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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기억하라 1985
문석 2012-11-12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1985>는 소문처럼 돌직구 같은 영화였다. 이미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사람들은 “2시간 내내 너무 무서웠다”거나 “객석에 있는데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고문당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는데 기자시사회를 통해 이 영화를 본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문하는 자들이 김종태(박원상)의 다리에 야구 방망이를 끼워넣고 무릎을 밟을 때 내 무릎에 통증이 오는 것 같았고 그의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물을 부을 때 숨을 쉴 수 없는 듯했다. ‘장의사’라 불리는 이두한(이경영)이 전기고문을 가할 때는 살갗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정지영 감독과 배우들의 굵은 직선 같은 묘사가 섬뜩하기도 했지만, 잊고 있던 80년대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당시에 고문을 받거나 했던 건 아니지만, 그 시절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약간 놀란 것은 함께 영화를 봤던 90년대 후반 학번인 후배가 김근태 전 의원이 고문당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과거 고문이 횡행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나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친구인데도 말이다. 그 친구는 이 영화를 보고 조금은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음험한 ‘조직’ 사건을 만들 때뿐 아니라 국가보안법 혐의를 덮어씌우기 위해서, 또는 주요 수배자를 검거하기 위해 고문이 늘 사용됐던 그 시절의 일들은 한동안 잊혀져왔던 것이다. 하긴, 공안사건이 아니더라도 당시 경찰이 고문을 지극히 일반적인 수사 방법으로 썼다는 사실은 <살인의 추억>을 통해서도 볼 수 있잖은가.

전두환 정권 때보다 고문을 ‘애용’했던 정권이 있다. 박정희 정권 말이다. <씨네21> 사무실에서 맞은편으로 보이는 서울시청 남산별관은 과거 중앙정보부의 분실로 사용됐던 곳이다. 그 지하에서 지독한 고문이 벌어졌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유신의 추억: 다카키 마사오의 전성시대>(이 영화는 아직도 배급사를 못 잡고 있다. 관계자 여러분, 부디 신경써주시길!)에 따르면 이곳에서 자행한 고문으로 민청학련 사건이 조작됐고 그 윗선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만들어졌다. 조작과 조작으로 이뤄진 그 사건으로 8명이 사형장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었으니 ‘고문 정치’는 악독하고도 악독한 것이다(대통령 후보 한분은 전혀 다른 기억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기억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기억은 때때로 강력한 투쟁이 될 수 있다. 배우 박원상은 <남영동1985>가 “기억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영동1985>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야만적인 정치권력에 대한 기억의 영화다. 용서할 수 없는, 용서해선 안되는 자들에 대한 기억의 영화이기도 하다. 고문 과정을 보는 게 괴롭더라도 우리 모두 이 영화를 끝날 때까지 두눈 부릅뜨고 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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