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의 관객이 7만명을 넘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성과였다. 개봉도 어려워 십시일반 지인들이 서포터스를 만든 영화였다. 상황이 역전될 수 있었던 결정적 원동력은 <두 개의 문>이 단순히 작품 안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산참사 진상 규명, 구속된 철거민 석방 운동 등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낸 건 이 다큐멘터리가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였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은 EBS국제다큐영화제는 어쩌면 최근 <두 개의 문>이 일으킨 사회적 파장의 맥을 잇는 다양한 보고서다. ‘다큐, 세상을 움직이다(Play the world)’라는 이번 영화제의 주제는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향해 던질 수 있는 메시지와 그 파장에 대한 집중 조명이다. 미국의 학교폭력(<불리>)과 중국 정부의 인터넷 검열(<첨단기술, 하류 인생>), 위험을 무릅쓴 몰도바 여성 3인의 해외 불법체류기(<엄마는 불법체류자>) 등 당면한 사회적 이슈들이 각각의 다큐멘터리로 다뤄진다. 31개국 48편의 다큐멘터리가 고민하는 지점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전반에 걸쳐 있다. 각 작품이 가지는 형식, 기법, 완성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큐멘터리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는 건 결국, 우리가 이 문제에 응답할 것이냐의 실천적 문제로 귀결된다. 8월17일(금)부터 24일(금)까지 8일간 EBS 채널에서 정규 방송을 접고 일일 평균 7시간 이상 편성하는 영화제의 ‘통 큰’ 서비스가 관객을 기다리고 있으며, EBS SPACE, 아트하우스 모모, 용산아트홀 대극장 미르, 서울역사박물관, 인디스페이스에서도 관람할 수 있다.
불리 Bully 감독 리 허시 / 미국 / 2011년 / 98분 스쿨버스의 노란색은 너무 희망적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을 알고 본다면? <불리>의 한 소년은 같은 학교 친구로부터 스쿨버스에서 목졸림을 당하고 “칼로 얼굴을 그어버릴 거야”라는 무시무시한 폭언까지 듣는다. <불리>는 미국 전역의 학교에서 무려 1300만명의 청소년이 겪고 있는 왕따문제를 추적한다. 어릴 때 직접 왕따 경험을 했다는 리 허시 감독은 “왕따문제의 폭력성은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 힘들다. 봐야 안다”며 다큐멘터리에 착수했다고 한다. 영화는 왕따로 아이를 잃은 부모, 현실적으로 해결책을 도출하지 못하는 교사, 책임에 소홀한 교육행정 공무원들의 입장을 덤덤히 기록한다. 그리고 마침내 희생자의 고통을 통해 폭력의 제공자에게 공감을 끌어낸다. 올 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과 연계해 리 허시 감독이 참석하는 ‘<불리>를 통해 본 학교폭력 문제와 미디어의 역할’을 주제로 한 컨퍼런스(8월20일, 서울역사박물관)도 마련되어 있다.
실낙원3: 연옥 Paradise Lost3: Purgatory 감독 조 벌링거, 브루스 시노프스키 / 미국 / 2011년 / 121분 1993년 웨스트 멤피스. 8살 소년 3명이 살해됐고, 10대 청소년 3명이 살해 혐의로 구속됐다. 2명은 익사했고 1명은 성기가 절단된 채 과다출혈로 죽은 일명 ‘웨스트 멤피스 3인조 사건’은 희대의 살인사건으로 기억된다. <실낙원3: 연옥>은 단순히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다. 시리즈의 중 첫 번째인 <실낙원: 로빈후드 힐의 아동 살해자>(1996)로, 그 뒤 <실낙원2: 폭로>(2000)로, 또 완결편이 만들어지는 동안 조 벌링거와 브루스 시노프스키 감독은 제대로 된 증언이나 증거 없이 18년간 감옥에 복역된 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기까지 세 용의자의 구명과정을 조명한다. 감독은 이 충실한 기록이 결국 진실을 향해 다가가는 폭로의 기능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해낸다. (극장 상영작)
푸틴의 키스 Putin's Kiss 감독 리즈 비어크 페더슨 / 덴마크 / 2011년 / 86분 <푸틴의 키스>가 쫓는 것은 한 여성이다. 19살 때 푸틴에게 공개 키스를 한 여성 마샤는 곧 러시아 청년우익단체 ‘나쉬’(NASHI)의 대변인이 되었다. 영화는 열렬한 푸틴 지지자 마샤가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버리게 되는지에 관한 드라마틱한 보고서다. 푸틴에 대한 열성의 보답으로 차와 아파트, TV쇼 진행자라는 명예를 얻었던 그녀는 이제 푸틴이 정권 유지를 위해 정치적 탄압을 해온 실체를 깨닫게 된다. 마샤의 변화 뒤에는 한때 그녀를 이끌었던 나쉬의 리더 바실리를 대신해, 반정부 활동을 하다 괴한에게 습격당한 저널리스트 올레그 카신이 있었다. 영화의 말미 마샤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드러낸다. <푸틴의 키스>의 진짜 이야기는 그러니까, ‘푸틴 없는 러시아!’라는 구호를 증명하기 위한 아주 구체적인 예다. 개인의 문제로 출발해 이데올로기라는 거창한 이슈에 다가선다.
