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라이어티의 데이비드 루니든, <필름>의 피터 브루넷이든 모든 영화 평론가가 인정하듯 <수쥬>는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옛날 옛적 한 여자가 살았는데 그 여자는 사실 오토바이를 사랑하는 청년 마르다의 애인이며, 죽은 여자는 현실에서 다시 인어로 환생한다는 것이다. 금발의 인어 복색을 한 메메이는 알고보니 배달부 마르다의 애인이였던 소녀 무단과 똑같이 생겼다. 그런데 메메이에게는 그녀를 사랑하는 비디오 기사가 있고, 그는 이제 아주 건조하고 낯선 목소리로 잊혀졌던 한 여자의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사라진 자에 관한 강박관념과 이중의 정체성, 관음증에 포갠 기억과 사랑의 이야기, 로우예 감독의 <수쥬>는 언뜻 보면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수쥬는 상하이를 동과 서로 가로지르는 강이다. 모든 쓰레기와 오물들이 집결되는 검은 강물의 표면에는 앙상한 빌딩이 벌받는 자세로 초라하게 서 있고, 카메라는 낯설게 흔들리며 강가의 인간 군상들을 다큐적인 시선으로 훑어내린다. 그러더니 갑자기 네온이 휘황한 한 나이트클럽에 카메라를 들이밀고는 그 모든 수쥬 강변의 삶을 잊어먹기라도 했다는 듯, 엉뚱한 인어의 사랑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어부들은 착시현상처럼 강가의 인어를 보고, 아가씨들은 금발과 짙은 푸른 색 화장을 하고서 나이트클럽의 손님들을 위해 수중 쇼를 벌인다. 로렐라이 전설과 카바레의 뒤안길이 섞여 있는 수쥬에서 전근대의 중국과 자본주의 중국이 몸을 섞고, 신화와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리얼리즘과 초현실주의의 강박관념이 휘발되어간다. 필름 누아르의 냄새를 풍기며 기세 좋게 출발한 영화는 어느덧 서글픈 사랑의 비가가 되고. 영화 만들기 자체에 대한 어떤 강박관념도 없이, 로우예는 근대화의 상징인 탁류의 강에 스플래시풍의 인어 전설을 끌어들이면서 그렇게 유유히 수쥬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마치 영화 만들기의 경계를 수쥬와 함께 넘어보겠다는 듯이.
사랑 두 개, 현실 속 신화 속
<수쥬>에는 표면상 두개의 이야기가 맞물려져 있다. 하나는 손만 보이는 비디오 촬영기사인 나와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메메이의 사랑이고, 또 하나는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이야기이다. 얼굴조차 비춰지지 않는 나는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을 추리극의 형식을 빌려 추적해 나간다.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은 처음에는 그저 그런 배달원과 소녀의 사랑이야기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인질과 사랑에 빠지는 한 남자의 할리우드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범죄단에 연루된 마르다가 자신을 유괴했다는 것을 알아챈 여자는 인어가 되어 남자 앞에 나타나리라는 말을 던지고 수쥬 강물에 몸을 던진다. 그러면서 영화는 갑자기 신화의 영역에서 부활하는 듯 현실에서 점프 컷 해버린다. 필시 죽었을지도 모르는 소녀 무단을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다니며 찾아헤매는 마르다는 영락없이 저승에 가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찾아내려는 오르페우스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이 신화가 될수록 그리고 그것이 진실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영화는 나와 메메이의 사랑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과 비디오 기사인 나와 메메이의 사랑은 여러 면에서 극단의 대조를 이룬다.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은 죽음으로써 완결되는 신화의 세상으로 치닫는 반면, 나와 메메이의 사랑은 현실 안에서 파편처럼 만났다 헤어지는 전형적인 젊은 연애의 방식이다. 그런데 신화화된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에 대해 메이메이는 항상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자기를 유혹하기 위한 마르다의 지어낸 이야기라고. 메메이와 무단을 혼동했던 마르다는 비디오 기사인 나의 제안으로 진짜 무단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찾아나서게 되고, 결국 편의점 여직원이 돼 있는 진짜 무단을 만나게 된다. 강에 투신한 마르다와 무단의 시체를 보고 메이메이는 충격을 받는다. 이제 마르다의 거짓말은 진실이 되었고, 신화는 현실 속에 기습적으로 침입해 버렸다.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이 진실일수록 나와 메메이의 사랑에 무엇이 결여됐는가는 분명해진다. 감독 로우예는 같은 색깔의 판타지인 거짓말과 신화가 현실이라는 안전판을 떠나버렸을 때 대체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수쥬>는 사랑이야기인 동시에 영화 만들기에 대한 치열한 발언을 하는 또다른 속을 내보이는 것이다.
