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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시간여행
김혜리 2013-06-14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 로스가 5월19일 서울 올림픽경기장에서 콘서트를 가졌다. 시규어 로스의 실황은 스튜디오 앨범과 거의 차이가 없지만, 무대 연출과 영상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로서의 독보적 호소력은 현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천의무봉한 음악과,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을 인공조명으로 모방한 무대는 ‘제2의 자연’을 조성했다. 음악을 ‘반주’하는 영상이 내내 영사된 가로가 긴 띠 모양의 스크린은, 영화의 사운드트랙과 대구를 이루는 음악의 ‘이미지트랙’이라고 부를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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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모처럼 공책에 샤프펜슬로 글씨를 쓰기로 마음먹고 나니 책받침이 아쉬워졌다. 사무용품 위주로 물건을 갖춰 놓은 ‘문구센터’ 몇곳을 가보았지만 실패였다. 그래, 문구센터라서 없는 거야. 책받침 하면 문방구지. 집 근처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어 어렵지 않게 찾겠거니 교문 주변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편의점뿐이었다.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생활과 멀어진 지 오래인 나는 미궁에 빠졌다. 요즘 학생들은 연필로 필기를 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교내 매점이 문방구를 흡수한 걸까? 결국 친구의 초등학생 아들이 베푼 선처로 ‘알파벳 익히기’ 책받침 한장을 얻어 내 필요는 해결됐다. 하지만 이 사소한 체험을 계기로, 나는 요즘의 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판단하는 일에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물론 TV드라마로 간접 체험은 가능하지만, 작품마다 톤이 천차만별이라 어디까지가 보편적인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극적인 장치인지 확신할 수 없다. 예컨대 드라마 <공부의 신>과 <학교 2013>만 해도 사뭇 이질적인 학교사회를 그려 보인다. 교실의 공기라든가, 학생과 교사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나의 직접적 경험을 투사해 쓸 수 있었던 한국영화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가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른다.

<미나문방구>를 보면서도 한참 헤맸다. 불량식품을 팔고 오락기를 비치한 교문 앞 문방구는 확실히 1970년대에 태어난 내 세대에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도시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나는 문방구에서 영화가 묘사한 만물상의 황홀함을 맛보진 못했다. 즉, <미나문방구>가 공들여 부각시키는 공간은 내가 직접 경험했다기보다 동화책과 드라마를 통해 인식한 문방구다. 그래서일까? 나는 은연중에 <미나문방구>가 과거와 대과거 시제로 구성된 영화라고 가정해버렸다. 극중 현재 시점이 적어도 90년대 내지 2000년대 초라고 착각한 것이다. 그러다가 극중 인물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라 시대감각을 바로잡느라 허둥거렸다. 이 착각에는 대도시와 소도시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는 문화적 시차도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 지방에 여행을 갔을 때 종종 공간뿐 아니라 시간을 이동한 기분이 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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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사진엽서, 뽑기, 종이인형 등 전 세대에서 기원한 소품들을 하나씩 어루만지고 부각시키는 <미나문방구>의 화면은 산란광으로 아련하고, 향수에 젖어 촉촉하다. 때로는 연출의 감격이 극중 인물인 미나(최강희)와 강호(봉태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이야기 안에서 느끼는 감흥을 앞지르는데, 이런 대목에서 배우들은 (앞 세대에 뿌리를 둔) 감독의 정서를 대리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나문방구>는 관객에게 기대하는 정서적 반응이 명확한 영화다. 문제는, 영화의 기대가 관객에게도 명백히 보인다는 점이다. 목표를 지나치게 확신하다보니 부자연스럽게 또박또박한 대사가 나오고 무리한 성격과 행동이 인물에게 주어진다. 왕따 소녀는 친구들 앞에 서기만 기다렸다는 듯이 모범적인 독백을 하고, 여주인공이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하이힐을 신는 이유는 나중에 벗고 달리는 장면의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서다. 역설적이게도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초조함과 미안스러움이었다. 눈물과 웃음을 겨냥한 설계와 배려가 노골적으로 보이는데도 제때 웃거나 울지 못하니 호의를 배반한 손님이 된 듯했고 내 심성이 탁해졌나 의심스러웠다. 결국 나는 영화를 즐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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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J. 에이브럼스 감독은, <스타트렉> 영화의 신규 사이클에 시동을 건 2009년 <스타트렉: 더 비기닝>에서 시간여행의 모티브를 끌어들였다. 커크(크리스 파인)와 스팍(재커리 퀸토)의 젊은 날로 날아가, 이미 일어난 사건을 다시 쓸 수 있는 대안우주가 열린 것이다. 다분히 TV시리즈 <로스트>를 연상시키는 이 선택에는 각본에 참여한 데이먼 린델로프(<로스트>의 공동 크리에이터)의 취향도 작용했으리라. <스타트렉 다크니스>까지 보고 나니 시간여행 설정이 시리즈에 가져다준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장영화의 속성이 아닌가 싶다. 행동주의자 커크와 이성의 화신 스팍은 <스타트렉 다크니스>에 이르러 부쩍 빨라진 속도로 서로의 미덕을 인정하고 흡수한다. 솔직히 말하면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변증법적 발전이 너무 성급해, 구경꾼 입장에서 다소 염려스러울 지경이다. 아직 갈 길이 먼데 스팍이 벌써 감정을 분출해버리면 남은 속편에서는 할 일이 뭐가 남는단 말인가. 이야기의 양대 기둥을 이루는 캐릭터의 중심이 무너지면 긴장은 무슨 수로 유지하지? 말이 쉽지 감정의 추론과 논리의 폭발이 이 영화에서처럼 간단히 한점으로 수렴한다면, 애초에 우주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을까, 기타 등등.

