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 생명이 참 짧은 것 같아요. 여배우가 부족하다고 그러는데, 그게 사람들이 여배우를 오래 간직하려는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애. 늘 새로운 사람을 찾으려고 그러니까요. 제가 신상옥 감독한테 한번 프로포즈한 게 있죠. 그때 오디션으로 심청이를 뽑는다고 했어요, 16살, 14살을. 신상옥 감독한테 그렇게 얘기했지. 그렇게 할 필요 있나, 지금 만든 여배우를 심청이로 만들면 되는 거지, 얼마 있다가 “같이 하자” 그러더라구요. 그렇게 <효녀 청이>(1972)를 시작하게 됐는데 청이가 우리 남편을 만나게 했어요.
<효녀 청이>가 뮌헨올림픽에 나가게 됐어요. 신상옥 감독하고 저하고 많은 문화예술인하고 독일로 갔어요. 그 당시 독일에서 독일어로, 오페라 <심청>을 윤이상씨가 했어요. 그걸 보러 가는데 계단에서 그냥 어떤 한국 남자를 만났어. 같이 들어갔는데 우리 자리를 찾다 보니까 비슷한 자리더라고. 윤이상 선생님이 소개를 해주는데 백건우라고. 만난 뒤로 계속 만나게 되는 거야. 밥도 윤이상 선생님하고 신상옥 감독하고 같이 먹고 그러니까, 그때 당시는 유학생들이 귀했잖아요. 특히 독일 유학생이. 나중에 유학생들하고 맥주 마시러 갔는데… 장미꽃을 나한테 주더라고. 심청이가 우리를 만나게 했지. 그리고 저는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신상옥 감독하고 <이별>을 하기로 했어요. 뮌헨올림픽 끝나고 파리로 <이별>을 헌팅을 가기까지 했는데, 순간적인 판단으로 어학에 전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별>은 안 하길 너무 잘한 것 같애. 그 역할을 김지미씨가 했는데, 그때 신상옥 감독이 극중 다른 여배우와 열렬히 연애하는 중이었어요. 김지미씨한테는 카메라가 썩 좋게 오진 않았죠. 속으로 내가 안 하길 너무 잘했다, 그랬어요. 내 생활이 너무 그리워
유학 가는 건 오랫동안 준비를 했어요. 72년부터 불어를 배웠어요. 그러고 74년 5월에 갔으니까 갑작스러운 건 아니죠. 저는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한국일보 기자 어떤 분이 저를 싫어해요. <청춘극장> 배우로 뽑히고 나서 이 기자 신인배우인 저를 인터뷰하러 오셨어요. 제 데뷔작 <청춘극장> 상금이 50만원인데 이걸로 뭐할 거냐고 묻길래, 제가 50만원 가지고 뭐할 건지 당신이 왜 물어보냐고 관심이 있느냐 그랬어요. 그리고 5년만 하고 미국 간다고 그랬어요. 그때는 미국을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열심히 했지만 내 개인 생활이 너무 그리웠던 사람이에요. 집 밖에도 제대로 못 나갔어요. 그러니 무슨 생활이 있겠어요.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지금 god가 그렇지만, 여학생하고 남자들 때문에 밖을 못 나갔어요. 혈서 써서 보내고, 어떤 남자는 집 앞에 내내 있고, 자동차 앞에 있다가 고함지르며 따라오고, 압사당할 뻔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이 아름다운데, 그때 당시는 빨리 갔으면 했어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느날 군인 대위한테 전화가 왔어요. 동료가 월남전쟁에서 죽었는데 포켓에 제 사진밖에 없다고 그래요. 그래서 촬영을 펑크를 내고 국립묘지로 간 적이 있었어요. 얼마 전에는 택시를 타고 예술의 전당에 가는데, 기사 아저씨가 옛날에 나한테서 답장을 받았대요. 월남전쟁 때는 팬레터들이 가마니로 왔어요. 그래서 몇장에 답장을 보내는데 그걸 받았다는 거예요. 또,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우리집에 중앙정보부가 온 거야. 지금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에서 온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영화배우 중에서 영어를 좀 하고 대화를 통할 사람을 찾아보니까 나라, 이거예요. 그때 제가 전 기생 아니에요, 전 영화배우예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저는 안 갑니다, 그랬다구요. 우리 엄마는 정보부니까 걱정이 되었었는데 저는 안 무섭더라구요. 그뒤로 그분이 오히려 제 팬이 되었어요. 명절 때 사과박스 보내고.
파리로 유학갈 때 제가 직접 발표했어요. 청룡상에서 주연상을 탔을 때일거야. 파리 유학 갑니다,라고 수상소감을 얘기하면서 발표했어요. 유학 생활 시작하기 전에 잠깐 파리에 머물렀어요. 그때 베리만 영화를 열심히 봤거든요. 생 미쉘 뒷골목 예술영화관에 다녔죠. 그 부근 레스토랑을 갔는데 다시 남편을 우연히 만났어요. 2년 만에 다시 만난 거죠. 그뒤 파리로 유학 오고 76년 결혼을 했죠.
유학 시절, 내가 왜 이걸 하지 한숨
결혼하기 전에는 연극학교를 다녔어요. 나는 연극이 아니니까 청강생으로 있다가 파리 8대학을 다녔어요. 제가 한국에서 너무나 엉터리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대학부터 다녔어요. 만약에 학위가 중요하다면, 박사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파리 8대학이 저에게 잘 안 맞아요. 들어가기가 쉬운데, 3대학이 좋더라구요. 대학 다니면서도 영화촬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대학을 8년 이상을 다녔죠. 파리 간 다음부터 영화촬영하는 게 그렇게 귀할 수가 없고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고, 한 커트 한 커트가 정말로 소중하더라구요.
