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검사,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정치 운운하는 대선 캠프 보좌관에게 ‘팩트’로 무안을 주고, 죄보다 사람이 먼저이며, 마음 가는 여자에게 “이건 먹고 이건 바르고 이건 붙여”라며 약봉지를 챙겨주는 남자. 최정우 검사는 드라마 <추적자 THE CHASER>(이하 <추적자>)의 가장 큰 판타지였다. 모든 인물이 들끓는 욕망과 분노로 앞만 보고 달릴 때, 최정우 검사는 정의와 이성이라는 큰 원칙에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다. 모두가 한번쯤 꿈꿔보는 이상적인 대한민국 검사를 연기한 이는 연기생활 15년차의 배우 류승수다. <달마야 놀자>의 명천 스님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던 그는 <추적자>의 최정우 검사로 “12년 만에 이름표를 바꿔 끼우는” 경험을 했단다. 하지만 “여름방학 생활계획표도 계획대로 안되는데, 어디 인생이 계획대로 될 리가 있나”라는 그의 드라마 속 명대사처럼, <추적자>를 뒤돌아보는 류승수의 마음은 차분하고 담백했다. 그의 연기가 그렇듯이.
-<추적자>를 마치고 단체로 MT를 떠났다고 들었다. =그렇다. MT 날 마침 비가 안 와서 (김)상중이 형과 함께 바이크를 타고 MT 장소로 갔다. 자연광을 받으면서 달리는데, 참 기분이 좋더라.
-드라마가 끝난 뒤 “동산에 오르려고 첫발을 디뎠는데 그 산은 동산이 아니라 에베레스트산이었다”는 말을 한 적 있다. =7, 8부까지 일주일에 하루 촬영할 정도로 비중이 없었다. 그때까지 사실 집에서 관조적인 입장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추적자>의 배우가 아닌, 시청자인 것처럼. 그런데 갑자기 9부에서 최정우 검사가 강동윤(김상중)의 보좌관 혜라(장신영)를 취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걷잡을 수 없이 분량이 늘어났다. 현주 형이 그러더라. “야, 이제부터 네가 주인공이다.” 그런데 방심하고 있던 탓인지 늘어난 분량에 적응이 잘 안됐다. 그때부터 쪽대본을 보며 그야말로 피터지게 연구했다. 최정우란 캐릭터에 대해, 인물간의 관계에서 쌓이는 감정에 대해. 정신적으로 패닉이 올 정도였다.
-그럼 이 캐릭터의 비중이 어느 정도일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건가. =전혀 몰랐다. 심지어 감독님도 내용을 몰랐다. (웃음) 박경수 작가님만 알았지. 시놉시스에서 주어진 인물의 방향이 전반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최정우 검사는 원래 강동윤의 대선 캠프에 잠입해서 백수정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사람이었고, 보좌관이던 혜라는 12부에서 총에 맞아 죽는 인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어떤 마음으로 작품을 선택했나. =조남국 감독님의 전화를 받았다. 최정우 검사란 캐릭터가 있는데, 나에게 딱 맞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주변에 물어봤더니 아주 좋은 감독님이라는 사람이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손현주 선배와 꼭 한번 작품을 같이 해보고 싶어 출연을 결정했다. 솔직히 작품에 대한 기대보다는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다. 선배들 연기를 보면서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고 싶었다.
-검사 역할을 맡았는데 어떻게 준비했나. 혹시 롤모델이 있었나. =롤모델을 삼을 만한 분이 있나 싶어 형사재판을 많이 보러 다녔다. 그런데 실제 검사들과 드라마 속 검사는 많이 다르더라. 막연하게 검사는 무섭고, 형사재판은 큰소리가 많이 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주 드라이하게 재판이 진행되더라. 하지만 드라마 속 검사는 그래선 안된다. 검사이기 이전에 감정을 가진 한 인물로서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정우란 인물에 접근할 때 어떤 고민을 했을까. =가장 중요한 건 톤이었다. 드라마 흐름에 맞고, 최정우란 인물에 맞는 톤을 많이 고민했다. 검사이다 보니 장병호 변호사와 맞닥뜨리는 신이 있었다. 전국환 선생님이 연기를 너무 잘하셔서, 감독님이 촬영 초반부엔 “변호사에 비해 검사가 많이 밀리는 거 아냐” 하셨다. 물론 선생님의 경륜과 연기력을 내가 따라갈 순 없지만, 그렇다고 최정우 검사가 장병호란 인물에 밀리면 안되는 거였다. 그런 점에서 최정우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은 뭘까 연구를 많이 했다. 또 최정우는 <추적자>에서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다. 모든 사람이 감정적으로 행동할 때도 최정우는 가장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성적이면 인물의 입체적인 성격이 안 나올 것 같았다. 감정을 보여줄 땐 확실하게 보여줘야 최정우의 인간적인 면이 보일 것 같더라.
