존은 머릿속에 타이핑해놓은 스크립트를 공연하듯 말을 뱉는다. 곰곰이 따지며 들어보면 존의 신념은 허점이 많고 유치하다. 그는 결코 심오한 사상으로 무장한 악당이 아니다. 그런데도 컴버배치의 연기는 우리를 잠깐 현혹한다. 심지어 한 대목에서는 “악당이 아닌가?” 하고 속기까지 한다. 곤란한 점은 덕분에 정의롭고 멋진 착한 편이 무려 떼지어 등장하는 영화인데도, 이제나저제나 존의 다음 등장을 고대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볼드모트를 표현하는 “사악하다. 하지만 위대하다”라는 대사는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존에게도 꼭 들어맞는다(말이 났으니 말인데,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볼드모트도 상당히 절묘한 캐스팅이었을 것이다). J. J. 에이브럼스 감독의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바늘 하나 꽂을 데 없이 치밀하게 빚어진 SF블록버스터다. 그러나 짐작건대 이 영화를 두번 이상 관람하는 관객이 있다면 그를 매혹한 마성의 원소는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존 해리슨일 가능성이 크다. 컴버배치는 적절한 역만 만나면 만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극중 세계를 벗어나 중독을 부르고 팬픽을 쓰게 하는 마력의 배우다. 그의 열렬한 팬들은 인생을 B.B.C와 A.B.C로 구분짓는다고 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알기 전’(Before Benedict Cumberbatch)과 ‘알고 난 뒤’(After Benedict Cumberbatch)라는 의미다.
이성과 광기의 총화
‘우월한 인간’이라는 존 해리슨의 속성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출세작 <셜록>의 셜록 홈스와 직결된다. <스타트렉 다크니스> 초반에 존이 피를 뽑고 시험관을 만지작거리는 장면부터 셜록의 일과를 상기시켜 팬들의 미소를 부른다. 마크 개티스와 스티븐 모팻이 창조한 컴버배치의 셜록은 일종의 소시오패스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 능력이 아예 없고 선악을 분별 못하는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관심사 밖의 사회적 규범에는 개의치 않는 인물이다. 그가 탐정 일을 하는 이유는 범죄로부터 시민의 생명과 이득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도로 지적인 인간으로서 느끼는 무한한 권태를 깨고 자신의 우월함을 수시로 확인하기 위해서다. 더 빠르고 아름답고 순수한 문제풀이로 가는 길에 발생하는 평범한 희생은 그의 심경을 흔들어놓지 못한다. 시즌1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인질의 목숨이 위험한데도 적과의 게임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시간을 쓰며 추리를 밀어붙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왓슨과의 관계가 이런 셜록의 무감동함에 어떤 변화를 부를지도 시즌3의 관전 포인트다. 변화가 있은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추리와 사건 해결에 유익하다는 논리적 판단에 근거할 공산이 크지만.
천재의 이미지는 업보처럼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어깨에 매달려 있다. 존 해리슨과 셜록 외에도 그는 스티븐 호킹, 반 고흐였고 라디오 드라마 <코펜하겐>에서는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연기했다. 제작 중인 <모방 게임>에서는 컴퓨터의 원형을 개발한 과학자 앨런 튜링 역을 맡았으며 <제5계급>에서는 천재는 아니지만 비범한 기인 줄리언 어산지로 변신한다. 이중 성공적이지 않은 경우는 반 고흐인데, 동생 테오에게 보낸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를 ‘재연’한 TV 다큐멘터리 <반 고흐: 언어로 그린 초상>(2010)에서 컴버배치는 고흐치고 너무 건장하고 냉철해 보인다. 탁하고 어지러운 기운이 부족하다. 컴버배치에게 어울리는 예술가를 굳이 고른다면 고흐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오직 격정에 휘둘리는 천재보다 미친 듯한 이성이 격정을 억압하고 있는 천재쪽이 컴버배치에게 맞는 옷이라서다. 연극으로 훈련되고 세련된 억양을 구사하는 배우로서 그는 <세상 끝까지> <퍼레이드의 끝> <어톤먼트> 등 TV와 영화의 시대극에서 상류층 신사를 호연했는데 이 역시 컴버배치의 귀족적 인상을 대중에게 굳혔다. 거듭되는 지적인 캐릭터 연기에 영국의 특권적 사립학교 해로를 졸업한 실제 학력이 덧씌워지면서 컴버배치는 “재수없는 왕자님”이라는 이미지에 한동안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우리 집은 평범한 중산층이었다고 몇번을 말해요!”라고 인터뷰에서 허탈해할 만큼.
