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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남영동… 입니까?
강병진 2012-11-27

<남영동1985>가 재현하고 관객이 체험하는 고문의 기억

“그 비명들은, 사람들이 바뀌면서 계속되던 비명은 송곳같이, 혹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번쩍거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돼지기름처럼 끈적끈적하고 비계처럼 미끄덩미끄덩한 것이었습니다. 살가죽에 달라붙은 그 비명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서울 용산구 갈월동 88번지. 과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들었던 수많은 비명에 대해 고(故) 김근태 의원은 이렇게 묘사했다. ‘번쩍거리는 비명’은 상상할 수 있는 소리이나, ‘끈적끈적하고 미끄덩미끄덩한 비명’은 가늠이 어려운 소리다. 가혹한 고문으로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비명은 단지 육체적인 고통만을 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비명은 아픔 때문에 저지르는 비명이자, 가슴에 삭이고 삭였다가 간신히 내뱉은 비애였을지 모른다. 예상할 수는 있으나 1985년 그때, 남영동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김종태, 고문 당한 모든 이의 대표

정지영 감독의 신작 <남영동1985>는 김근태가 들었던 바로 그 비명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영화다. 이야기의 시작과 동시에 김종태(박원상)라는 이름의 사나이는 이미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소에 도착해 있다. 그는 다짜고짜 몰아치는 구타와 욕설에 못 이겨 옷까지 벗는다. 고문기술자 이두한(이경영)을 비롯한 주위의 사내들은 그에게 “쉬는 동안 해온 생각”이 무엇인지를 자백하라고 강요한다. 김종태는 수십장의 갱지에 생각들을 적어내지만, 그들이 원하는 ‘생각’은 따로 있다.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 자신들이 원하는 걸 내놓으라며 김종태를 고문한다. <남영동1985>이 묘사하는 그때 그 사람들의 고문은 죄인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이 아니다. 그들은 고문을 ‘공사’로 부른다. 한 사람을 무너뜨리고, 그를 다시 자신들이 원하는 행적의 인간으로 재건축하는 공사를 이른다. 고문을 당하는 자는 고문을 멈추기 위해 거짓을 말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것과 더 고통스러운 것 가운데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1988년 서울올림픽을 불과 3년 앞두고 온 국민이 선진국 대열을 꿈꾸던 그때에도 대한민국의 한구석에서는 야만의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남영동1985>의 바탕은 김근태의 수기인 <남영동>(<이제 다시 일어나>의 개정판)이다. 이 책은 1985년 9월,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했던 고문의 기억을 비롯해 그가 고문 사실을 폭로했던 재판기록, 아내와 나눈 옥중서신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남영동1985>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 고문을 받았고, 평생 그 후유증을 안고 살다가 간 김근태라는 인물에 관한 영화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정지영 감독은 책의 내용 가운데 그가 증언한 고문의 실제적 상황을 포착한다. 말하자면 영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고문’이라는 행위의 서사다. 영화가 보고자 하는 것 또한 고문을 당하는 자가 누구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고문을 자행했는가이다. 22일간의 이야기에서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김근태의 증언에 기대고 있지만,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은 유숙열 문화미래 이프 공동대표가 쓴 공개편지인 ‘내게 팬티를 사준 남자, 이근안에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미 현실에서도 그러했지만, 이 영화에서 김근태는 당시 고문을 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위해 김종태로 분한 듯 보인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영화가 그리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기억은 곧 서빙고동 보안사 사무실과 남산 중앙정보부에 얽힌 기억일 것이다.