-보좌관 혜라를 심문하며 분노하는 모습에서 그런 감정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것 같다. =원래는 차분하게 심문하는 장면이었는데, 왠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소리 지르니 카메라 감독님이 앵글을 벗어났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다시 찍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최정우가 가장 돋보인 장면은 역시 마지막회의 재판신이었다. 백수정 사건의 변호를 위해 검사옷을 벗고, 변호사로서 드라마의 모든 인물을 소환하며 죗값을 묻는다는 점에서 최정우는 이 장면의 연출자로 기능하는 것 같다. =밤을 새워가면서 촬영한 장면이다. 내가 재판정 중심부에 서 있기 때문에, 다른 배우를 카메라에 담을 때도 내 어깨가 화면에 잡힌다. 24시간 가까이 서 있었던 것 같다. 가장 중요했던 건 이 재판의 결과를 마주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하냐는 거였다. 백홍석(손현주)이 법정 살인을 했으니 15년형을 받아야 하는 게 현실이라면, 그의 모든 사연을 알기 때문에 무죄 확정을 안겨주고 싶은 게 최정우의 인간적인 욕심이다. 현실과 욕심 사이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말자, 생각했다. 뭔가 보여주려고 하면 그 장면이 오히려 삐걱거릴 것 같더라.
-백홍석의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역할이었던 만큼, 상대 배우들과의 호흡이 중요했을 거다. 하지만 촬영 스케줄이 촉박해 합을 맞출 시간이 부족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 점에 대해 우리 현장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다. <추적자> 팀은 NG를 안 낸다고. 첫 테이크에 대부분 OK가 난다는 소문이 다른 현장에까지 퍼져 배우들이 구경하러 올 정도였다. 배우들이 연기를 워낙 잘하다 보니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백홍석이 아니라 조 형사, 용식이 같은 캐릭터와 붙을 때도 내가 자칫 멍때리고 있으면 저분들에게 내 장면을 빼앗기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잔뜩 긴장됐다. 그 많은 대사를 어떻게 외웠냐고 말씀들을 하시는데, 천재이거나 머리가 좋아서 되는 게 아니다. 외워질 때까지 피터지게 연습하는 거다. 카메라팀, 조명팀이 준비하고 있을 때 혼자 현장에 나가 리허설을 계속했다. 체력적으로는 무지하게 힘들었지만, 그 방법밖엔 없었다.
-처음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한, 선배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는 어떤 자극을 받았나. =손현주 선배에겐 배우로서 현장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현주 형은 정말 똑똑한 배우다. 마음먹기에 따라 사람을 웃길 수 있고 눈물 흘리게 할 수도 있다. 그건 보통 스킬이나 내공이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 김상중 선배는 정말 기본기가 탄탄한 배우다. 내가 강동윤의 별장에 찾아가는 장면에서 NG가 났다. 그때 상중이 형이 “발음”이라고 정확히 짚어주시더라. 그날 촬영 마치고 집에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내가 연기를 좀 했다고 교만하게 놓고 있던 것들이 있구나. 상중이 형을 보며 다시 한번 기본기를 다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추적자>를 비롯해 영화 <고지전> <슈퍼스타 감사용>, 드라마 <종합병원2> 등의 출연작을 보며 작품에 참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코미디 연기를 할 때도 화려한 애드리브로 자신을 돋보이게 한다기보다는, 상황에 맞는 절제된 연기를 보여준다는 느낌이다. =배우로서의 신조가 그렇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잖나. 오버하는 연기보다는 부족한 연기가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버하는 연기는 보는 순간 가짜라는 생각이 들지만, 부족한 연기는 가짜라기보단 아쉽다는 생각이 드니까. 가짜보단 아쉽다가 더 나은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상황, 어떤 작품에서든 항상 진정성을 잃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애드리브를 구사한다면 분명 그 배우는 눈에 띌 거다. 하지만 그게 예능 프로그램과 다를 게 뭔가. 가장 웃기는 연기일수록 가장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추적자>라는 드라마를 경험한 게 다음 작품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줄까. =아니다. 지금 내 나이가 42살인데,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오다 보니 삶의 모티브가 생긴 것 같다. ‘기대하지 않는 삶’이다. 배우로서의 긴 여정에서 <추적자>란 파라다이스를 잠깐 만난 것이고, 또 사막을 걷다가 힘들 때쯤이면 파라다이스가 나타날 거다. 인생은 항상 사막도 아니고 항상 파라다이스도 아닌 것 같다. 이젠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오늘을 즐기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그리고 결과에 대해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을 거다. 다음엔 좀 가벼운 작품을 해보려고 한다. 요즘 최정우 검사 멋지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이 인물을 빨리 보내야 할 것 같다. 안 그러면 갇혀버릴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