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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그래도 살아야 한다

10살 어린이 유괴사건을 소재로 한 셰리 호만 감독의 <3096일>

<3096일>

첫 장면이 아이러니하다. 관객과 주인공 앞에 펼쳐진 새하얀 눈 비탈길.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앞으로 5평 남짓한 지하방에서 주인공이 견뎌야 할 감금과 학대장면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공중화장실에 들어간 소녀는 누군가에게 간절히 도움을 청한다. 그러다 갑작스런 플래시백. 영화는 열살 소녀 나타샤의 납치 하루 전으로 돌아가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적인 시선으로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기록한다. 영화의 제목은 <3096일>. 나타샤가 감금되어 있던 시간이다.

지난 2월 말 독일에서 개봉한 <3096일>은 8년 전에 실종되었던 소녀가 갑자기 나타나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오스트리아의 어린이 유괴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1998년 3월 오스트리아 빈, 등교하던 10살 초등학생 나타샤가 흰색 밴에 탄 괴한에게 납치당한다. 범인 프로클로필은 그녀를 지하 감방에 가둬놓고 자신의 노예로 삼았다.

영화는 감정을 배제하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나타샤의 안쓰러운 생존전략들을 담담히 보여준다. 그녀는 홀로 남겨진 외로운 시간 동안 책을 보고 배우고 익히고, 자신의 옷을 의자에 입혀 학교 놀이를 하는 등 무력하게만 있지 않는다. 영화는 나타샤가 감금된 동안의 시간적 공간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나타샤를 납치하고 가두고 학대한 프로클로필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약간의 심증은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수시로 그를 방문하고 간섭한다. 프로클로필은 어머니, 할머니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같지만 한편으론 성인 여자를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디스코텍에서 어떤 여자가 다가오자 곧 달아나는 모습이 그 방증이다.

프로클로필은 당근과 채찍으로 나타샤를 길들인다. 나타샤가 갇혀 있는 지하 감방은 끔찍하지만 그에게 복종하고 그의 기분을 맞춰주면, 원하는 것을 약간 얻어낼 수도 있었다. 동화책, 백과사전, 워크맨, 라디오 등을 얻는 순간 나타샤는 진정 기뻐한다. 나타샤는 프로클로필이 폭력을 가하고, 힘든 노역을 시키고,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는 등 지옥 같은 순간들을 휴지에 기록해서 상자 속에 보관한다. 8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감방을 벗어난 순간도 있었다. 처음 바깥에 나갔을 때, 나타샤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감각들을 감당 못해 공황에 빠지는 장면은 매우 사실적이다. 한편 논란이 된 것은 강간장면이다. 실존인물 나타샤 캄푸쉬의 동명 자서전 <3096일>에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감독은 이 장면도 영화에 넣었다. 물론 캄푸쉬의 동의를 얻어서다. 선정적이진 않지만, 폭력장면 못지않게 불편하다.

한편 이 작품은 <몰락>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바더 마인호프>의 제작자로 유명한 베른트 아이힝거의 유작이기도 하다. 2011년 사망한 아이힝거는 <3096일>의 판권을 사들이고 캄푸쉬와 인터뷰를 통해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 제작에 열을 올리던 중이었다. 그런 그가 향년 61살로 돌연 세상을 떠나자 독일 영화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콘스탄틴 영화사는 아이힝거가 떠난 뒤 그의 생전 마지막 프로젝트를 관철시켰다. 영화 <3096일>은 이슬람권의 여성할례문제를 다룬 <데저트 플라워>를 통해 민감한 실화를 세심하게 다루는 능력을 증명한 바 있는 셰리 호만 감독이 연출을, 그녀의 남편이자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마틴 스코시즈의 카메라맨으로도 유명한 미하엘 발하우스가 촬영을 맡았다. 이들은 독일 뮌헨 스튜디오에 나타샤 캄푸쉬의 실제 감방을 재구성한 세트를 제작하고, 영화를 통해 실존 인물이 느꼈을 법한 두려움과 답답함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호만 감독은 일간 <노르트쿠리어>와 가진 인터뷰에서 “어느 아이의 힘에 대한 희망적인 영화를 찍는 게 중요했다. 영화를 보고 이 아이의 운명을 함께 겪었던 관객이 마지막에 ‘그래도 사는 게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