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가 열리는 9일 동안 전주 곳곳에 카메라를 든 로랑 캉테 감독이 출몰했다. 개막작 <폭스파이어>와 한국경쟁섹션의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로랑 캉테 감독은 올해 전주영화제의 얼굴이다. “특별한 기준을 두지 않고 관객의 한 사람으로 마음을 열어두고 영화를 보고 싶다”는 그는, 감독, 심사위원 역할에 이어 충실한 관객의 역할까지 자처했다. 차기작 시나리오 작업을 마치고 막 전주에 도착한 로랑 캉테 감독을 만나 신작 <폭스파이어>에 대해 들었다. 소녀들의 성장담 속에 폭력과 차별의 시대를 점철시킨 <폭스파이어>는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냉혹함을 스케치한다. <시간의 사용자들> <클래스> 등 그의 작품에서 익히 보았던 현대의 파리가 아닌 1950년대 미국으로 배경을 옮겨갔지만, 사회의 모순을 향한 로랑 캉테 감독의 예리한 질문은 그대로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남쪽을 향해> 이후 원작이 있는 작품을 고집한다. =우연인 것 같다. <남쪽을 향해>는 한 작가의 여러 이야기를 가지고 이미지를 덧붙인 경우라 각색이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 해석에 가깝다. <클래스>는 원작을 읽기 전에 고등학생들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는데, 그사이 원작자 프랑수아 베고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나리오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서 다듬는 과정이었다. 이번 경우는 앞선 두편보다 훨씬 고전적인 의미의 각색 작업이었다. 500페이지나 되는 원작을 어떻게 압축적으로 보여줄까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아예 시대와 배경을 현재의 프랑스로 선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실 나도 그 부분에 대해 고민을 좀 했다. 그게 내가 작업하는 데도 수월하다. 그런데 원작이 주는 강렬한 무엇이 있어서 쉽게 바꿀 수가 없더라. 사회의 약자로서 여성, 사춘기 정체성의 문제, 정치, 사회적 저항 등은 50년대가 아니라 현재에도 지속되는 문제들이다. 시대극으로 만들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시간을 알 수 없는, 정해지지 않은 분위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50년대와 현대를 잇는, 일종의 다리 같은 영화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작 속 배경인 50년대에 크게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고전적인 대사보다 현대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도 그래서다.
-<클래스>와 같은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가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다면 시대극은 형식적인 규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색다른 작업이었을 것 같다. =일단 전작보다 제작비 규모가 커졌다. 다행히 운 좋게도 제작사들이 많은 자유를 주었고, 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유명 배우를 쓰라는 압력이나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을 빼라는 등의 제약이 없었다. 아무래도 칸 황금종려상(<클래스>)을 받은 데 대한 성과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중요했던 건 이번 작품이 <클래스>를 찍은 방식과는 다른 영화적 방식에 대한 실험으로서의 의미가 컸다. 시대극이 가진 엄격한 규칙 안에서도 전작에서 가졌던 자유, 배우들과의 관계, 자연스런 촬영방식 등과의 접목을 시도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인상적이다. 전작에서처럼 비전문 배우를 활용한 건가. =캐스팅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화를 찍어본 적이 없는 소녀들과 함께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거쳤다. 캐스팅에 6개월이 걸렸는데, 인터넷이나 토론토의 고등학교, 소규모 연극 공연장 등에서(오디션을 거쳐) 선발했다.
-정형화된 시대극인 만큼 비전문 배우와의 작업이 모험적인 선택이었을 것 같다. =나한테도 일종의 내기이자 도박이었다. 그들에게서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 <클래스> 때와 비슷했다. 배우들이 즉흥 연기를 통해 자기의 언어를 쓰게 하고, 그 언어를 대사에 반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숏을 나눠서 찍지 않고 시간순대로 작업했다.
-비주얼적인 면에서 50년대를 재현하는 데 원칙이 있었다면. =최대한 사실적으로 하려고 노력했다. 미술팀한테는 무척 까다로운 작업이었는데, 배우들의 자연스러움을 포착하기 위해서 카메라 두대로 찍다보니 360도 전체를 50년대 배경으로 바꿔야 했다. 그래서 너무 세세한 곳까지 50년대 분위기를 고집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1950년대 영화와 이미지 중 특별히 원천으로 삼은 게 있나. =영화는 코니아일랜드로 도망치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작은 도망자>(1953)에서 영감을 얻었다. 다양한 영화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미술감독에게 제안한 건 당시 사진들이었다. 특히 50년대에 활동한 사진작가 브루스 데이비슨의 작업이 도움이 됐다. 그가 근 1년 동안 브루클린의 십대 갱들을 따라다니면서 찍은 사진 이미지를 많이 참고했다.
-할리우드 시대극에 재현된 것과 달리 1950년대 미국에서 당신이 포착한 것은 어떤 지점인가. =미국인들은 50년대를 신화화하거나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50년대는 매카시즘 열풍이 불어닥쳤던, 흑백 인종차별이 존재했던 암울한 시기이기도 하다. 낙관주의에 반대해 가난과 빈곤, 차별 등의 문제를 겪는 소녀를 통해 그런 신화를 깨뜨리고 싶었다. 할리우드영화에서 보이는 거대한 아메리칸드림을 거부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싶었다. 미국인들이 시대극을 찍는 데 대한 저항, 반항과 같은 의미에서 말이다.
-소녀들은 남성 중심 사회에 반기를 들고 집단생활을 하지만, 그곳도 그들이 생각한 유토피아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전작을 통해 결국 내가 보여주려고 한 것이 유토피아다. 그건 현실의 힘과 관계에 의해서 존재하는 유토피아다. 결국 무너지고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소녀들은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결국 살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는다. 난 항상 열린 결말을 시도해왔고, 소녀들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차기작을 작업 중인데, 어떤 작품인가. 이번에도 배경이 프랑스 바깥인가. =그것도 우연인 것 같다. (웃음) 이번에는 쿠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아바나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바나에서의 7일>을 찍을 때 인연이 되었던 쿠바 소설가와 각색 작업을 거의 마쳤고, 캐스팅도 다 끝났다. 관습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 내 영화를 통해 계속 그 작업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