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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본사회를 위해 무엇을 말할 것인가
장영엽 2012-11-08

제25회 도쿄국제영화제, 중-일간 갈등과 3•11 대지진 이후 달라진 일본영화의 분위기까지

개막작 <태양의 서커스>의 제작진들.

제25회 도쿄국제영화제가 10월20일부터 28일까지 일본 도쿄 롯폰기힐스에서 열렸다. 중-일간의 정치적 긴장 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졌지만, 일본영화의 새로운 저력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제 현장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더불어 올해 경쟁부문의 화제작이었던 왕징의 <펑 슈이>와 같은 부문에 소개된 두편의 일본영화, <플래시백 메모리즈 3D>와 <블랙 스퀘어> 제작진과의 인터뷰를 전한다.

날씨는 영화제의 중요한 변수다. 무섭게 퍼붓는 소나기를 뚫고 바지를 흠뻑 적시면서 극장에 간다는 건, 영화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도쿄국제영화제는 계절과 날씨의 수혜를 듬뿍 받은 영화제다. 10월 말의 서울 사람들이 두꺼운 코트를 준비하고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다면, 같은 시기의 일본은 가벼운 카디건을 걸치고 어디로든 산보를 떠날 수 있을 만큼 날씨가 포근하다. 다시 말해 극장에 들러 영화 한편 관람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도쿄영화제의 집행위원장 톰 요다 또한 25회 영화제에 참석한 외신기자들과의 점심 만찬 자리에서 “영화제를 열 때마다 신기하게도 날씨가 화창하다. 비가 오다가도 영화제가 열리기 전 뚝 그치거나, 영화제가 끝난 뒤에 오거나. 그런 걸 보면 하늘이 우릴 돕는 것 같다”며 날씨 자랑을 좀 했다.

<블랙 스퀘어>

중-일간 갈등으로 생긴 출품 취소 등 후폭풍

하지만 화창한 날씨의 도쿄영화제도 정치•사회적 이슈의 소나기만큼은 피해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국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독도를 둘러싼 한-일간의 영토 분쟁만큼이나 현재의 아시아를 긴장 상태로 몰아가는 이슈가 바로 중-일간의 영토 분쟁이다. 중국은 댜오위다오라 부르고 일본은 센카쿠라 일컫는, 이 작은 바위섬을 둘러싼 양국간 긴장의 불똥이 국제적 문화 교류의 장인 도쿄영화제에까지 튀었다. 개막을 한달 앞두고 ‘아시아-중동 아시아의 창’ 부문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던 임호 감독의 <플로팅 시티>가 갑작스럽게 출품을 취소했다. 이 영화가 중국•홍콩 합작영화였던 만큼 중-일간의 정치적 대립이 출품 번복의 중요한 이유가 아니겠냐는 추측이 당시 조심스럽게 나돌았다. 곧 그 소문은 현실이 됐다. 왕징 감독이 연출한 <펑 슈이>의 중국 제작사 안타에우스 필름이 경쟁부문 상영을 앞두고 영화제에서 작품을 내리겠다는 공식적인 문서를 영화제쪽에 보낸 것이다. 도쿄영화제는 이미 상영에 대한 계약이 완료됐다는 이유로 상영 철회를 과감히 거부하고 <펑 슈이>를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했지만, 후폭풍이 거셌다. 기자회견에 참석할 예정이었던 중국 감독 왕징과 배우 양빙안, 지자오강은 일본행을 취소했다. 그들을 대신해 촬영감독 리우유니안이 기자회견을 진행하기 위해 일본에 왔지만, 기자들과 한마디도 못 나눈 채 “제작사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회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펑 슈이>의 기자회견장에서 촬영감독이 보낸 메시지가 낭독된 순간은, 올해 도쿄영화제의 가장 슬픈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저는 도쿄영화제에 촬영감독으로 왔고, 영화를 만든 한 사람의 스탭으로서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저는 제작사의 요청에 따라 기자회견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관객 여러분은 여전히 이 영화를 즐기길 바랍니다.”

