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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의 신작이 궁금했다

양영희 감독의 <가족의 나라>부터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까지

영화로 경계 넘기

언제나 다음 작품을 궁금하게 만드는 이름들이 있다. 영화제는 그들의 신작을 가장 먼저 확인할 수 있는 축제다. 레오스 카락스, 에드윈, 차이밍량, 양영희, 민병훈, 장위엔 등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하는 한편,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감독들을 만나본다.

가족의 나라 Our Homeland 감독 양영희 / 제작국가 일본 / 상영시간 100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현실에서는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상상 속에서 넘어가보고 싶다.” 재일동포인 양영희 감독은 자신의 가족사를 두편의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에 풀어놓았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인 아버지와 재일조선인 귀국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간 오빠들의 이야기는 다시 극영화로 재탄생한다. 양영희 감독의 첫 번째 극영화 <가족의 나라>는 북한으로 이주한 뒤 25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온 성호와 성호의 여동생 리에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는다. 뇌종양 치료를 목적으로 한 방문이라 성호의 일본 체류기간은 3개월로 제한되어 있다. 재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만 25년이란 세월은 어쩔 수 없이 성호와 리에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다. 게다가 북한의 감시원은 일거수일투족 성호의 일상을 감시한다.

양영희 감독은 “여동생은 나 자신이 모델이며, 오빠는 나의 오빠들을 합친 듯한 캐릭터”라고 영화 속 인물들을 소개한 적 있다. 이번에도 양영희 감독 자신의 경험이 영화에 중요하게 작동했다는 얘기다. 극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지점들도 생겼다. 리에가 북한 감시원에게 자신의 성난 마음을 표출하는 장면을 보자. 스스로 북한의 “사상의 적”이라 말하는 리에가 얘기한다. “나는 당신네 나라가 싫습니다.” “질문은 없고 복종만 있는” 삶을 사는 감시원은 답한다. “그 나라에서 당신의 오빠와 내가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직설적 화법으로 인물과 인물, 사상과 사상의 대립을 부각시키는 건 극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연출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극으로의 몰입을 돕는다. <원더풀 라이프> <공기인형>의 배우 아라타는 성호의 복잡한 내면을 보일 듯 말 듯 표현해내는데 그 연기가 일품이다. <러브 익스포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안도 사쿠라도 특유의 자유로운 감성으로 리에를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낸다.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도 북한 감시원 역을 맡아 제 몫을 다한다. <가족의 나라>는 여러모로 다큐멘터리스트가 아닌 영화감독 양영희를 발견하게 해준 작품이다.

동물원에서 온 엽서 Postcards from the Zoo 감독 에드윈 / 제작국가 인도네시아 / 상영시간 95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이상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장면의 속출, 이곳은 동물원이다. 3살 때 자카르타의 동물원에 버려진 라나. 사육사에 의해 길러져 동물원을 세상의 전부라 여기던 소녀는 어느덧 자라 마술사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청년을 따라 난생처음 동물원 바깥을 나온 라나는 그곳에서 추악한 인간사회의 현실을 절감하고, 다시 마음의 안식처인 동물원을 찾아간다. 인도네시아의 신성 에드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냉정하리만치 현실적인 고아 라나의 성장기에 초현실적인 마법의 순간을 접목시킨다. 우리가 흔히 보았던 기린과 하마, 코끼리의 움직임이 거대하고 몽환적으로 표현되는 건 이 영화가 선사하는 지극히 황홀한 경험이다. 결국 마술에 유혹되어 사랑을 택한 라나, 그리고 마치 <이웃집 토토로>의 토토로 버스처럼 등장해 라나를 태워주는 동물원 버스의 판타지 요소들 모두가 환상적인 동물원 세계에 일조한다. 라나의 방황과 여행이 환기하고자 하는 건 결국 우리가 잃어버린 마법과 순수의 공간에 대한 일깨움이다. 동물원을 떠난 라나가 곤란을 겪는 동안, 교차편집되는 동물원의 풍경은 자극제처럼 그 역할을 수행해낸다. 이 엽서를 받을 즈음 당신도 분명히 자카르타의 동물원을 가고 싶어지게 만들, 한편의 초대장 같은 영화가 도착했다.

홀리 모터스 Holy Motors 감독 레오스 카락스 / 제작국가 프랑스 / 상영시간 116분 / 섹션 월드시네마

이 영화에 관한 한 가능한 많은 감탄사를 끌어모으는 게 좋겠다. <폴라 X> 이후 무려 13년 만에 선보이는 레오스 카락스의 장편은 때로 미친 것 같고 아주 기괴하며 그리하여 마침내 아름답다. 영화는 오스카라는 한 남자가 하루 동안 겪는 9번의 다른 삶이다. 얼핏 어느 기업의 CEO처럼 출근길에 오른 남자는 늙은 거지로, 모션캡처 배우로, 미친 남자로, 또 자상한 딸의 아빠로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며 파리 곳곳을 배회한다. 커다란 리무진에는 그의 변장을 용이하게 해줄 각종 분장도구와 시나리오가 항시 준비되어 있다. 하루 일과를 온전히 타인의 인생으로 살아가는 이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레오스 카락스와 드니 라방의 가장 아름다운 협연이 될 이 영화에서 오스카의 하루는 역할을 바꾸는 배우의 운명이 되어도, 또 현대사회에 찌든 우리 삶의 궤적이 되어도 무방하다. 아니면 영화의 제목 ‘홀리 모터스’(Holy Motors)가 출발한 지점, 필름카메라가 작동할 때 내는 소리를 적용해봐도 괜찮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현장, 모터 소리가 나지 않는 현장에 대한 상징과 은유는 변화하는 영화계를 겪어온 연출가 레오스 카락스의 작업 연대기이기도 하다. 그게 꼭 이렇게 긴 시간을 돌아서야 그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인 것만 같아 가슴 뭉클해진다.

