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브룩하이머- 리들리 스콧 콤비의 전쟁스펙터클 <블랙 호크 다운>은 폭풍 같은 영화다. 초반 20분을 지나 전투가 시작되면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기 직전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액션시퀀스들이 교향곡의 피날레처럼 이어진다. “일단 총알이 머리를 스쳐가면, 정치니 뭐니 그런 쓰레기들은 저 유리창 밖으로 내동댕이처져 버린다구.” 영화 속 대사는 <블랙 호크 다운>이 점령하려는 고지가 어디인지 보여준다.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아프리카의 낯선 도시에서 그들은 오직 나와 내 동료의 생명을 지키고자 불가능한 용기를 낸다. 93년 소말리아의 수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15시간의 전쟁기록인 <블랙 호크 다운>은 ‘현대전투의 해부’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을 영화다. 감독 리들리 스콧은 솜씨좋은 외과의사처럼 날카로운 메스로 전쟁의 피부를 벗겨내 현대전의 단면을 하나씩 들어내보인다. 얇지만 정교하고 연약하지만 깔끔하게 절개된 단면들은 전장의 포연 속에서도 여린 감성의 신경세포들을 놓치지 않는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은 불가피하겠지만 <블랙 호크 다운>은 리들리 스콧의 진정한 재기작이며 98년 <씬 레드 라인>과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이은 전쟁영화의 새로운 걸작이다.
정치학적 분석보다 사실 채록에 충실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9·11 테러사건이 불을 지핀 미국의 애국주의 물결에 휩쓸려 개봉시기를 앞당겼지만 같은 제작자가 만든 <진주만>이나 최근 개봉한 <에너미 라인스>와 뿌리가 다른 작품이다. 93년 10월3일 실제 있었던 모가디슈 전투는 베트남전 이후 미군이 겪은 최대의 수모로 알려져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소말리아인을 돕기 위해 배포한 식량을 무기삼아 내전을 지속중인 군벌 아이디드를 제거하기 위해 이뤄진 10월3일 작전의 목표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건물에서 아이디드의 각료 두 사람을 납치하는 것이었다. 미군들은 평소 연습하던 것처럼 손쉽게 1시간 안에 임무를 마칠 것이라 예상, 물통에 물도 채우지 않고 야간투시경 같은 장비도 버려두고 헬기에 올랐다. 그러나 늦어도 1시간 안에 끝날 예정이던 작전은 헬기가 격추되면서 꼬이기 시작한다.그들은 15시간 동안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날 작전에 나갔던 미군의 최정예 특수부대인 델타포스와 특공대 대원 가운데 19명이 사망했고 600만달러짜리 병력수송용 헬리콥터인 블랙호크 2대가 추락(down)했으며 소말리아인도 1천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당시 <CNN>은 전투가 끝난 다음날 성난 소말리아인들이 미군 시체를 난자해 끌고다니는 모습과 인질로 잡힌 미군 헬기조종사의 모습을 방송했고, 워싱턴과 클린턴 행정부는 기겁을 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주둔하던 군대를 철수시켰고 이후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벌어진 학살극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경찰로 자임했던 미국이 180도 정책을 전환한 것이다.