한국영화와 더불어 아시아영화 라인업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중국의 부재는 25회 도쿄영화제의 프로그램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올해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15편의 영화는 작품의 퀄리티적인 측면에서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칸과 토론토 등에서 이미 공개된 북미권, 유럽의 영화들, 그리고 아직은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봐야 할 인도네시아, 터키, 인도의 낯선 영화들이 두편의 일본영화와 더불어 상영됐다. 오히려 올해 영화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경쟁부문, 개봉을 앞둔 영화를 소개하는 스페셜 스크리닝 부문과 새로운 재능을 찾는 재패니스 아이즈 부문의 일본영화들이다. “3•11 대지진은 일본의 재능있는 젊은 감독들의 DNA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듯하다”는 도쿄영화제 프로그래머 야타베 요시의 말처럼, 포스트 3•11의 흔적은 재난 이후 일본 영화인들이 만든 다양한 작품에 뿌리내리고 있고, 그로부터 비롯된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작품들이 3•11로부터 1년 반이 흐른 지금 본격적으로 쏟아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플래시백 메모리즈 3D>

재능있는 일본의 젊은 감독들이 내놓은 신작

재일동포 감독인 마쓰아키 데쓰의 신작 <플래시백 메모리즈 3D>는 교통사고로 뇌손상을 입은 뒤 기억상실의 후유증을 앓는 뮤지션 고마의 재기를 통해 일본사회에 우회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이다. “고마는 이 영화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충격적인 오프닝 자막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2009년 차사고를 겪은 이래 고마는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잃었다. 아내와 친구들의 존재도, 그의 분신이었던 디제리두(호주의 전통 목관 악기)를 다루는 법도 그에겐 모두 생소하다. 몸에 각인되어 있던 기억을 되살리고 아내 수미의 일기에 도움을 받아 그는 뮤지션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되찾으려 한다. 3D와 자막은 이 영화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플래시백 메모리즈 3D>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고마와 정글 밴드의 공연 실황을 중계하며 스크린 속 스크린에 고마의 과거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상을 흘려보낸다. 화면 밖으로 뻗어나올 것 같은 디제리두의 입체감과 더불어 고마의 등 뒤로 펼쳐지는 과거의 영상은 마치 그가 음악을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소환하는 것 같은 주술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쉴새없이 화면 위로 펼쳐지는 자막은 교통사고 이후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모든 일상을 일기로 기록해야 하는 고마에 대한 배려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바로 미래다”라는 메시지가 다소 낯간지럽지만, 한 뮤지션에게서 받은 영감을 통해 다양한 영화적 요소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마쓰아키 데쓰의 독창적인 연출 방식은 주목해볼 만하다.

<플래시백 메모리즈 3D>와 더불어 경쟁부문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블랙 스퀘어> 또한 범상치 않은 일본영화다. 화가 자오핑은 어느날 미술관에서 ‘검은 사각형’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고 검은 사각형의 이미지에 마음을 사로잡힌다. 다음날 하늘 위로 검은 사각형이 날아가는 것을 목격한 자오핑은 그 뒤를 쫓다가 사각형 안에서 벌거벗은 남자가 걸어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국적도, 부모친척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오핑의 여동생은 오빠가 ‘검은 사각형’이라 이름 붙인 남자에게 호감을 가진다. ‘검은 사각형’ 남자의 정체를 둘러싼 모호하고 아리송한 사건들에 지쳐갈 때쯤, 영화는 SF 장르로의 전환을 시도하며 이야기의 흐름에 박차를 가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SF를 생각하며 <블랙 스퀘어>를 만들었다”는 감독 히로시 오쿠하라는 저예산영화 특유의 한정된 공간과 인물에서 낯설고 기묘한 정서를 이끌어내는 데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영화는 베이징에서 촬영했고, 일본과 중국 배우들이 함께 출연했다. 일본 배우들마저 모두 중국어로 연기한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던 영화다.

<재팬 인 어 데이>

개인의 일상보다 사회적 역할을 촉구하는 작품의 증가

새로운 이름들이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준 반면, 거장의 신작은 다소 실망스럽다. 가장 아쉬웠던 작품은 스페셜 스크리닝 부문에서 상영된 <쉘 위 댄스>의 감독 수오 마사유키의 <터미널 트러스트>다. <쉘 위 댄스>의 두 주연배우 야쿠쇼 고지와 구사카리 다미요가 16년 만에 다시 호흡을 맞춘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던 이 영화는 후반부의 장황한 설명이 전반부의 강렬한 이미지를 상쇄한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연인(그 ‘나쁜 남자’는 아사노 다다노부다)과의 이별로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의사 오리는 천식으로 죽어가는 환자 에기와의 교감에서 새로운 삶의 의지를 찾는다. 스테로이드 치료로 고통받던 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이 오면 길게 끌지 말고 생을 마감하게 해달라”고 오리에게 부탁한다. 오리는 에기의 말대로 혼수상태에 빠진 그를 안락사시키지만, 세상은 그녀를 의료 살인범으로 몰아간다. 수오 마사유키는 관객이 피하고 싶은 장면들- 환자의 목에 호스를 집어넣는 장면, 에기가 고통스럽게 토하는 과정 등- 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함으로써 그가 받아야 했던 고통을 보는 이들 또한 체감하게 한다. 문제는 정교하게 연출된 이러한 장면들이 후반부 살인범으로 몰린 오리와 검사의 대화 내용을 통해 반복적으로 서술된다는 점. 하지만 주연배우 야쿠쇼 고지와 구사카리 다미요가 만들어내는 죽음과 사랑의 앙상블은 단연 발군이다. 이 밖에 지난해 영화제에서 <딱따구리와 비>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오키타 슈이치 감독의 <요노스케 이야기>가 기대작으로 손꼽히지만 상영이 영화제 후반부에 잡혀 있는 관계로 아쉽게도 관람하지 못했다.