성장영화는 어찌 됐건 앞으로 나아가는 서사다. 한데 오리지널 <스타트렉> TV시리즈는 어렴풋한 기억만 되살려봐도 직진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매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이야기였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절대악을 찾아 제거하려고 추격하는 전함이 아니라, 바깥 세계의 미지 생명체와 문명을 두루 탐사하는 함선이다. <스타트렉>의 문제 해결 과정에서는 무력보다 외교가 중요하다(이 전제는, 적성국에 침투해 테러 용의자를 제거 혹은 체포하라는 군사작전 성격의 임무가 하달되자 스팍이 반발하는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한 장면에서도 확인된다). J. J. 에이브럼스가 만든 <스타트렉: 더 비기닝>과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아무래도 오리지널 <스타트렉>보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유전자를 많이 받은 영화처럼 보인다. 이는 두 영화가 기본적으로 액션에 방점을 둔- 아나킨과 루크 스카이워커 스타일의 곡예비행이 포함된- 전쟁영화라서이기도 하지만, 남자주인공들의 성장과 변모에 초점을 두는 영화라는 점도 간과할 수는 없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상속 재산이자 여타 SF 블록버스터와 차별되는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재미는, 엔터프라이즈호와 스타 플릿 내부의 조직 메커니즘과 ‘직장 내 갈등’ 묘사다. 아무리 커크가 궁극적 영웅이라 해도 <스타트렉>은 팀워크의 드라마다. <스타트렉 다크니스>에서 대원들은 각기 특기와 핸디캡에 따라 한번쯤 위기와 성취를 경험하며 관객에게 눈도장을 찍는다. 말이 함장이지 최전선에 걸핏하면 뛰어드는 커크의 설레발 탓에 돌아가며 지휘관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이 엔터프라이즈호 대원들의 팔자이기도 하다. 대원들이 상급자와 주고받는 대화는, 서열에 입각한 공식적인 문답과 정든 동지로서의 사담으로 한숏 안에서도 나뉜다. 액션, 특수효과와 무관한 이른바 깨알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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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 “이제 우리도 좀 쉬자”고 할리우드에 공문을 보낸 걸까? 아니면 “고통을 좀 분담하자”고 런던에 호소했나? 올 들어 할리우드 액션 블록버스터가 부쩍 런던을 두들겨 부수고 있다. <지.아이.조2>가 핵무기로 런던을 날려버리더니 <스타트렉 다크니스>도 런던 도심에서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은 숱한 인명과 기물을 깔아뭉개는 카 체이스를 런던에서 벌였고 <토르: 다크 월드>도 템스강 공습을 예고하고 있다. 올림픽을 통해 마천루와 빅벤이 공존하는 런던 스카이라인이 세계 관객의 눈에 익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 영화 <셜록 홈즈>와 <닥터 후> 덕분에 런던 역시 파괴해도 괜찮은 도시로 이미지를 바꿨다는 의견도 있다. 사실 가장 확률이 높은 답은 싱겁다. 런던 영상위원회(로케이션 촬영을 주선하는 기관)가 부지런히 일하고 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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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미드나잇>의 매직 아워

단 하루를 배경으로 삼은 영화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에는 공히, 만물이 가장 아름답고 애틋해 보이는 해질녘 매직 아워 장면이 등장한다. 이들은, 9년 터울의 세 영화가 셀린느와 제시의 삶에서 차지하는 ‘시각’(時刻)에 따라 다른 정서를 낳는다. <비포 미드나잇>은 이 커플의 인생에서 오후 3시쯤일까? 셀린느는 수평선을 건드리는 석양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아직 있다, 아직 있다,… 사라져버렸네.”(Still there… gone) 슬프지만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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