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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 윈슬럿] 난 멈추지 않는다
김도훈 2012-08-20

<대학살의 신>의 케이트 윈슬럿

연기를 꿈꾸는 초보 배우에게 <대학살의 신>은 훌륭한 가르침의 장이다. 동시에, 이 영화는 초보 연기자의 꿈을 짓밟는 대학살극일 수도 있다. 조디 포스터, 크리스토프 왈츠, 존 C. 라일리와 케이트 윈슬럿이 물을 만난 고기처럼, 불을 만난 나방처럼 노는 모습을 한번 지켜보시라. 만약 당신이 조금 자존감이 낮은 초보 배우라면, 이 미친 연기자들의 발끝에라도 미치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좌절감에 쉬이 빠져들지도 모른다. 특히 케이트 윈슬럿은, 맙소사. 이 멋진 여배우는 정말로 우리 시대의 메릴 스트립이 되어가고 있다. 겨우 몇년 전만 해도 그녀는 “메릴 스트립과 함께 언급되는 여배우가 됐다는 사실은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제 삶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죠”라고 말하던 배우였다. 지금은? 누군가가 오스카 연단에 올라 “케이트 윈슬럿과 같은 부문에 후보로 오르다니, 영광스러워요”라고 말해도 우리는 금세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이트 윈슬럿의 신작 <대학살의 신>은 교양의 대학살이다. 11살짜리 꼬맹이 재커리는 막대기를 휘둘러 다른 꼬맹이 이턴의 이를 부러뜨린다. 아이들 싸움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재커리의 부모인 낸시(케이트 윈슬럿)와 앨런(크리스토프 왈츠)가 이턴의 부모 페넬로피(조디 포스터)와 마이클(존 C. 라일리)가 사는 브루클린의 아파트를 방문한다. 낸시는 투자상담가고 앨런은 제약회사 변호사다. 페넬로피는 다르푸르 분쟁에 대해서 책을 쓴다는 인텔리고 마이클은 철물점 주인이다. 이 철저한 교양 덩어리들은 우아함으로 무장하고 어른스러운 대화를 통해 아이들의 전쟁을 풀어내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어갈 리가 있나. 네 사람은 서로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비아냥거림과 빈정거림을 무기로 서로의 교양을 짓밟고, 이는 곧 치졸하고 유치한 말싸움으로 진화하며, 결국에는 육탄전과 토사물로 범벅이 된 전쟁으로 막을 내린다.

케이트 윈슬럿에게 이처럼 어울리는 영화도 없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녀는 좀처럼 정상적인 역할을 맡은 적이 없다. 피터 잭슨의 <천상의 피조물>(1994)에서 친구의 엄마를 살해하는 소녀를 연기하며 경력을 시작한 그녀는 어딘가 조금 세상에서 비껴난 역할을 도맡아 연기했다. <타이타닉>(1997)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윈슬럿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를 뿌리치고 <히디어스 킨키>(1998)를 선택했고, 제인 캠피온의 <홀리 스모크>(1999)에서는 카메라 앞에서 오줌을 쌌다. 케네스 브래너의 <햄릿>(1997)은 또 어떤가. 윈슬럿이 그 영화에서 연기한 오필리아는 거의 ‘셰익스피어-모독적’으로 근사했다. 그녀는 다른 젊은 여배우들이 매니저의 얼굴에 집어던지며 악담을 늘어놓을 법한 시나리오만 일부러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케이트 윈슬럿의 자유분방한 젊은 날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것이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도대체 뭘할 것인가. 거칠게 아름답고, 열정적으로 자기파괴적이고, 충동적으로 사랑스러운 캐릭터. 영원히 그런 역할을 연기할 수는 없다. 만약 당신이 여배우로서 점점 나이를 먹어간다면 더더욱.

케이트 윈슬럿의 경력이 2008년 동시에 개봉한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와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통해 새롭게 열렸다고 이야기해도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하나는 시대에 희생당하는 여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다 무너지는 여인이었다. 두 여인은 젊은 시절 윈슬럿이 연기했던 공상과 망상의 소녀들이 시간과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내파한 듯한 캐릭터였다. 이제 중년의 오스카 수상자가 된 케이트 윈슬럿은 <대학살의 신>에서 젊은 시절의 캐릭터와 중년 이후의 캐릭터들을 뒤섞은 뒤 대학살하며 깔깔깔깔 웃어젖힌다. “저는 <대학살의 신> 같은 이야기에 본능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만약 당신이 부모라면, 저처럼 화목한 대가족 출신이라면, 배우 자신의 감정적인 진실은 따로 떼어내고 역할에 접근해야 해요. 저는 다른 사회와는 다른 그만의 논리가 있는 ‘학교운동장의 정치학’을 잘알아요. 그게 얼마나 복잡할 수 있고, 또 얼마나 바보 같고 웃길 수 있는지 알아요. 영화의 모든 캐릭터는 극단적으로 강하고 또 복잡하게 꼬여있어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나요?”. 물론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 하지만 케이트 윈슬럿처럼 이런 캐릭터를 끝내주게 갖고 노는 배우는 흔치 않다.

윈슬럿의 차기작은 제이슨 라이트먼의 <노동절>(Labor Day)과 케네스 브래너의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클럽>(The Guernsey Literary and Potato Peel Pie Society)이다. 그녀는 전자에서 탈옥수를 우연히 자동차에 태운 싱글맘을 연기하고, 후자에서는 2차대전 이후 영국의 작은 섬에 고립됐던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런던의 작가를 연기한다. 윈슬럿은 말한다. “사람들은 제가 의식적으로 작은 독립영화에만 출연하는 것 같다고 말해요. 솔직히 말하면, 전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어요. 각각의 영화를 끝내고 나면 이젠 얼마나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할 뿐이에요. 과연 다음 역할이 내게 또 다른 도전이 될 것인가? 그게 내게 얼마나 영감을 줄까? 이 역할이 스스로 배우라는 직업을 더 사랑하게 해줄까?” 이런 말을 듣고 있노라면 결국 우리는 케이트 윈슬럿이라는 이 놀라운 배우에게 개인적인 연서를 바치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윈슬럿씨, 당신의 새로운 역할이 배우라는 직업을 더 사랑하게 해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보다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의 새로운 역할들이 지켜보는 우리로 하여금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족속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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