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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 동성애/이성애를 가르는 빗금 자체에 의문 제기!
장영엽 사진 최성열 2012-11-16

퀴어 연작 시리즈 만든 이송희일 감독

지난 6월의 어느 초여름날 밤, 이송희일 감독의 ‘팬덤’을 직접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그의 퀴어영화 <지난여름, 갑자기> <백야>의 상영에 참석하기 위해 수많은 ‘후회 폐인’들이 인디포럼을 찾은 것이다. 새벽까지 이어진 그날의 뒤풀이에 함께하며 <후회하지 않아> 이후 6년 동안 지속된 팬들의 오랜 목마름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헛되지 않은 듯 보인다.

11월15일, 앞서 언급한 두편의 영화와 올여름에 촬영한 신작 단편 <남쪽으로 간다>가 ‘이송희일 퀴어 연작 시리즈’란 이름 아래 극장 개봉한다. 타이트한 촬영 스케줄과 캐스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신인배우 연출 문제로 이송희일 감독의 시름은 깊어져갔지만, 완성된 영화를 보면 알게 될 거다. 이제는 새로운 폐인이 탄생할 때라는 걸(영화의 자세한 내용은 36쪽 프리뷰를 참조하면 좋겠다).

-첫 관객 시사회를 서울이 아니라 부산에서 연다. =<후회하지 않아> 때부터 쭉 팬이었던 분이 있다. 그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부산 생각을 하게 됐다. <후회하지 않아>의 팬덤이 부산으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부산 팬들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5만 관객 파티를 한다고 선상보트를 직접 빌릴 정도였으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되긴 했는데, 6년 만에 퀴어영화 개봉 준비를 하면서 다시 부산을 떠올렸고 지방에서부터 시사회를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단편을 연출하는 기분이 어땠나. =재밌긴 한데, 장편과는 다른 재미다. 장편이 집 한채를 짓는 느낌이라면 단편은 자취방 이야기를 하는 느낌? 이제 좀 집중하겠다 싶으면 촬영이 끝나 아쉽더라. <지난여름, 갑자기>가 5회차, <남쪽으로 간다>가 6회차, <백야>가 13회차였다. 요즘 단편 찍는 친구들도 웬만하면 10회차가 넘어간다는데 우린 워낙 싸게 찍는 사람들이라. (웃음) 우리는 낮에만 찍어도 8분 뽑아낸다고 하면 사람들이 기겁한다.

-원래 <탈주>를 마치고 다른 장편을 준비하지 않았나. =맞다. 지난해 10월 LIG ‘영화음악 ∞ 음악영화’에서 상영한 단편 <지난여름, 갑자기>의 본편 격인 <야간비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등학생들이 주인공인 퀴어영화이고 시나리오도 다 썼는데, 겨울에 준비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서너달 정도 시간이 비었다. 겨울에 놀면 뭐하나, 가볍게 단편 두편 정도 더 찍자고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왔다. 아직도 <남쪽으로 간다>의 시나리오에는 눈 내리는 장면이 남아 있다. 스탭, 배우들이 그거 갖고 얼마나 놀려댔는지. 난 “너희가 고치면 되잖아, 여름으로!”라며 소리지르고. (웃음)

-처음부터 세 단편을 퀴어 연작으로 개봉할 계획이었나. =세편을 동시개봉하자는 계획은 있었다. 하지만 옴니버스처럼 묶이는 건 원하지 않았다. 세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건 아예 생각을 하지 말자, 내가 찍고 싶은 영화를 찍자. 대신 주인공은 무조건 두명이고 끊임없이 걷는다는 점, 보조 캐릭터의 역할을 최소화하자는 점에 통일성을 뒀다.

-세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자신이 머물렀던 곳을 떠났을 때 비로소 영화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지난여름, 갑자기>의 선생과 학생은 한강에서, <백야>의 퀵서비스 배달부와 외국 항공사 직원은 종로에서, <남쪽으로 간다>의 군인과 제대한 선임은 어느 시골 숲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일부러 자기 공간이 아닌 외부의 공간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그저 걸으려면 계속 이동해야 하고, 장소를 빌리려면 비싸니까. (웃음) 다만 등장인물에게 익숙한 공간은 좀 피하고 싶었다. 무슨 사연이 서려 있는 추억의 장소, 이런 건 좀 오글거리잖아.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에 ‘코이레’(coire)라는 단어가 있다. 라틴어로 산책하다, 나란히 둘이 걷는다는 뜻의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의 또 다른 의미로 ‘성교하다’가 있다. 나란히 여행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것. 내 영화가 이 두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가 이 말을 듣더니 ‘코이레’란 제목으로 세편을 묶어 개봉하자더라. 내가 극구 반대했다. 어어어, 절대 안돼. 오글거려. 너무 오글거린다고. (웃음)