고문의 리듬, 고문의 클라이맥스

정지영 감독은 약 1년 전, 사법부의 부당함과 이에 맞서 싸우는 남자의 이야기인 <부러진 화살>을 연출했다. 그의 전작들이 사회의 문제의식을 던지는 영화였다면, 이 작품은 관객을 재판정의 방청석에 앉히고 주인공을 직접 바라보게 만드는 영화다. 전혀 분위기가 다른 작품이지만, <부러진 화살>을 통해 자신만의 영화적 힘을 확신한 그는 <남영동1985>에서 그때의 고문현장을 함께 체험하자고 선언한다. 이러한 영화의 선언은 이야기의 선택이자, 미학적인 선택이다. 정지영 감독은 김종태가 고문을 당하는 동안, 대공분실 밖의 세계를 단호히 차단한다. 간혹 김종태의 회상과 상상이 삽입되지만, 그마저도 김종태가 겪는 내적인 모순과 자기 합리화를 드러낼 뿐이다. 영화는 러닝타임의 약 90%를 할애해 욕설과 구타로 시작한 고문이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이어지고 다시 반복되는 과정을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얼굴에 수건을 덮은 배우가 어떤 특수효과도 없이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센 물줄기를 고스란히 견디는 장면, 그리고 그의 입안으로 고춧가루를 집어넣는 장면들을 가감없이 지켜보는 일은 보는 이에게도 고문일 것이다. 하지만 <남영동1985>가 단지 잔인한 고문을 전시하는 것으로 고통을 전이시키는 건 아니다. 영화는 때로 고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대신, 관객이 바라보는 고문의 시간을 늘리면서 고문을 체험시킨다. 고문기술자인 이근안을 모델로 한 이두한이 처음으로 김종태를 물고문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고문가해자와 피해자를 비추던 카메라는 건물의 호출이 울리면서 고문실의 문으로 이동한다. 누군가가 나가고 다시 들어올 때까지도 카메라는 여전히 문을 비추고 한쪽에서는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잠시 뒤 다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오고, 카메라가 그를 따라가 또다시 김종태를 비춘 뒤에야 고문도 일단락된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김종태와 관객이 똑같은 고문의 시간을 견디게 한다. 또한 <남영동1985>가 고문을 묘사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남영동1985>가 당시의 고문에서 재현하려는 것은 방식이 아닌 리듬인 듯 보인다. 김근태는 수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노기등등한 이들의 눈빛에는 푸른빛마저 감도는 듯했습니다. 논쟁 비슷한 것을 한 것에 대해 화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에 밀린 것에 역정을 내는 듯도 싶었습니다. 아니면 약간 방심하게 했다가 급습 고문을 하여 고문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교묘한 기술적 대치이기도 했습니다. 5일에도 그랬고, 6일에도 그런 리듬을 타는 것 같았습니다.” 고문을 시작한 이두한은 김종태에게 할 말이 있으면 발가락을 움직이라고 하지만, 그가 발가락을 움직인다고 해도 이두한은 고문을 멈추지 않는다. 고문이 끝난 뒤, 김종태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지만 그럼에도 고문은 계속된다. 이제 고문이 끝났다고 여길 법한 시점에 영화는 여지없이 또 다른 고문을 이어붙인다. 종종 그를 고문하는 이들이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때, 김종태와 관객은 일말의 기대를 갖지만, 그 또한 다음 고문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진다. 고문의 클라이맥스에서 결국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이두한은 말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정지영 감독은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반복되는 고문의 서사를 그처럼 잔인한 리듬으로 진행시키고 있다.

낭만적이고 프로페셔널한 고문기술자

<남영동1985>는 이렇게 가혹한 고문의 역사를 용서할 수 있냐고 묻는 영화로 보일지 모른다. 영화 속 고문의 작태를 보고 있자면, 누구나 분노에 몸서리칠 것이다. 당시 권력의 상층부에서 고문을 용인하고, 때로는 진두지휘하던 이들이 지금도 권력의 주변에서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끓어넘칠 분노다. 하지만 <남영동1985>가 소환시키는 고문의 기억 속에는 고문을 당하는 자와 고문을 집행하는 자 사이의 아득한 거리에서 비롯된 당혹감이 앞선다. 아마도 선과 악으로 나뉜 관계가 이보다 더 가까울 것이다. 김종태와 함께 고문실에 갇힐 수밖에 없는 고문가해자들은 애인과의 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진급에 목을 매고, 때로는 자신을 비하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종종 김종태에게 인간적인 정을 내비치고 같은 야근생활자로서의 유대감을 공유한다. 그러나 고문에 직면하는 순간, 그들은 이제까지 해온 일을 다시 반복하는 직장인으로 돌변한다. 앞서 말했듯 고문을 ‘공사’로 지칭하는 그들이 김종태의 얼굴을 욕조에 처박고 그의 몸에 전기가 흐르게 놔둔 채 잡담을 나누고 야구 중계방송을 듣는 모습은 실제 공사판 노동자들의 풍경과 흡사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고문가해자들 가운데 가장 당혹스러운 인물은 이두한이다. 김근태는 이근안을 “거리 어느 구석에 있을 깡패, 전형적인 어깨 타입”의 남자이자, “눈은 불안정하고 뻐기면서 걷는 인간 백정”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남영동1985> 속의 이두한은 낭만적인 프로페셔널 기질로 가득한 인물이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같다고 해야 할까? 그는 남들이 따라올 수 없는 자신의 고문기술에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이며 자신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은근히 즐긴다. 그가 섬세한 손길과 우아한 동작으로 김종태의 몸 상태를 진단하는 모습이나, 007 가방에 곱게 챙겨놓은 그의 연장을 보여주는 장면, 그리고 고문에 앞선 준비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영화적인 매혹이 느껴질 정도다.

어쩌면 관객이 영화 속의 이두한을 바라보는 감정은 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목사안수를 받은 이근안을 대하는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실제의 그가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영화의 이두한과 고문가해자들 또한 한 사람이다. 그들 안의 거리는 곧 야만의 시대를 저마다 다른 인상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설의 기억이다. 누군가에게는 현재진행형의 아픔이, 또 누군가에게는 20년 전의 일이고 40년 전의 일일 뿐이다. <남영동1985>는 그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기억을 돌이키는 게 아니라, 이제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고 탐색한다. 정지영 감독은 이 질문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고문실의 칠성판에 함께 누워봐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그럼으로써 불과 20년 전까지 자행된 고문을 그저 저개발 시대의 기억으로 치부했던 일반적인 관성에 제동을 걸고 있다. “돼지기름처럼 끈적끈적하고 비계처럼 미끄덩미끄덩한” 비명의 정체 또한 이곳에 누울 때, 간신히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섬뜩하고, 아프고,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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