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제작진한테서 연락을 받은 건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청계천 세운상가의 한 건물 옥상에서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밤새 내리던 비는 잠시 소강상태였다. 7월의 폭염 아래서 숨 돌릴 틈 없이 촬영을 진행했으니 잠깐의 휴식이 절실할 테지만, 제작진은 한컷이라도 더 건져올리기 위한 수고를 감내키로 한 모양이다. 개봉을 올해 11월 말로 못박아뒀으니, 오락가락 장대비를 핑계삼아 여유 부릴 처지도 아니다. 모성진 프로듀서는 “지난달엔 하늘이 도와줬는데 이달 들어 앙갚음당하고 있다”고 한다. 광주에서 촬영을 진행하다 비가 와서 피신 왔는데 서울 하늘도 말썽이니 스탭들의 애간장이 탈 법도 하다.
청계천 일대에서 미진(한혜진)이 취객에게 돈을 건네는 장면의 촬영을 끝낸 스탭들이 옥상 한쪽에 카메라 두대를 세우느라 부산히 움직인다. 짱구 노인(김기천)에게 개조해달라고 부탁한 총을 미진이 돌려받고 확인하는 장면을 동시에 나눠 찍을 모양이다. “주말까지 찍으면 벌써 40%야.” 청어람 최용배 대표의 말은 어느새 5부 능선이 보인다는 제작자들의 흔한 자족은 아니다. 4개월 전, 소셜 펀딩 방식으로 <26년>의 불씨를 되살리겠다 했을 때 그는 결연했으나 불안했다(<씨네21> 848호 ‘씨네인터뷰’). <26년>이라는 크레딧이 뜨기 전에 쓰일 맨 앞머리 장면 촬영을 앞두고, 최 대표는 지난 4년의 분루(憤淚)를 곱씹고 있는지도 모른다.
올 11월 개봉 앞두고 촬영 40% 진행
<26년>은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을 다루되, 현재 시점에서 비극의 역사를 단죄하는 복수극이다. 잘 알려졌듯이, 조직폭력배 진배(진구), 사격 선수 미진, 경찰 정혁(임슬옹) 등은 학살의 주범인 ‘그 사람’을 처단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한다. 정태춘의 노래 <5·18>을 빌려 설명하자면,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광주의 아들과 딸들이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을 회수하기 위해 총을 드는 이야기다. “전두환 죽이는 영화 찍는다고 했더니 확실하게 죽이라고 하시던대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조근현 감독은 얼마 전 광주 촬영 때 들었다는 한 시민의 말을 슬쩍 흘린다.
“처음엔 어떻게 드나 싶었는데 이젠 가벼워요.” 트레이닝복 차림의 한혜진이 들고 있는 총은 총열만 2kg이 다 되고, 한 자루의 무게는 5kg이 넘는다. M16과 같은 실제 총과 비교해도 곱절 가까이 무겁다. 사격코치한테서 “총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유연하다는 칭찬을 들었다”는 한혜진은 “나중엔 더 무거운 총을 들어야 한다”면서 이쯤은 문제없다고 덧붙인다. 사실, 무거운 총보다 버거운 건 따로 있다.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었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26년>의 인물들은 감정을 숨기고 감춰요. ‘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쟤 마음은 어떤 건가’ 궁금하게 만들죠. 그러다 보니 표정 하나를 보여줄 때도 쉽지가 않아요.”