끊임없는 혼란, 어쩌면 의도
기법이나 이야기가 ‘섞인다’는 측면에서 <수쥬>는 단연 로우예의 내공이 아니면 만들어지기 힘든, 쉬워 보이는 듯하지만 꽤 정교한 영화연출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수쥬>는 평이한 1인칭 내레이션의 화자와 그의 시점숏을 차용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나의 시점은 영화 속의 무단의 시점과 섞이게 된다. 반면 영화의 화자인 나는 가면 갈수록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무뚝뚝해지려는 것처럼 보인다. 어쩐지 마르다와 무단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아주 무관심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수쥬>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게도 카메라는 그러한 내레이터의 목소리의 톤과는 거꾸로 가버린다. 그러니까 세상을 담아내는, 세상에 대해 심리적 거리감을 두었던 나의 카메라적인 시선은 이상하게도 가면 갈수록 마르다와 무단의 이야기에 동화되는 듯, 결국은 나와 마르다의 시선이 하나로 포개지는 지점에 오게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메메이와 소녀 무단도 완벽하게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메메이가 무단인지 무단이 메메이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무단이 수쥬강에 몸을 던진 뒤 영화는 메메이가 나이트클럽으로 들어서는 장면으로 바뀌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나의 시선은 간 곳이 없고 메메이에 홀린 무단의 관음증적인 시선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의 플래시 백이나 인트로 없이 상하이의 거리를 헤매던 카메라는 불쑥 ‘나’와 메메이의 과거 안으로 들어가 메메이에게 카메라를 들이민다. 이 과거는 다시 마르다를 통해 마르다와 무단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는 더 대과거로 진입하게 된다. 관객의 몽환적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수쥬>의 시간은 회상이라기보다는 생생한 상하이의 현재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건 그러니까 신화인 동시에 상하이 길거리의 이야기이자 시간이다. 나누어지고 겹쳐지는 이야기들과 정해진 시점숏이나 영화만들기에 대한 강박관념없이 어찌보면 <수쥬>는 대단히 자유분방하게 영화 만들기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본의 도시 상하이, 사랑한다로우예는 연출에 파격을 가하면서도 <수쥬>에서 일관되게 통일된 이미지를 부여한다. 점프컷에 실은 이미지라는 점에 있어 아마도 <수쥬>는 충분히 왕가위적이라는 혐의를 받는 것 같다. 그러나 <수쥬>의 이미지들은 단순하면서도 깊게 작용한다. 수쥬라는 강과 인어인 메메이에게 부여된 물의 이미지. 마르다와 ‘나’의 세상에 대한 고립감을 밝히는 외알 전구의 이미지. 휘발되는 사랑의 기억인 보트카와 오토바이의 이미지. 감독은 이러한 아주 현대적인 이미지들 사이에서 고색창연한 사랑이야기를 끌어내고는 맘에 들지 않으면 불평도 하지 말라고 일러둔다.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비디오 기사인 내가 또다른 사랑을 찾아헤매듯, 또다른 사랑이야기는 세상에 얼마든지 널려 있으니까.
중국영화판도 이제는 변화하고 있다. 로우예 같은 6세대 감독들은 첸카이거와 장이모의 명성과 허심탄회게 결별하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국제영화제를 사냥하러 나선다. 서른다섯인 로우예는 많은 386감독들이 그러하듯 TV 연출로 돈을 벌고 드림 팩토리라는 독립영화사를 만들어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를 찍고 있다고 한다. 파티석상에서 만났던 그는 <수쥬> 역시 독일인 프로듀서를 만나지 않았다면 TV물로 제작된 채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지아장케와 더불어 386세대인 이들은(로우예에 따르면 중국에서도 6세대를 다른 말로 386세대라 일컫는 모양이다) 선배인 5세대들과 달리 더이상 대륙적인 자연풍광에 혹은 문화혁명 이전의 ‘좋았던’ 중국에 집착하지 않는다. 첸카이거가 <현위의 인생>에서 유장하게 흐르는 누런빛의 황하로 관념 속의 삶을 예찬할 때, 로우예는 자본주의 땟물에 닳고 닳은 검은 강인 수쥬에 발을 담근다. 5세대의 원죄의식과 문제의식이 마오쩌둥 시대의 문화혁명에서 나왔다면, 6세대의 현실 비판의 진원지는 뭐니뭐니해도 천안문 사태가 될 것이다. 여기서도 로우예는 튀는 면이 있다. 또다른 6세대 기수 지아장케가 <소무>나 <플랫폼>에서 구질구질한 중국의 황톳길들과 먼지가 더께더께 앉은 중국의 시골풍경에서 자본주의에 밀려가는 쓸쓸한 얼굴들을 담아낼 때, 로우예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상하이라는 도시 이야기에서 허망한 사랑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6세대는 저마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지금 여기의 중국에 대한 발언을 열중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로우예의 가슴은 상하이에 속해 있는 듯하다. 그곳은 다른 어떤 감독과도 다른 로우예의 영화적 공간이다. 장이모가 <상하이 트라이 앵글>에서 허우샤오시엔이 <해상화>에서 탐미적이고 복고풍인 상하이를 그려낼 때, 그는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는 자본주의적인 공간 상하이에서 중국의 젊은이들의 삶에 눈을 돌린다. 실제로도 아가씨들이 인어 복장을 하고 수족관에 들어가 수중 쇼를 하는 상하이의 밤은 그렇게 넒고도 깊다.
<수쥬>에는 서양적인 영화 화법과 서양 신화에 항체 항원반응 하나없이, 중국의 현실에 순순히 뒤섞이는 타자들의 이물로 가득하다. 이런 <수쥬>를 보고 있노라면, 미국의 새로운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새로운 영화적 실험으로 아비들의 목을 쳤던 누벨바그의 기운마저 느껴지진다. 6세대의 중국은 지금 서양과 동양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뒤섞인 혼탁하고도 종잡을 수 없는 모호한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영화적으로 통이 큰 6세대들은 중국의 모호함 그 자체마저도 포용하려 드는 것 같다. 미국이 자본주의의 경쟁국가로 삼은 21세기의 중국. 물론 저 대륙에서 곧 또다른 7세대 감독들이 나타나는 것은 왠지 시간 문제인 것만 같지 않은가.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