올해의 일본영화 라인업을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무난하면서도 한 가지 변화의 지점이 느껴진다. 개인의 일상을 파고드는 영화에서 벗어나 보다 사회적인 역할을 촉구하는 작품들이 늘어난 것이다. 여기서 3•11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의 독립영화 프로듀서이자 배우 기키 스기노는 “일본 감독, 프로듀서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가장 큰 관심은 지금 현재 일본 국민들에게 어떤 영화를 보여줄지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 해외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는 등 자신의 개인적인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보다는 일본사회 안에서 감독이, 영화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가 늘어나고 다른 감독들과 함께 기획하는 옴니버스영화가 느는 추세”라고 기키는 말했다. 그 결과는 아마 내년 영화제쯤 윤곽이 드러나지 않을까. 더불어 <플래시백 메모리즈 3D>나 <블랙 스퀘어> <터미널 트러스트>처럼 일본 개봉을 앞둔 작품들이 ‘능력 밖의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함께 상황을 해결해나간다’는 플롯을 다루고 있다는 건 최근 일본영화의 경향을 살피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 같다.

영화의 사회적인 파급력을 믿는 건 비단 일본 감독들뿐만이 아니다. 올해 영화제의 스페셜 개막작이자 리들리 스콧이 제작한 <재팬 인 어 데이>는 2012년 3월11일, 그러니까 3•11 대지진으로부터 1년이 흐른 바로 그날 일본과 관련된 다양한 전세계 사람들의 하루 일과를 담은 영상을 공모받아 만든 작품이다. 연출의 묘보다는 기획력이 좋은 작품이지만, 별다를 것 없는 일본 사람들의 하루 일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찡해옴을 느꼈다. 대지진이 일어나던 그날 딸이 태어나는 기쁨을 겪은 구조대원은 바로 몇 시간 뒤 나이 어린 소녀의 시체를 넘어서야 했던 아픔을 고백한다.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친구의 집터에 들른 중년의 여성은 깨진 타일 조각을 들고 “여기가 부엌이 있던 곳인데…”라고 중얼거린다. 쓰나미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오후 2시30분경, 전국에 묵념의 사이렌이 울리고 운동장에 모여, 스시집에 앉아, 집에서 TV를 보며 죽은 이들을 묵념하는 산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하는 이 영화는 국적을 넘어선 모든 사람들의 힘으로 지금 일본이 처한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외침으로 들린다. ‘영화의 힘, 바로 지금!’이라는 올해 영화제의 슬로건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터미널 트러스트>의 수오 마사유키 감독과 16년 만에 재회한 <쉘 위 댄스>의 두 배우, 구사카리 다미요와 야쿠쇼 고지(왼쪽부터).

국제 네트워크의 강화를 위한 노력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강화하려는 건 지난 5년여간의 영화제 임기 동안 톰 요다 집행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정책이기도 하다. 지난해 영화제에서 최고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언터처블: 1%의 우정>이 일본을 기점으로 독일, 프랑스, 미국, 한국 등지에서 전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다는 점에 도쿄영화제쪽은 고무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올해 1332편의 영화가 접수됐는데, 예년에 비하면 32%나 증가한 것이고, 5년 전에 비하면 두배의 영화가 우리 영화제에 몰린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많은 감독들이 도쿄영화제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증거”라고 집행위원장 톰 요다는 말했다. 전세계 다양한 배급업자들의 관심을 충족하기 위해 “국제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영화인지”를 작품 선정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영화제 마켓인 티프콤(TIFFCOM)의 장소를 롯폰기힐스에서 오다이바로 옮겨 “전시장, 시사실, 프레젠테이션 룸”을 같은 층에 배치하는 등 더 나은 영화제가 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디는 도쿄국제영화제는 25주년을 맞은 지금도 여전히 역동하고 있다. ‘일본영화의 힘’은 바로 이러한 플랫폼의 저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