무성애자의 관능, 섹시한 뇌 주름
화들짝 놀란 일어선 미어캣, 망치 상어, 수달, <아이스 에이지>의 시드(나무늘보)….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닮은꼴로 거론되는 동물 목록이다(나한테 고르라면 셜록과 존의 하숙방에 걸려 있는 소의 두개골을 꼽겠다). 컴버배치의 외모를 묘사하는 영어권 필자들의 글에는 생경한 단어들이 무더기로 등장한다. 아무리 좋게 읽어도 전형적인 미남의 용모파기와는 거리가 멀다. <어톤먼트>에서 파렴치한으로 나온 컴버배치를 보고 <셜록>에 캐스팅한 스티븐 모팻은 “베네딕트는 평범한 사람을 연기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팻의 예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로맨틱코미디의 핀업 스타가 된 컴버배치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팬들은 컴버배치의 외모 칭송에 침이 마른다. 정확히 말해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미남이 아니라, 옆에 있는 미남을 지루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이상한 얼굴을 가졌다. 헤어스타일리스트를 애먹일 게 분명한 두상에 피부는 백랍이고 초록눈은 동공이 작아 늘 눈부셔 하는 듯 보인다. 때때로 라인을 그렸나 착각이 드는 입술은 남자치고 드문 큐피드 활 모양인데 본인에 따르면 어려서 트럼펫을 배운 결과라고 한다. 조명과 머리카락 색깔의 변화에 따라 그는 극히 무던해 보이는가 하면, 숭고한 조각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한 장면에서 컴버배치는 전자음악 듀오 다프트 펑크가 쓸 법한 네온 헬멧을 쓰는데, 이런 물건을 머리에 쓰고도 우스꽝스러워 보이지 않는 배우는 <엑스맨> 시리즈의 마이클 파스빈더와 이안 매켈런 정도일 것이다.
초인적인 혹은 비인간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극중 캐릭터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은 성적 취향의 모호함 혹은 유동성이다. 그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차기작 <모방 게임>에서 게이 인물을 연기한다. 남학교를 다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컴버배치의 생애 첫 배역은 셰익스피어극 <한여름밤의 꿈>의 요정 여왕 티타니아였고 이후로도 꽤 많은 여성 배역을 맡았다고 한다. <셜록>의 셜록과 존은 <프렌즈>의 조이와 챈들러,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와 샘을 계승하는 브로맨스(bromance, 남성 사이의 우정 이상 성애 미만의 관계)의 아이콘이 된 지 오래다. <셜록>의 제작자 스티븐 모팻과 마크 개티스는 이 사태를 맞이해 첫 시즌이 끝날 무렵 “아직 셜록의 성정체성을 확실히 생각 못해봤다”고 밝힌 바 있다. 게이냐 스트레이트냐를 떠나 일단 컴버배치의 셜록 홈스는 섹스에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생각거리가 많고 바쁜 무성애자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의 프로모션 투어를 맞이하는 공항의 여성팬들은 비틀스라도 본 듯 자지러지고 <더 선>은 독자 투표를 통해 2년째 컴버배치를 영국에서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선정했다. 컴버배치의 인기는 “똑똑함이 새로운 섹시함이다.”(Brainy is new sexy)라는 슬로건의 증거인 셈이다.