영화는 패전의 기로가 된 10월3일의 전투를 고스란히 재현하면서 모호한 정치적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영화의 원작인 마이크 보우든의 논픽션 <블랙 호크 다운>(청아출판사 출간)에서 빌려온 시각으로 전쟁의 기원이나 정치학의 문제를 제쳐두고 일단 그날 있었던 일부터 빠짐없이 채록하는 자세이다. 20년간 <필라델리아 인콰이어러>의 기자였던 보우든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모가디슈 전투가 끝난 지 3년 뒤인 96년이었지만 그는 10월3일 전투에 관한 자세한 보고서를 접할 수 없었다. 워싱턴이나 군관계자들도 그들의 경력에 오점이 될 가능성이 큰 모가디슈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리는 분위기였다. 그는 고고학 유물을 발굴하는 사람의 심정으로 참전용사들을 만나 인터뷰했고 그날 현장에 있던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을 적었다. 전투 당시 상황을 정확히 묘사한다는 보우든의 원칙으로 영화의 큰 줄기를 세운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베트남전 이후 할리우드의 전쟁영화는 번번이 정치적인 올바름이라는 암초에 걸려 보기 민망한 모양새가 되곤 했지만 보우든의 책은 돌파구를 여는 키워드를 담고 있었다. 전투에 대한 정밀한 묘사로 이 책은 전쟁사 분야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배경에 머물렀던 전장의 스펙터클이 화폭 전체에 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모로코에 재현된 모가디슈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한 일이지만 처음에 보우든의 책을 탐낸 감독은 사이먼 웨스트였다. <툼레이더>를 연출하기로 하면서 <블랙 호크 다운>의 공동제작자로 한발 물러섰지만 그는 브룩하이머에게 책의 판권을 사라고 권했다. 98년 1월 보우든은 브룩하이머를 만났다. <LA타임스>에 쓴 글에서 보우든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물론 그를 알고 있었다. 그는 <탑건>이나 <더 록>처럼 만화 같고 시끄럽고 스펙터클한 박스오피스 히트작을 때마다 내놓는 흥행사였다.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했던 나는 그런 영화들을 즐겼지만 내가 쓴 책 <블랙 호크 다운>은 브룩하이머의 영화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엄청난 소음과 폭력과 혼란이 묘사되고 있지만 내 책은 심각하고 어두운 이야기였다.” 얼핏 제작자의 면모가 책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브룩하이머는 열정적이었고 보우든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해주기를 부탁했다. 보우든은 <블랙 호크 다운>의 첫 번째 시나리오를 썼고 젊은 작가 켄 놀런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쉰들러 리스트>로 오스카를 받은 스티브 잘리언, <포레스트 검프>의 에릭 로스 등이 시나리오 수정작업에 투입됐으며 <블랙 호크 다운>에서 개리슨 장군으로 출연하는 극작가 겸 배우 샘 셰퍼드는 자기 대사를 직접 손봤다. 리들리 스콧이 연출자로 결정된 것은 2000년에 이르러서다. 스콧은 촬영지로 <글래디에이터>를 찍었던 모로코를 택했다. 모로코의 라밧시 근교에 전쟁의 무대가 될 세트가 세워졌고 촬영준비는 군사작전처럼 이뤄졌다. 스콧은 이 영화를 컴퓨터그래픽으로 덧칠하고 싶지 않았다. <보스턴 글로브>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블루스크린은 아주 효율적이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블루스크린에서 찍어서 컴퓨터로 합성하는 방식은 이런 이야기에서 정말 필요한, 위기에 처한 순간의 감각을 지워버린다. 땅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로켓포가 터지고 하는 모든 장면을 진짜로 느껴져야 한다.” 완벽한 수공업적 특수효과를 위해 이 영화에는 진짜 헬기와 특공대원들이 동원됐다. 4대의 블랙호크 헬기와 4대의 리틀버드 헬기, 항공대 소속 조종사들과 100명 이상의 특공대원들이 2대의 수송기에 실려 모로코에 도착했다. 물론 제작진은 92일간 촬영을 조건으로 미 국무부와 국방부, 모로코 외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9천만달러의 제작비 가운데 220만달러가 이들의 수송, 정비, 숙식을 위해 국방부에 지불했던 돈. 배우들도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특공연대와 특전사를 거쳐 항공여단에서 헬기레펠 훈련까지 이수했고 촬영장에서도 두명의 현직 교관이 배우들을 진짜 특수부대원처럼 보이도록 지도했다. 최대한 실제 상황에 가깝게 연출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셈이다.
