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 폭파, 외계인 침공, 핵전쟁, 지구 온난화, 전염병, 빙하시대, 지진, 쓰나미 또는 허리케인…. 파리 한복판에 위치한 극장 ‘포럼 데 이마주’(옛 파리 비디오테크)가 내건 이 문구들은 바쁜 걸음으로 움직이는 파리 시민과 관광객의 시선을 끌고 있다. 올해 12월21일 예견된 종말론을 기념(?)하는 뜻에서 ‘아포칼립스’를 테마로 한 영화 80편을 상영하는 기획전이 2013년 1월6일까지 열리기 때문이다. 제작연도로 따지면 1930년대부터 2012년까지, 장르를 따지면 좀비물부터 판타지, 코믹영화까지, 그야말로 시대와 장르를 가로지르는 기획이다.
이 영화제는 “그저 종말을 재밌게 보내고 싶었다”는 포럼 데 이마주의 프로그래머 이자벨 바니니의 생각에 의해 시작됐다. 재기 넘치고 즉흥적으로 시작된 이 영화제의 분위기는 개막작으로 선정된 <4시44분, 지구 최후의 날>을 소개하기 위해 12월12일 극장을 찾은 아벨 페라라 감독이 이어갔다. 그는 이날 저녁 관객석을 향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12월21일에 지구가 멸망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말했다. 400여명을 훌쩍 넘어서는 관객 중 단 두 사람이 슬며시 손을 들었고, “이게 다예요? 제기랄”이라는 페라라의 말에 극장이 웃음바다가 됐다. 사실 21세기의 종말론을 믿는다고 떠벌리기엔 왠지 부끄럽고, 그렇다고 완전히 부인하기엔 꺼림칙한 면이 있다. 일본의 대지진,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등 예측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여전히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고, 최근의 종말영화들은 9시 뉴스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리얼리즘으로 인류에 닥친 재앙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랄한 기획 의도와 개막식 분위기만으로 ‘아포칼립스’ 영화제의 무게를 가벼이 볼 순 없다. 이 기획전은 지난 80여년간 사회의 변화, 이에 따라 각 시대의 재난영화들이 어떻게 변화되어왔는지를 대표작들을 통해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하자면 프로그램 중에는 아벨 강스 감독이 1929년 세계 대공황의 혼란을 바탕으로 만든 <세상의 끝>, 50년대 냉전을 SF 장르 형식을 빌려 표현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와 콘스탄틴 로푸칸스키의 <죽은 이들의 편지>처럼 70~80년대 구소련의 작가들이 미리 공산주의 체제의 끝을 내다보며 만든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더불어 같은 시기 미국 감독들이 SF, 액션, 호러, 좀비 장르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악’을 상징한 영화들(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이나 존 카펜터의 <괴물>), 스티븐 소더버그의 섬뜩하리만큼 리얼한 <컨테이젼>, 그리고 벨라 타르의 시대를 넘어선 종말에 대한 본질적 사색 <토리노의 말> 등이 눈에 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윤제균 감독의 <해운대> 상영이 반가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