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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새론] 천천히, 그렇게 천천히
송경원 사진 최성열 2012-10-25

13살 배우 김새론이 가는 길

아역배우 전성시대다. 얼마 전까지 아역이라 하면 어리지만 ‘연기도 곧잘 하는 영특한 아이들’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지만 재능있는 아역들이 우후죽순 등장한 최근에는 한 사람 몫의 연기자로 대우받고 있다. 최근 드라마의 초반 성패를 좌우하는 건 대부분 아역의 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그런 만큼 경쟁도 치열해지고 고만고만한 아역 연기자들 중에서 눈에 띄기도 어려워졌다. 이전에는 어린아이가 연기를 잘한다는 것만으로 주목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 우리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는 영특함 이상의 것이 필요해졌다. 게다가 잠시 반짝이고 스러져간 수많은 아역 연기자들을 봐오지 않았던가. 어릴 때부터 연기에 입문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자라서 배우로 남기는 더욱 어렵다.

보기 드문 ‘어둠’

그래서, 김새론은 눈에 띈다. 그저 아역이라서, 귀여워서, 연기를 잘해서 주목을 받는 게 아니다. 성인 못지않게 연기를 잘하는 아역 연기자들은 많다. 성인보다 더 예쁘고 귀엽고 발랄한 아역들도 많다. 하지만 의외로 아역다운 아역은 드물다. 그저 조숙함의 문제는 아니다. 아역들이 빠지기 가장 쉬운 함정은 스스로 어린아이를 연기한다는 점이다. 잘 생각해보면 아이들이라고 무조건 밝고 즐겁고 행복할 리 없다. 어린 시절에는 어린 시절만의 어둠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개 아역을 통해 ‘어린이’라는 역할을 보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아역 연기자들도 여기에 부응한다. 아이는 귀여워야 하고 밝아야 한다는 ‘아이처럼’이란 고정관념이 아역 연기자의 입지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김새론은 달랐다. 아역 연기자는 차고 넘치지만 김새론처럼 작품마다 꾸준히 주목받는 경우는 드물다. 본인이 생각하는 인기 비결을 묻자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역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주로 예쁘고 밝은 연기가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아역들이 다 그런 연기만 하면 재미없지 않을까요. 많은 분들이 제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건 제가 좀 색다른 역할을 많이 맡아서 그런 것 아닐까 싶어요”라고 대답하는 소녀의 모습은 아역이기 이전에 성장을 고민하는 배우의 그것이다.

김새론의 필모그래피는 어둡다. 입양아를 연기한 데뷔작 <여행자>(2009)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유괴를 당하는 소미 역의 <아저씨>(2010), 1인2역의 연기가 돋보였던 <이웃사람>(2012), 장기매매의 현장 한복판에 놓인 소녀 순영 역의 <바비>(2012)까지 성인 연기자도 쉽게 도전하기 힘든 어두운 영화, 어두운 역할들이다. 입양되고, 납치되고, 살해당하고, 팔려가는 김새론의 운명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다. “아직 제가 출연한 영화를 한번도 극장에서 보지 못했어요. 어른이 되면 제가 출연한 영화들을 제일 먼저 보고 싶어요”라는 그녀의 귀여운 투정처럼 등급문제에 걸려 자신의 출연작을 관람할 수 없는 걸 보면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역할을 강요하는 건 아닌지 우려할 수도 있다. 걱정하는 목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지만 직접 만나서 그녀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으니 그런 걱정 따윈 눈 녹듯 사라진다.

“<바비>는 2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촬영해서 힘들었어요. 제일 힘든 건 어떻게 이 상황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는데, 알기 쉽게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저는 이 영화가 무섭고 어둡기만 한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첫째로 중요한 건 가족에 관한 영화라는 점이에요. 이 영화를 보고 좋은 짓과 나쁜 짓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 왜 그래야만 했는지,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고민도 함께했으면 좋겠고요.” 아직 13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김새론에게 ‘그녀’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까닭은 그녀의 역할이 진지하고 어두워서 그런 게 아니다. 스스로 영화에서 자신의 역할과 필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성숙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김새론은 대체 불가능한 배우다. 김새론이 펼쳐놓은 어둠은 불편하게 질척거린다기보다는 차분하고 따뜻하고 가엽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잠긴 그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우리를 지켜보는 것 같다. 영화와 주제의 어둠에 잠식당하기는커녕 그 속에서 스스로 교훈과 빛을 발견하는 이 보기 드문 재능의 배우가 심지어 어리기까지 하다는 사실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역 연기자와 그의 성장을 바라보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영화 한편이 제작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볼 때 눈 깜짝할 새에 자란다는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하지만 소위 천재적이라는 아역 연기자들을 바라보는 심정에는 기대와 불안이 함께한다. ‘이대로만 자라다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시간을 영원으로 만들려는 영화의 욕망 앞에서 많은 아역들은 성장의 불협화음을 내며 사라지고 만다. 잘 자라고 있는 아역 연기자를 보노라면 절로 부모의 마음이 될 수밖에 없다. 부디 잘 자라서 계속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렇게 관객은 배우와 함께 성장한다.