LP 마니아 Vinylmania 감독 파올로 캄파나 /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 2011년 / 76분 당신이 LP마니아라면, <LP 마니아>를 놓치지 마라. 눈 씻고 찾아봐도 보기 힘든 희귀 LP판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당신의 눈을 즐겁게 할 테니 말이다. 3천개 이상의 LP를 수집한 LP마니아인 감독 파올로 캄파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걸 깨달은 감독은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게 뻔한 LP 수집광들을 비롯해 LP로만 디제잉을 고집하는 DJ들을 찾아 나선다. 불편하고 스크래치도 심한 LP를 두고 DJ 프로듀서는 “LP보다 더 좋은 음은 없다”고 말하고, 일본의 레코드 제조사 사장은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자연스러워서 좋다”며 아날로그 예찬을 한다. 침대를 벽에 세워둘 정도로 LP를 모은 남자, LP가 자신의 아내와 같다고 말하는 남자. 타인의 취향에 대한 흥미로운 보고서다.
포토그래픽 메모리 Photographic Memory 감독 로스 매켈위 / 미국, 프랑스 / 2011년 / 84분 어느 하나 거창한 건 없다. 그러니까 이건 아버지로서 감독과 자신의 아들의 문제처럼 보인다. 페이스북, 이메일로 친구들과 24시간 소통하는 아들이지만, 그 관계망에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매사 반항적인 아들을 보며 로스 매켈위는 역시 자신의 아버지에게 냉소적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려본다. 매켈위는 자신이 한때 사진 작업을 했던 브르타뉴 지방으로 향하고 소설을 쓰고 스케이트를 타고, 영상 작업을 하는 요즘 세대인 아들의 작업을 교차편집한다. 직접 전개하는 회고조의 내레이션으로 담아낸 ‘나와 아들’이라는 개인적인 기록에는 결국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한 사고, 사진과 영화의 관계까지 뻗어나간다. 매켈위는 자신, 주변의 소소한 일상을 소재로 1인칭 시네마베리테 스타일을 확립해왔다. 이번 영화제에는 <위대한 잎사귀>와 <여섯시 뉴스> <셔먼의 행진>을 상영하는 로스 매켈위 특별전을 비롯해 마스터클래스(8월21일, EBS SPACE)를 진행한다.
성모마리아, 콥트교도 그리고 나 The Virgin, the Copts and Me 감독 나미르 압델 메세흐 / 프랑스, 카타르 / 2012년 / 87분 세상에 콥트교도는 많고도 많을 거다. 그런데 내 엄마가 콥트교도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집트계 프랑스인 감독 나미르 압델 메세흐는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콥트교도인 엄마의 맹목적 신앙의 실체를 파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콥트기독교공동체에서 일어난 성모마리아의 현현 기적을 조사하기 위해 카이로로 향한다. 의도와 달리 애초 목적한 성모마리아의 존재를 입증하긴커녕, 촬영 중 감독은 제작비가 모자라 엄마에게 손을 벌리기까지 한다. 특히 감독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모마리아의 연출 컷을 찍는 마지막 결론은 일단의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극영화처럼 시나리오대로 찍을 수 없는 다큐멘터리의 고충이자 매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지구 반대편의 초상 ¡Vivan las Antipodas! 감독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 독일,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칠레 / 2011년 / 104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생각한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면, 머리를 거꾸로 하고 걸어다니는 사람들과 만날지도 모른다고. 무슨 동화 같은 소리냐고.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감독은 판타스틱한 동화적 상상을 가장 사실적인 다큐멘터리의 형식에 담아내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했다. 스페인의 정확한 대척점 뉴질랜드, 아르헨티나의 대척점인 중국, 러시아의 대척점 칠레 등,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두곳을 직선으로 연결한 뒤 그 지역을 직접 찾아나선 거다. 일정한 스토리도, 대사의 맥락도 없다. 파편적으로 짜깁기된 지구촌 곳곳은 이야기보다는 비주얼로, 등장인물보단 풍경과 자연의 경이로운 화면으로 등장한다. 보편적인 시각, 관점을 뒤집어보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가 카메라워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브릿과 잉거 Women with Cows 감독 피터 게르디하그 / 스웨덴 / 2011년 / 93분 <워낭소리>의 스웨덴 버전이라고 봐도 좋다. 소를 키우는 문제에 대한 두 늙은 자매의 의견대립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79살의 언니 브릿이 자신이 일생을 바친 소 키우기를 놓지 않는 데 반해 동생 잉거는 그 모습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잉거는 매번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브릿의 소 키우기를 돕는다. 자매의 현재와 함께 유년기를 함께 보냈던 추억, 결혼하고 나서의 스토리, 살아가면서 겪은 아픔 같은 것들이 스틸 사진과 홈비디오 화면으로 편집된다. 스웨덴의 목가적인 풍경과 어우러진 브릿과 잉거 자매의 노년은 이렇게 큰 사건없이 소박하며, 둘 사이의 끈끈한 유대를 느끼게 해준다. 이제 늙어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느린 걸음의 브릿, 소의 움직임을 닮은 그녀의 잔상이 정서적 울림을 안겨주는 슬로우 다큐멘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