-<지난여름, 갑자기>가 <야간비행>의 프리퀄이라면, <백야> <남쪽으로 간다>는 어떻게 구상했나. =사실 <백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 소설에 내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켜 초고를 썼었다. 그런데 그때 게이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폭력 사건이 종로에서 터진 거다. 그게 나에겐 굉장히 충격이었고, 시나리오에도 영향을 줬다. <백야>는 한편으론 ‘원 나이트 스탠드’ 영화에 대한 나의 애정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하다. 리버 피닉스가 출연한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이나 클레어 드니의 <금요일밤>을 많이 참조했다. <남쪽으로 간다>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2집 앨범에 수록된 노래 제목이다. 듣는데 뽕짝 리듬이 너무 좋은 거다. 그 곡을 들으며 우연히 휴가나온 군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연작에 출연하는 배우가 대부분 신인이다. 캐스팅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다고 들었다. =조만간 ‘한국의 배우들에게 고함’이라고 이 얘기를 <씨네21>에 자세히 쓸 거다. 그전에 짧게 말하자면, 캐스팅 과정에서 애를 먹는 이유가 예전과는 좀 달라진 것 같다. 배우들의 결정에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거다. 이번에 <백야> 캐스팅을 진행할 때도 시나리오 리딩까지 한 배우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안 오더라. 알고 봤더니 어머니가 퀴어영화에 출연한다고 한손엔 십자가를 들고 한손엔 농약병을 들고 울고불고하셨다는 거다. 비슷한 일을 계속 겪으니 캐스팅만 하는 데도 3개월이 쓱 지나갔다. 그 난리를 겪은 터라 <백야>에 이이경을 캐스팅할 때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제일 먼저 했다니까. 스타 시스템이 기형적으로 커버리니 마음의 준비도 없이 영화에 합류하려는 배우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면. =멜로영화이다 보니 관객이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이미지의 배우를 원했다. 앞으로는 누가 ‘퀴어영화 주인공들이 왜 꽃미남이냐’고 물으면 입을 확 꿰매버리려고 한다. 이성애 멜로영화를 만들 때 왜 꽃미남, 꽃미녀가 나오냐 이런 얘기 죽어도 안 하면서, 퀴어영화에는 왜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르겠다. 관객의 기대치를 최대한 올려줘야 하기 때문에 인상이 좋은 배우들을 찾았다.

-이번 연작을 돌이켜보면, 줄거리보다는 강렬한 한 장면의 이미지가 영화의 정서를 고양하는 것 같다. <지난여름, 갑자기>와 <남쪽으로 간다>의 엔딩 신이 특히 그렇다. =장편이 스토리의 힘을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면, 단편은 어쩔 수 없이 한 장면에 기대게 되는 것 같다. 두 영화 모두 마지막 장면을 위해 존재하는 작품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중요한 장면인데도 시간이 촉박해 후다닥 찍어야 했던 게 많이 아쉽다. 지금도 잠자다가 가끔씩 일어나서 생각한다. 아파트를 하루 더 빌렸어야 하는 건데, 그 장면은 다시 찍었어야 하는데. (웃음)

-세편의 영화에서 이미지의 힘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하는 요소가 바로 음악이다. 영화음악 작업은 어떻게 진행했나. =웬만하면 시나리오를 쓰기 이전에 음악의 느낌을 결정하는 편이다. 일권이 형은 만날 “영화가 안되니까 음악을 쓰는거야” 그러지만. (웃음) 먼저 정한 음악을 시나리오 쓰면서도 듣고 촬영, 편집할 때까지 들으니 완성된 영화와 딱 붙을 수밖에. <지난여름, 갑자기>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와 함께 작업했다. 작품에 잘 붙을 만한 곡들을 편집해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남쪽으로 간다>는 구남의 앨범에서 영감을 받은 경우고, <백야>의 경우 <셔터 아일랜드>의 O.S.T에 참여했던 독일 실험음악가 막스 리히터와 미국 인디 뮤지션 크리스 가르노의 곡을 썼다. 음악과 엔딩을 정하고 나면, 중•단편은 무너지진 않는구나 싶더라.

-영화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다. 해피엔딩으로 끝낼 생각은 없었나. =내가 만든 모든 퀴어영화는 해피엔딩이라 생각한다. <후회하지 않아>조차도 사람들은 비극이라 말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해피엔딩은 기복신앙이나 기독교에나 존재하는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망을 겪고 그걸 극복하는 순간에 짓는 미소, 혹은 그 순간에 되찾는 고요함이 해피엔딩이지. <지난여름, 갑자기>의 커플은 다음 작품 <야간비행>에서 큰 비극을 겪을 거라 행복한 순간을 보여줬다. <백야>는 열린 결말이지만 마음만은 해피엔딩이라 생각하고 작업했고, <남쪽으로 간다>는 “그동안 내가 짝사랑했던 이성애자 개새끼들아. 난 잘 살 거다!”라고 외치는 작품이고. (웃음) 특히 <남쪽으로 간다>는 퀴어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 소박한 선언 같은 작품이다. 지금까지 동성애 커뮤니티의 내부문제에 집중해왔다면, 이제는 동성애/이성애를 가르는 빗금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보려 한다.

-<야간비행> 이후 한동안 퀴어영화 작업은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가끔은 내 영화는 다 퀴어라고 생각하는 시선들이 아쉬웠다. 나는 게이이기 이전에 영화를 먼저 시작한 사람이다.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도 카메라워킹 때문에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다 봤다. 감독으로서 어떤 세계를 구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깊어지고 있는데, 그래서 뺨 때리는 장면조차 정말 많은 생각들을 하며 찍었는데 그런 변화에 대해 물어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쉽더라. 더 늦기 전에 평소 해보고 싶었던 다양한 장르에 도전해보고 싶다. 그리고 10년 뒤쯤 이성애를 흔드는 퀴어사극을 만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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