함께 성장하는 ‘기쁨’

그런 의미에서 김새론은 왠지 안심이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연예계에 발을 들인 이 소녀에게 일상의 성장과 배우로서의 성장을 구분짓는 건 그다지 의미없어 보인다. 연기자 데뷔는 2009년 <여행자>부터였지만 카메라 앞에 선 경력은 태어나면서부터이기 때문이다. “1살 때부터 아기 모델을 했어요. 기저귀 모델부터 시작해서 <뽀뽀뽀> 같은 어린이 프로그램도 많이 했고요. 6살 때부턴 공연무대에 주로 섰던 것 같아요. 본격적으로 연기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오디션도 수백번 넘게 봤어요. 8살 때 <여행자>에 캐스팅됐을 땐 너무 기뻤죠. 경쟁률이 1000 대 1이 넘었다고 들었거든요. 울기도 많이 울었었는데 막상 촬영할 때는 정말 즐거웠어요.” 이쯤 되면 연기가 곧 생활이며 삶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업과 연기를 병행하는 것이 힘들지 않냐는 형식적인 질문에 “물론 저는 학생이에요. 하지만 학생이란 신분은 저의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연기는 일이 아니라 꿈이고 희망인 것 같아요.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워요. 학교생활과 연기를 병행하는 건 물론 힘들지만 저만 힘든 건 아니니까요. 다른 친구들도 학원 다녀야 하고 꿈도 찾아야 하는데 저는 꿈을 이미 찾았잖아요.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답하는 천생 배우. 그 똑 부러지는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다. “연기랑 공부가 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연기를 잘할 수 있기 위해서 공부도 필요하니까 뒤처지지 않게 따라가는 건 중요하죠. 또 친구들과 추억 만드는 걸 아예 포기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11월에 수학여행을 못 갈 것 같아서 그건 좀 아쉽지만, 그만큼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그만큼 힘든 일은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했던가. 이 욕심 많은 소녀의 배우로서의 성장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배우는 ‘배우’이고 싶다

연기가 무에 그리 좋은지 물으니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대답한다. “여러 상황을 미리 경험해볼 수 있어서 좋아요. 현실에서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도 좋고요. <이웃사람>이나 <바비>는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도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그런 일들을 알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통해서 무서운 일들이 많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여느 성인 연기자 못지않은 대답을 들으며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아역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새삼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최대한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배워야 할 시기이기에 특별한 롤모델마저 정해놓지 않았다는데 더이상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작품은 주로 시나리오를 보고 정해요. 엄마랑 회사와도 상의하긴 하지만 되도록 해보지 못한 역할들을 해보고 싶어요. 그렇다고 역할에 구애받고 싶진 않아요. 하고 싶은 연기만 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어떤 역할이든 주어졌을 때 소화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우문이 계속 이어질수록 소녀의 현답은 깊이를 더해간다. 이제껏 맡은 역할 중 무엇이 제일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생각하던 소녀가 내놓은 대답은 “모르겠다”였다. 하지만 그것은 무지가 아니라 오랜 고민 끝에 나온 정답이었다. “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처럼 밝을 때도 있고 영화 <이웃사람>의 여선처럼 발랄할 때도 있고 <바비>의 순영처럼 조용하기도 해요. 모든 역할에 다 제 모습이 조금씩 묻어 있죠. 거꾸로 작품을 하면서 제 안에 그런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다는 걸 알아가기도 했어요. 늘 배우려고 노력하는 배우이고 싶어요.” 이 어린 배우는 진정 제대로 모르는 법을 알고 있다. 이는 배운다고 아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키가 한뼘 자랄 때 연기자로서의 깊이는 한길 넘게 깊어져간다.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의 길을 걸은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가 배우로 단단히 다져져 가는 소리가 들린다. 흐뭇하게 자라고 있는 소녀의 외모만큼이나 진지하고 부딪치고 길을 넓혀가는 이 배우의 내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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