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브로드웨이 무대는 가끔 영화에서만 보던 배우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때로는 스타파워를 가진 배우들이 연기력을 인정받기 위해 무대에 오르고, 때로는 초창기 연극 무대에 오르던 시절을 추억하는 배우가 브로드웨이를 다시 찾기도 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극 <만약 아직 내가 찾지 못한 것이 있다면>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한 제이크 질렌홀을 비롯해 1993년 <글렌게리 글렌로스>의 릭키 로마로 출연했던 알 파치노가 동명의 연극에서 셀리 레빈 역을 새롭게 선보였다. 또 톰 크루즈와 이혼한 뒤 복귀작으로 연극을 선택한 케이티 홈스의 <데드 어카운츠>,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을 맡고 벤자민 워커(<링컨: 뱀파이어 헌터>)가 출연한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등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번 브로드웨이 시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따로 있다. 제시카 채스테인이 주연을 맡은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와 마이클 섀넌이 출연한 <그레이스>다. ‘연기파 배우’로 관객에게 사랑받아온 그들이지만, 놀랍게도 채스테인과 섀넌에겐 이번 작품들이 브로드웨이 데뷔작이다. 먼저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는 헨리 제임스의 <워싱턴 스퀘어>를 바탕으로 오거스터스 괴츠와 루스 괴츠가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린 작품으로, 1949년에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연극은 1800년대 말 뉴욕의 상류사회를 조명한다. 아버지에게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예정인 캐서린(제시카 채스테인)은 그녀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한 빈털터리 미남 청년 모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캐서린의 아버지는 모리스가 재산을 노리고 딸에게 접근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부녀 사이의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진다. 사실 처음 이 작품이 주목받게 된 건 영국의 인기 드라마 <다운튼 애비>에서 매튜 역을 맡고 있는 댄 스티븐스가 모리스로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일반 브로드웨이 공연에 비해 여성 관객이 눈에 띄게 많은 이 작품은 스티븐스가 첫 출연하는 장면에서 가장 많은 박수가 터져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커튼콜에서 박수는 캐서린을 연기한 제시카 채스테인의 차지다. 아버지와 연인에게 당하는 멸시와 배반을 통해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담담하고 냉정하게 표현하는 그녀의 모습을 두고 <뉴욕타임스>는 “그레타 가르보가 연상된다”며 채스테인의 카멜레온 같은 연기에 호평을 보냈다.
마이클 섀넌의 출연작 <그레이스>는 지난 2006년 시카고에서 첫선을 보였다. 이 연극은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 부부인 스티브와 사라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시작된다.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고 자신도 권총자살하는 장면을 통해 <그레이스>는 누가 범인인가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나에 초점을 맞춘다. 이 연극에서는 마이클 섀넌의 연기 변신을 볼 수 있다. 주로 선이 굵고 광기 어린 역할을 맡아왔던 그에게 <그레이스>의 연출가 덱스터 블러드는 섀넌의 이미지와 닮은 스티브가 아니라 정적이고 마음의 문을 닫은 미항공우주국(NASA) 소속 과학자 샘 역을 맡겼다. 교통사고로 약혼녀를 잃고, 심하게 부상당해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샘은 스티브 부부의 이웃집에 살고 있다. 광적인 신앙심과 비즈니스 마인드로 점점 이성을 상실해가는 남편에 지친 사라가 샘과 가까워진다는 설정이다. <그레이스>는 채스테인의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만큼 호평을 받진 못했지만, 섀넌의 브로드웨이 진출작으로는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2013년 초에는 톰 행크스가 연극 <러키 가이>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할 예정이다. 행크스가 뉴욕 타블로이드지의 유명 칼럼니스트 마이크 맥앨러리 역을 맡을 이 작품은 지난 6월 세상을 떠난 노라 에프런이 수년간 작업해오던 연극이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유브 갓 메일> 등에서 에프런과 호흡을 맞춰온 톰 행크스인 만큼 <러키 가이>는 다시 한번 노라 에프런-톰 행크스 콤비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