<블랙 호크 다운>이 보여주는 전투의 사실성은 그자체로 탁월하지만 거기 그쳤다면 영화는 범작에 머물렀을 것이다. 이런 복잡하고 까다로운 액션시퀀스를 조율하는 데는 군사작전 못지않은 확고하고 빈틈없는 연출계획이 필수적이다. 영화 초반에 유엔이 배포한 식량을 얻으려는 민간인들에게 소말리아 군벌 아이디드의 부하들이 총격을 가하며 강탈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군들은 무장헬기를 탄 채 상공에서 현장을 목격하지만 어떤 조취도 취할 수 없다. 적이 사격하지 않는 한 사격할 수 없다는 교전수칙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스콧은 원작의 메시지를 툭 던져놓고 시작한다. “이런 야만적 행위를 봤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개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영화는 질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하지만 답을 내놓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스콧은 곧장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일단 개입했다면 대체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2시간20분에 달하는 상영시간 가운데 2시간은 바로 이런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에 바쳐진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에도 관객은 해답없는 똑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모가디슈에서 실패로 돌아간 군사작전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아이디드가 오사마 빈 라덴으로 바뀐, 8년 시차를 둔 두 사태에는 흥미로운 역사적 아이러니가 겹쳐진다. 모가디슈에서 미군을 15시간의 생지옥에 몰아넣은 시발점은 블랙호크 헬기의 격추였다. 소말리아인들은 RPG라 불리는 휴대용 로켓포로 블랙호크 헬기를 떨어뜨렸는데 그들이 RPG 사용기술을 배운 것은 라덴의 조직 알카에다였고 그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이 소련군과 싸울 때 미국에서 RPG를 지원받아 헬기 격추기술을 배웠다. 미국이 가르친 전투기술이 부메랑이 되어 미국에 엄청난 치욕을 안긴 것이다. 꼼꼼히 따져볼수록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블랙 호크 다운>은 할리우드영화의 유서깊은 장기를 상기시킨다. ‘할리우드영화는 질문에 답하는 능력보다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블랙호크 다운”, 저주의 주문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블랙호크 다운”이다. 꼬리날개에 로켓탄을 맞고 제자리를 빙빙 돌다 고꾸라지는 블랙호크 헬기의 격추장면은 사람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불운의 무시무시한 형상을 보여주는 강력한 이미지이다. “블랙호크 다운, 블랙호크 다운”이라는 말이 무전기를 통해 저주의 주문처럼 울려퍼지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헬기가 격추되자 미군들은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는데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한 싸움은 곧 십여명의 사상자로 귀결된다. 두 번째 헬기가 떨어질 때는 그야말로 아찔하다. 또 얼마나 많은 피와 살점이 모가디슈 거리를 메울 것인가? 이 모든 상황이 생중계되는 작전통제실은 관객의 시점을 객관적인 거리로 끌어낸다. 자, 사태가 이런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콧은 군사작전의 대가처럼 전투현장의 시점과 통제실의 시점을 교차시키며 파국으로 치닫는 사태를 무기력하게 지켜보게 만든다. 하반신이 떨어져나가고 동맥이 끊어지고 로켓탄이 배에 박히는 끔찍한 전쟁의 사상자들이 속출하지만 벌통을 건드린 듯한 모가디슈의 시가전은 수습불능 상태로 치닫는다. 동심원을 그리며 모래바람을 일으키는 헬기 프로펠러처럼 영화는 정치적 오판에서 비롯됐을 군사작전의 불행한 결과를 사방에 흩뿌려놓는다. 고립된 군인들은 오직 살기 위해 끝없이 밀려드는 적을 향해 총을 쏘고 총성이 파고를 높일수록 군중의 분노도 거세진다. ‘탁월한 비주얼리스트’라는 명성에 걸맞게 스콧은 개별 전투와 전체 상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한편 격정과 고요가 교차하는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낸다. 지미 헨드릭스의 <Voodoo Chile>이 울려퍼지면서 시작되는 헬기 출격장면은 록비트의 음악에서 정적으로 돌변하고 다시 ‘끼이익’거리는 불길한 소음으로 바뀐다. 군인들의 발 아래 물거품이 이는 아프리카의 푸른 바다가 있고 한줄로 늘어선 헬기들이 자태를 뽐내는 이 대목은 <지옥의 묵시록>에서 바그너의 아리아를 틀어놓고 공습하던 장면에 맞먹는다. 광기로 가득 찬 <지옥의 묵시록>의 헬기장면처럼 <블랙 호크 다운>의 헬기 출격장면은 경쾌하게 시작해 불안과 혼돈으로 이어지는 영화 전체의 맥락을 대변한다.