프로포즈가 꽤 많이 왔고 좋은 것들은 꽤 많이 했어요. <위기의 여자>(1987), <만무방>(1994) 등을 찍었죠. <위기의 여자> 때는 신성일씨가 얼마나 방해하든지…. 난 음악만 들어도 눈물을 잘 흘리는데, 카메라 앞에서는 그렇게 눈물이 안 나와요. 안성기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던데, 그게 연기를 못한다는 얘긴가.(웃음) 담배연기를 뿜으면 눈이 빨갛게 된다고 해서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데 신성일씨가 앞에서 농담하고 우스갯소리하고 그랬어요. 클로즈업이니까 신성일씨는 안 나왔거든. <위기의 여자> 때 동시녹음을 했죠. 예전에는 모두 후시였잖아요. 그때 신성일씨가 경상도 발음이 세잖아요. 그때 꼭 자기가 녹음을 하겠다, 그래요. 뒤에서는 다른 사람이 했으면 하는데. 그런데 하고 나니까 너무 좋아요. 본인이 하니깐 정말 좋아요. 성격을 잘 살려냈더라구요.
제 성격이 한번 시작하면 중단을 못해요. 끝을 맺어야지. 대학까지 마치고 석사과정에 갔는데 교수가 그러더라고, 한국영화에 대해서 연구가 전혀 없으니까 그걸 해보라고 그러더라고요. <물레야 물레야>를 두고 한국영화사에 비친 한국 여인상들, 여성의 조건, 그런 걸 했어요. 너무 힘들었어요. 내가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내가 왜 이걸 시작했지 하고 한숨을 쉬었죠. 학위 발표 나는 날, 온 가족이 긴장을 했어요. 그 긴장은 말할 수가 없죠. 아무리 불어를 잘해도 어려울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교수들이 몇명 앉아서 물어보는데 그 긴장이란. 논문 발표하고 전화를 했죠, “됐다” 하고. 지하철역에 도착했더니 아버지가 꽃을 사들고 계시더라구요. 남편은 샴페인 준비하고.
지하철 타고 다닐 때마다 한숨을 쉬면서 왜 이렇게 악착같이 공부를 하려고 했는가, 회의도 많이 들었죠. 그런데 난 뭔가가 새로운 걸 하고 싶고, 영화공부를 하는 사람들 세계에 내 몸을 담그고 싶더라고. 쟁쟁한 교수들과 같이 얘기하고 같이 호흡한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에요. 그게 영화촬영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되지만 심사하는 데는 도움이 돼요. 청룡영화제는 내리 7년째 심사위원을 하고 있고, 몬트리올영화제나, 작년 부산영화제에서도 심사위원을 했죠. 공부를 했다고 해서 연기를 잘하는 게 아니거든요. 너무 분석해도 안 되는 거죠. 분석과 함께 감정이 동시에 나가야지. <공공의 적>에서 두 배우의 역이 그렇다는데, 한명은 이성적이고 한명은 감성적이라죠? 연기를 하는 데는 둘 다 있어야 될 것 같아요.
지금, 영화만 바라보지 않아서 천만다행
옛날에는 사람들이 배우를 정말 좋아했어요. 지금은 배우가 돈하고 연결된 경우가 참 많더라구요. 개런티 얼마 받느냐로 출연을 결정하죠. 옛날엔 사람들은 화면을 통해서 자기들이 상상했던 꿈을 이루어주는 인물로서 배우들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배우들은 자기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참 노력을 많이 했죠. 배우들이 자존심을 갖고 있었거든요. 어떤 유혹이 와도 CF 같은 걸 안 했거든요. 지금은 인기의 척도가 되어버렸잖아요. 파리 가기 전에 저는 한번 제약사 CF를 했는데, 그것도 제가 원한 게 아니라 중간에서 해서 어쩔 수 없이 했던 적은 있죠. 제의도 많았고, 다른 돈 벌 기회가 많았죠. 이름을 빌려달라 이런 것도 있고 그런데 자존심을 지켰어요. 프랑스 영화배우들이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배우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생활을 해요.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대중적으로 나타나 있는 사람인데 될 수 있으면 본보기 이상의 생활을 해야 해요.
외국에서 인터뷰할 때는 300편이라는 말을 감히 못해요. 외국영화제에 가서도 그런 말을 못했는데, 몬트리올영화제는 그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더라구요. 몬트리올영화제를 두번 갔어요. <만무방>으로 노미네이트되었을 때 가고 한번은 심사위원으로 갔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하면서도 아직까지도 연기생활을 하는 게 대단하다며, 참 부러워하더라구요.
작년 청룡영화제 때 후보작 21편을 보고 놀란 게 50대가 나온 영화가 거의 없어요. <고양이를 부탁해>는 할머니가 나오지만 전부 다 20대 애들 영화에요. 가족이 사라졌어요. 아버지가 사라졌고 어머니도 사라졌죠. 영화를 하기를 원하고 하기를 바라지만, 그것만 바라보는 생활이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이죠. 남편 덕분에 같이 바쁘잖아요. 그러기에 웃을 수가 있지. 영화 하고 싶은데 어떻게 나를 개스팅 안하나 하고 조바심 내고 살았으면 불행했을 거예요. 대담 안정숙/ 전 <씨네21> 편집장·구술 정리 구둘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