인터뷰를 통해 보는 자연인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고고하고 도도한 극중 페르소나와 무관해 보인다. 배우로 형성된 과정에도 특출한 ‘설화’가 없다. 그저 ADHD 증후군이 의심될 만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선생님과 친구, TV속 인물을 감쪽같이 흉내내는 소년이었다는 회고가 있을 뿐이다. 생각할 때 방 안을 뱅뱅 돌아다니는 버릇 정도가 셜록과의 공통점이다. 성대모사 장기는 지금도 여전해서 그를 만난 모든 인터뷰어가 ‘인간 복사기’ 컴버배치를 묘사하는 데에 한두줄을 할애한다. 연기를 준비하는 과정도 상식적이고 착실하다. <호빗>의 용을 연기하기 위해 런던 동물원 파충류 관의 코모도 도마뱀과 눈싸움을 하고 정치인 역을 위해 의회를 견학한다. 한편 컴버배치는 여전히 수줍은 팬으로서 동료 배우들을 대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존 허트,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등과 공연한 컴버배치는 콜시트를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를 가장 기쁘게 만드는 찬사도 동업자들의 인정이다.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레드 카펫에서 공연 배우들의 칭찬을 들은 그는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고 한다. 그런데 이 원만한 노력파 배우가 카메라 앞에 서면 섬광을 낸다. 컴버배치의 연기는 정확하되, 힘을 가하지 않아도 칼날 자체의 무게로 살을 절개하는 메스처럼 수월해 보인다. 뭐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남자가 있을까? 사실 이 갭이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저력이다. 작품 선택에서나, 스크린 안에서 그는 다음 순간 어떤 행동을 취할지 넘겨짚기 어려운 배우다. 한번 이 배우와 눈이 맞으면 시선을 떼기 힘든 이유다.
<호킹>이라는 발견
<BBC> TV영화 <호킹>(2004)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천재형 이미지와 주도면밀한 연기를 한꺼번에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다. 스물한살 생일을 맞은 우주물리학도 스티븐 호킹은 여자친구와 별을 보려고 정원에 누웠다가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앞으로 발견할 우주의 비밀 앞에 의욕으로 설레던 청년은, 호흡근육을 제외한 근육을 움직이는 신경이 죽어갈 것이나 뇌에는 이상이 없으리라는 통보를 받는다. 아주 천천히 익사하는 과정과 유사한 미래를 앞에 두고 그는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공부와 사랑을 계속한다. 팔다리를 짐처럼 옮겨 내려놓는 힘겨운 움직임 속에서도 변함없이 형형한 눈은 그의 생동하는 정신을 보여준다. 연극 <햄릿>을 관람하다 “호두알에 갇혀 있어도 무한을 지배하는 왕일 수 있다네”라는 대사에 반응하는 표정이 감동적이다. 컴버배치는 혼자서 고뇌를 삼키는 의지와 학문적 발견 앞에서 아이처럼 터져나오는 환희를 과부족 없는 간결한 연기로 표현한다. 배우의 팬에게도 필견의 작품이지만 과학이 어떻게 시가 되고 나아가 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안이 될 수 있는지 아름답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컴버배치씨에 관한 희한한 일화들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양친은 모두 배우다. 연기자라는 직업의 고달픔을 평생 절감한 양친은 무리를 무릅쓰고 외동아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켰다. 컴버배치의 미래는 변호사로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연간 학비가 3만2천파운드나 드는 해로스쿨을 졸업한 컴버배치는 연극에 빠져버렸다. 그의 아버지는 컴버배치의 <글렌게리 글렌 로스> 공연을 관람한 뒤 “넌 나보다 훨씬 훌륭한 배우가 될 거다”라며 아들의 선택을 축복했다.
→해로스쿨 졸업 뒤 컴버배치는 6개월간 향수 가게 아르바이트로 여비를 마련해 인도(일설에 의하면 티베트)의 사원에서 승려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승려들로부터 인간성의 양면과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인 유머감각을 배웠다고 한다.
→컴버배치는 흡연자다. <호킹>을 준비하며 스티븐 호킹 박사를 방문했을 때 석학이 그의 정원에서 담배를 피우도록 허락해준 일을 따뜻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2005년 아프리카에서 TV드라마 <세상 끝까지>를 촬영하던 컴버배치는 모잠비크 국경에서 자동차 강도의 습격을 받아 트렁크에 인질로 갇혔다가 풀려났다. 라디오헤드의 음악에 취해 있던 중 돌연 타이어가 터지던 순간을 잊지 못하는 컴버배치는 이후로 행복한 기분이 차오를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폭음을 기다린다고 한다.
→컴버배치는 <셜록>의 길고 곱슬곱슬한 헤어스타일이 여자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싫어한다.
→컴버배치는 <셜록>의 대사 외우기를 힘들어한다.
→2011년 컴버배치는 대니 보일이 연출한 연극 <프랑켄슈타인>에서 조니 리 밀러와 함께 프랑켄슈타인 박사와 그의 피조물을 번갈아 연기했다. 공교롭게도 조니 리 밀러는 미국판 <셜록>인 <엘리멘트리>에서 주연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