찬반양론 팽배
미국에선 1월18일, 국내엔 2월1일 전국 개봉예정인 <블랙 호크 다운>은 미국에서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선 영화이기도 하다. 로저 에버트는 2001년의 영화 베스트 2위로 이 영화를 꼽았으며 <뉴욕커>의 데이비드 덴비는 “사실성, 절제, 단호함, 전복성 등 모든 측면에서 전쟁에 대한 이상적인 균형을 보여준다”고 말했지만 <뉴욕타임스>의 엘비스 미첼은 “리들리 스콧의 전작 <지 아이 제인> 같다. 이번엔 남자들만 캐스팅한 게 다르다”고 혹평했다. <블랙 호크 다운>에 대한 비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영화가 옛 서부극의 도식을 되풀이한다는 지적이다. <데일리 텔리그라프>의 미란다 카터는 <블랙 호크 다운>이 인디언과 싸우는 기병대영화의 전통에 입각해 있다고 말한다. 소말리아인을 인디언으로, 미군 특수부대를 기병대로 바뀌놓으면 헬기 소음마저 제7기병대의 나팔소리처럼 들릴지 모른다. <블랙 호크 다운>에 묘사된 미군들의 영웅적 활약상은 이런 비판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동료를 구하러 뛰어든다. “우리편을 적진에 버려두지 않는다”는 특공대의 신조가 사지로 뛰어드는 용기로 변할 때 가슴이 저며오는 걸 피할 수 없다. 분명 <블랙 호크 다운>은 소말리아인의 시점과 거리가 먼 영화이다. 식량을 나눠주기 위해 왔다는 미군들에게 소말리아인들이 왜 총을 쏘며 분노하는지가 드러나지 않으며, 작전당일 수없이 희생된 소말리아 민간인들이 축소되어 보여진다(보우든의 책에는 이런 부분이 들어 있다). <프리미어>에서 제작자 브룩하이머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전쟁을 객관적인 시점으로 본 게 아니다. 바로 미국의 눈으로 본 것이다. 그런 끔찍한 일을 겪어낸 우리 군인들의 눈으로.” <블랙 호크 다운>이 어쩔수 없이 갖는 한계를 스스로 규정하는 말이지만 여기엔 영화역사가인 케빈 브라운로우의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아무도 역사를 배우기 위해 서부극을 보지는 않는다.”
<블랙 호크 다운>의 저자 보우든은 책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전투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을 초월한다. 그것이 트로이전쟁이건, 남북전쟁의 게티스버그 전투이건, 2차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건, 베트남전쟁 때의 이아 드랑 전투이건 마찬가지이다. 전투 이야기는 병사들의 이야기이다. 그들 대부분은 죽음에 맞서 싸우도록 내몰린 젊은이들이다. 전쟁의 극단적이고 잔혹한 속성에는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다.” 아마 전쟁영화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은 우리가 왜 그 끔찍하고 잔혹한 전장의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기는지를 어마어마한 리얼리티의 마력으로 입증하는 작품이다. 남동철 namdong@hani.co.kr ▶ <블랙 호크 다운>, 전쟁영화의 새로운 걸작이 탄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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