“유효사격거리 100m 이상은 나오는 거죠?”라는 대사를 치면서 총을 견착하는 포즈의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몇 차례 테이크가 반복된다. 기술적인 문제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괜찮았어!” “아까 건 별로였던 것 같아요.” “이번 게 좋아?” 조근현 감독과 한혜진은 거사를 앞두고 밀담을 나누는 극중 인물처럼 소곤소곤 들릴 듯 말 듯한 말투로 미묘한 대사 톤을 조율 중이다. 원작에선 1980년 당시의 상황과 인물들의 개인사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지만, 영화는 분노를 먹고 자란 인물들의 현재에 더욱 집중한다. “인물들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 전체 상황과 액션에서 묻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조근현 감독의 주문이었다.”(김태경 촬영감독)
“감독님이 시원하게 오케이 주시면 기분 좋죠.” 한혜진은 “캐릭터들이 무겁게 처지지 않도록 재밌는 요소들을 살려주는” 조근현(아래 왼쪽) 감독을 향해 무한신뢰를 보냈다.
분노를 먹고 자란 광주의 아들과 딸들의 복수극
김태경 촬영감독의 전언은 <26년>이 겨냥하는 표적을 정확히 일러준다. <26년>은 26년 전의 과거를 되풀이해서 재연하지 않는다. 대신, <26년>은 26년 전의 과거를 어떻게 환기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아마도 그건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 이 특정한 누군가에게만 국한된 사건으로 치부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칙이 원작의 방향과 위배되는 것 같지도 않다.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 “현재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애초 드라마로 기획했으나 무산됐던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내면서 강풀 작가가 세워둔 공감의 원칙은 액션스릴러라는 대중적인 장르의 화법을 더욱 강조한 영화 <26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몇 차례. 오후 3시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던 청계천 촬영이 다소 지체됐다. 제작진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미진의 신을 마무리하는 컷 촬영에 들어간다. 미진이 압축기를 연결한 총을 들고 남산타워를 향해 사격 자세를 취한다. 한쪽 눈을 감은 그녀의 조준경에 먼 하늘의 애드벌룬이 잡힌다. 두개의 애드벌룬이 동시에 겹칠 때 그녀의 총구가 불을 뿜는다. 탕! 콘티에 그려진 것처럼 과녁은 보이지 않았다.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 누구나 다 아는 ‘그 사람’ 역시 아직 죽지 않았다. 영화는 결말을 숨기고 있다. 미진은 주차타워 대신 어디에서 ‘그 사람’을 저격할까. 통렬한 상상과 마주하기까진 조금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 <26년>의 순제작비는 46억원. 기관투자자가 대부분인 상업영화와 달리 개인투자자들이 나서 30억원의 제작비를 마련했다. 영화 홈페이지(26years.co.kr)에선 ‘제작 두레’라는 이름으로 제작비 모금이 진행 중이다. 참여 관객은 8월23일 현재 9274명. 1만명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모금 누적액은 4억4017만원이다.
극단적 상징으로 공간과 인물에 접근
조근현 감독은 미술감독 출신이다(<씨네21> 859호 ‘씨네인터뷰’). <형사 Duelist> <음란서생> <고고70> <마이웨이> <후궁: 제왕의 첩> 등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을 맡았다. <26년>은 그의 연출 데뷔작. 청어람 최용배 대표는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뛰어나다. 20억원이 줄어든 예산 안에서 비주얼에 대한 훼손 없이 시나리오 수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조근현 감독의 공이다”라고 말한다. <26년>(당시엔 <29년>)의 미술감독으로 참여했던 그는 제작이 난항을 겪는 동안에도 시나리오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쨌거나 가장 궁금한 건 <26년>의 비주얼 컨셉이다. 조근현 감독은 웹툰을 영화화하면서 어떤 시각적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적인 재현보다 극단적인 상징이다.” <장화, 홍련>부터 <형사 Duelist>까지 조근현 감독의 미술팀에서 일했던 김시용 미술감독은 “모호한 고증보다는 심리적인 충격으로 공간과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영화는 웹툰처럼 많은 인물의 사연을 정해진 시간 안에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인물들 역시 강한 콘트라스트를 사용해 묘사하고 있다.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액션이 이뤄질 ‘그 사람’의 집 역시 웹툰과 달리 여러 가지 의미로 활용되는데, 인물들의 복합적인 감정이 상징적으로 반영된 구조물로 꾸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