터치 Touch 감독 민병훈 / 제작국가 한국 / 상영시간 99분 / 섹션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괜찮아, 울지마> <포도나무를 베어라> 등을 연출한 민병훈 감독의 신작. 동식은 전 국가대표 사격선수였지만 현재는 알코올 중독자다.

어느 날 동식은 음주 뺑소니 사고를 일으키고 경찰에 잡혀간다. 남편의 합의금을 구하러 다니던 수원은 간병인으로서 돌보던 노인환자의 성적인 요구를 들어주고, 그 일로 병원에서 쫓겨난다. 이제 다시 안정을 찾을 때쯤, 딸 주미가 성추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편, 뜻밖의 합의로 풀려난 동식은 밀렵 일을 시작하는데, 또 한번의 거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벌이 날다>부터 <포도나무를 베어라>까지를 ‘두려움에 관한 3부작’으로 명명했던 민병훈 감독은 <터치>를 ‘생명에 관한 1부’라 말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누군가의 생명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딜레마에 놓인다. 그를 살릴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용서와 화해, 구원의 이야기인 한편, 심각함과 불편함이 공존하는 <터치>는 민병훈 감독의 전작과 달리 강한 드라마가 쉴 틈 없이 빠르게 흐르는 작품이다. 고라니를 등장시켜 연출한 판타지 장면도 기묘한 아름다움을 전한다. 그동안 눈에 띄는 조연을 주로 연기했던 배우 김지영의 스산한 표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베이징 양아치 Beijing Flickers 감독 장위엔 / 제작국가 중국 / 상영시간 96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여자친구는 돈 많은 남자에게 가버리고, 키우던 강아지는 집을 나간다. 시골에서 올라와 베이징에서 성공을 꿈꾸던 싼바오는 절망 끝에 유리컵을 씹는다.

<베이징 양아치>는 이 사건으로 당분간 말을 못하게 된 싼바오와 그의 친구 왕밍, 병원에서 만난 샤오스 등 세 청춘의 방황을 이야기한다. 고급 호텔의 주차관리직원인 왕밍은 여자친구와의 밝은 미래를 꿈꾼다. 샤오스는 게이바에서 춤을 춰서 번 돈으로 성전환수술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다.

<사랑해> <녹차> <아이들의 훈장> <다다의 춤>에 이르기까지 중국사회의 청춘 군상을 그려온 장위엔 감독은 이번에도 관심사를 놓지 않았다. 전작들이 밝고 간결한 화법의 영화였다면, <베이징 양아치>는 더욱 냉혹한 현실을 과격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담고 있다는 게 눈에 띄는 변화다. 베이징 곳곳에서 짓고 있는 아파트와 빌딩, 반면 철거되거나 철거직전에 있는 건물들의 풍경들을 대비시키는 이 영화에서 중국 청춘들의 미래는 사방에 막혀 있다. 사고로 입을 닫은 싼바오의 현재는 그러한 무기력을 은유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한줄기 희망을 찾으려는 영화의 안간힘이 감동적이다.

뷰티풀 2012 Beautiful 2012 감독 차이밍량, 허안화, 구창웨이, 김태용 / 제작국가 중국 / 상영시간 90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뷰티풀 2012>는 중국의 인터넷TV 사이트 ‘유쿠’가 제작한 옴니버스영화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김태용, 구창웨이, 차이밍량, 허안화 감독의 답변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것을 건져올린 4명의 감독들은 소박해서 더 값진 아름다움을 풀어놓는다. 먼저 김태용 감독의 <그녀의 연기>는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위해 가짜 며느리를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는 남자와 돈을 받고 가짜 며느리가 된 여자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공효진과 박희순의 능청스런 연기를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서 관객의 눈길을 끈다. 차이밍량의 <행자>는 이번 작품에서 가장 독특하다. 이 작품은 빨간 옷을 입은 행자가 도심의 이곳저곳을 아주 느리게 걷는 모습을 담은 것이 전부다. 그러나 느림의 미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행자> 역시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춘다. 구창웨이의 <용의 머리>도 <행자>와 흐름을 같이한다. 도시의 스산한 풍경과 사람들을 천천히 훑는 그의 시선에는 사소한 것들에 보내는 애정이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허안화 감독의 <마이 웨이>는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다뤘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트랜스젠더가 됐지만 그로 인해 아내를 버려야 했던 과거를 가진 한 인물이 사회 그리고 가족과 어떻게 화해해 나가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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