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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을 자각하는 과정 <훌리오와 에밀리아>

<훌리오와 에밀리아>의 원제는 ‘분재’라는 뜻을 갖고 있다. 작은 화분에 옮겨진 고풍스러운 수목을 가리키는 그 분재가 맞다. 훌리오(디에고 노구에라)는 유명 작가의 원고 타이핑 작업을 의뢰받지만 계약은 곧 무산되고, 그는 애인에게 이 사실을 숨기려다 직접 소설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그 소설의 제목이 바로 ‘분재’다. 한 남자가 첫사랑의 부음을 듣게 된다는 애초의 설정을 이어가기 위해, 훌리오는 자신의 첫사랑 에밀리아(나탈리아 갈가니)에 관한 기억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에밀리아에게 주었던 작은 화분을 떠올릴 때 즈음, 현실의 애인은 떠나고 훌리오는 분재를 배우기 시작한다.

줄기와 가지가 정교하게 엮인 작은 분재처럼,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소박한 이야기 틀 속에 미묘한 교차점을 담고, 마모된 시간을 복기해나간다. 프롤로그를 제외한 총 6개의 챕터에서, 영화는 첫사랑이 시작된 8년 전 학창 시절과 아르바이트에 의존하며 작가지망생으로 살아가는 훌리오의 현재를 오간다. 그러나 첫사랑의 회한에 중점을 둔 여느 작품과 달리, <훌리오와 에밀리아>의 현재는 과거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한 대조항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의 만남과 헤어짐은 항상 현재의 그것과 나란히 진행되며, 때로 현재의 분별은 과거의 불발된 열정보다 더 쓸쓸한 잔상을 남긴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첫사랑’에 관한 영화라기보다, 만남과 헤어짐의 그물망 속에서 사실상 오래전부터 그저 혼자일 따름이었던 한 남자가 외로움을 자각하는 과정을 그린 한편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다.

노트 위를 바지런히 오가던 손이 노송을 다듬는 꼼꼼한 손놀림으로 변화하듯이, 영화에서 분재는 글쓰기 작업 자체를 암시하는 상징물로 쓰인다. 영화가 동명의 중편소설을 각색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분재는 예술에 대한 자기반영적 고민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분재와 예술의 연결고리는 단절과 인공성이다. 물론 분재의 인공미란 나무의 수난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이 분재라는 메타포는 다소 감상적이며 편의적인 선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훌리오의 표현대로 화분 밖의 나무는 이미 분재가 아니며, 정교하게 다듬어진 분재는 자연과의 인위적인 분리를 통해서만 역설적으로 초시간성을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허구를 세공하려는 노력은 때로 사소한 사물에 이들을 스쳐간 시간을 결집시키는 마법을 부린다. 그것은 훌리오가 과거의 첫사랑과 이제 과거형이 되어버린 현재의 사랑을 애도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시간을 향해 친밀히 가지를 뻗고 있다.

그에 비한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프루스트의 소설과 유사 모티브들은 정작 프루스트의 작품세계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그 언저리 어딘가를 맴돌 뿐이다. 이는 <훌리오와 에밀리아>가 프루스트를 어떻게 읽었는지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어떻게 제대로 읽을 수 없었는지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프루스트를 읽어본 적이 있다는 거짓말에서 시작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구절로 끝나는 이 영화는, 언제나 문학작품에 대해 떠벌리고 매일같이 섹스를 하면서도 그저 책 언저리와 사랑하는 사람 곁을 공감없이 배회할 뿐이던 서글픈 청년기에 관한 영화다. 그렇기 때문에 훌리오가 맞닥뜨리는 코믹한 해프닝에 낄낄대다가도, 시종일관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 위로 마침내 눈물이 흐를 때는 발랄한 감수성을 주저앉히는 감정의 무게에 가슴 한쪽이 묵직해진다. 주연배우들의 연기도 영화의 차분한 호흡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칠레의 신예 크리스티안 히메네즈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로 2011년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상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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