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해할 수 없는 용어 중에 사회지도층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언론에서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영향으로 시민들의 대화에서도 종종 들을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의사나 변호사처럼 고소득 전문직 또는 대학교수처럼 많이 배운 사람 또는 (일정 지위 이상 올라간) 목사나 스님을 이 범주에 넣곤 합니다. 언어는 관념의 바다라고 하지요. 다른 이를 ‘지도’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 지도를 받는, 실질적으로는 지배를 받는 이들이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사회지도층이란 말이 딱딱한 느낌에 계급성까지 갖추었다면 순화된, 소프트한 느낌의 새로운 단어가 주목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멘토라는 단어입니다. 몇해 사이에 참 많은 멘토들이 나타났습니다. 자칭타칭 멘토라 불리는 이들은 서점을 중심으로 일대 광풍을 일으키고, 각종 강연회와 TV/라디오 출연, 스마트폰 앱과 인터넷 메시지 서비스까지 광범위하게 진출했습니다.
이들이 해주는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생올림픽형. 현재 당면한 어려움은 당연한 것이며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의 지옥훈련 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이 시기를 어금니 꽉 깨물고 스펙을 쌓고 버텨내면, 그리고 더 지독하게 고생할수록, 시상대 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종교적 도그마형입니다. 본인들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 세상 모든 문제를 종교적 관점과 용서 그리고 구원의 틀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여행 에세이형입니다. 무작정 떠난 남미여행에서 삶의 희망을…. 다 말씀드리지 않아도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지금의 시대를 참고 견디고 실력을 키우라는 말은 틀리거나 잘못된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완용이 세 차례의 포고문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했던 말도 바로 실력양성이었죠. 그리고 참고 견뎌내서 어떤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시대인지 고민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종교적 도그마형은 구원의 틀을 쓴 채 결국 모든 문제의 근원을 개인의 관용으로 돌린다는 부분이 마음에 걸립니다. 심지어 명백한 범죄행위의 피해자로 고통받는 이에게 같은 조언을 하기도 하지요. 이 상황에서 가해자는 사라지고 멘토와 피해자만 남는, 피해자에게는 진짜 지옥이 펼쳐지는 그림이 그려지기도 합니다. 피해자는 멘토에게 킬링까지 당하는 것이죠.
무작정 떠나라는 조언은 달달하면서도 현실적으로도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회생활 해본 분들은 알 겁니다. 무작정 떠나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바로 부모의 재력을 밑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이른바 멘토라고 지칭되는 분들의 모든 말씀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위안을 얻는다는 것은 고된 삶 속에서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위안은 위안으로 그쳐야 합니다. 멘토들의 말씀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모두 개인의 문제로 한정하고 사회적인 문제도 개인의 문제로 다시 치환합니다.
내가 더 참았어야, 내가 더 자중했어야, 내가 더 용서했어야 하는 것으로 말이죠.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개개인 대부분의 문제의 기원은 사회지도층이나 멘토 같은 분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왜 그 부분에 대해선 말씀들이 없는 것일까요. 갑자기 영화 <황해>의 면 사장(김윤석)이 떠오릅니다. ‘현찰’이라는 철저한 자기 완결성을 갖고 있었던 사람 말입니다. 차라리 그런 사람을 멘토로 삼는 게 더 현실적이고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