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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 노래 부르고 붓질하는 게 나에겐 명상이다

영화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 주연으로 출연한 아티스트 백현진

Profile

앨범 1997 어어부프로젝트 1집 ≪손익분기점≫ 1998 어어부프로젝트 2집 ≪개, 럭키스타≫ 2000 어어부프로젝트 3집 ≪21C New Hair≫ 2002 어어부프로젝트 3집 <복수는 나의 것> O.S.T. 2008 백현진 ≪Time of Reflection≫ 2011 백현진 ≪찰라의 기초≫

영화 2001 <꽃섬> 출연 2002 <뽀삐> 출연 2009 <디엔드> 연출 2011 <영원한 농담> 연출 2012 <설마 그럴리가 없어> 출연 2012 <모피를 입은 비너스> 출연

백현진의 예술활동 범위는 전방위다. 뛰어난 음악인이자 미술가인 백현진은 영화연출도 했다. 이미 단편영화 두편을 만들었다. 요즘에는 연출뿐 아니라 배우로서 영화출연도 잦아졌다. 간간이 우정출연하는가 싶더니 최근 개봉한 장편영화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는 놀랍게도 주연이다. 창작에의 영감을 얻기 위해 애쓰다가 한 치명적인 여인의 매력에 빠져 사도마조히즘 게임의 노예가 되는 영화감독이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이다. 실은 그냥 들어도 아무나 선뜻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지만, 어려운 일인데도 쉬운 일인 것처럼 여러 가지를 거뜬히 해내는 백현진이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문득 백현진이 만나고 싶어졌다.

-“연남동 사는 백현진입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그렇게 인사하더라. =음악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미술도 한다고 하면, 아무나 음악도 하고 미술도 하냐, 옛날에는 뭐 그래픽디자인도 했다며, 하면서 좀 이상하게 보는 분들이 간혹 계셔서 그냥 그렇게 말하는 거다. 나에 대한 정보가 하나로 모아지지 않을 때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시면 좋을 텐데 무언가로 꼭 규정짓고 싶어 하는 분들도 간혹 계신다. 일일이 설명하는 게 힘들어서 그렇게 말한다. 어차피 내가 연남동 살고 하니, 사는 위치를 말하는 게 평범하고 잡음 없는 소개가 되겠다 싶기도 한 거고.

-장편영화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 주연으로 출연한 사연은 무엇인가. =영화를 연출한 송예섭 감독은 오래전부터 알던 형이다. 2000년 초반에 홍상수 감독님께서 오래 알고 지낸 동생이라며 소개해주셨고, 친해졌다. 둘이 차도 마시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형이 자신이 만들 영화의 시나리오에 대해 내게 많이 들려주었다. 그렇게 듣다보니 나 역시 또 의견을 내게 되고, 그렇게 일종의 모니터 요원이 된 거다. (웃음)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촬영에 들어간다고 하기에 많이 응원했는데 막상 캐스팅이 잘 안된다고 하더라. 심지어 잘 안 맞을 것 같은 느낌의 상업 영화배우들까지 섭외해봤는데 전부 수포로 돌아갔다. 그때 내게, 혹시 네가 해볼래, 하시더라. 맨 처음에는 말도 안된다고 했지만, 할 사람이 없어서 낙담하는 형을 그냥 볼 수가 없었다. 이상한 오지랖이 발동한 거다. 아마 백종학 형도 그런 마음에서 출연했을 거다. 같이 낙담하다가 어느 날 보니 내가 벌써 출연을 하고 있더라.

-갑자기 맡은 역할이지만 나름대로의 준비가 필요했을 텐데. =캐릭터는 어렵지 않게 이해됐다. 평범한 말로 진짜 지질한 놈이라는 것도 알겠고. 글쎄 연민은 모르겠다. 주변에 이런 사람 있으면 친하게 지낼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저런 사람이 왜 없겠어, 저런 인생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원래 하는 일이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많이 생각을 해봐야 하는 일이니까 특별히 따로 준비한 건 없었다. 그냥 살을 좀 찌우는 게 좀더 멍청하고 둔해 보이려나, 정도였다. 아, 한 가지, 이 영화의 대사들 중에는 내가 말할 수 있는 평범한 언어 바깥에 있는 말들이 좀 많았다. 그런 건 감독님하고 상의했다.

-벌거벗고 등에 회초리 맞고 목줄 매거나 곰 가죽 뒤집어쓰고 기어다니는 장면 등이 있다. 쉽진 않았을 것도 같고. =(웃음) 감독이 그런 퍼포먼스를 원하는구나, 하는 쪽으로 이해했다. 그런 건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는 내가 전문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상대 여배우하고 신체 접촉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완성된 영화를 볼 때도 그게 제일 난감하고. 영화 속 감독과 여주인공의 행동들에 대해서는, 저 사람들은 저 지랄을 하면서 잘 노는구나 하고 보는 거다. 물론, 현실에서 누군가가 나하고 그렇게 놀자고 하면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스칼렛 요한슨이 그러자고 해도 말이다. 아… 아니다. 스칼렛 요한슨이 하자고 하면, 모를 일인가? (웃음)

-장편영화 주연은 처음이다. 일하면서 어떤 점들을 느꼈나. =여러 명이서 하는 일은 나랑 잘 안 맞는다? (웃음) 배우라는 게 되게 희한한 직업이구나 생각하게 됐다. 내가 길게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고.

-하지만 <북촌방향> <은교> <설마 그럴리가 없어> 등 요즘에 영화 출연이 많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하지만 이 행보를 유지해서 배우가 되겠다는 뭐 그런 건 아니다.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들의 작품이니까 반나절 정도 시간 내서 다녀오는 거라고 생각하는 정도다. 주변에서 가끔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에너지를 너무 뺏기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사람이 술 마시다보면 12시간씩 먹기도 하고 그러지 않나. 그렇게 술 먹는 것보다 잠깐 나가서 하고 오는 게 나로서는 덜 힘들다.

-기본적으로 연기에 대한 자질과 흥미가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 같다. =20대 때에는 확실히 호기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뮤지션으로 무대에 선 게 95년부터인데, 카메라건 사람이건 앞에 있는 대상에 대해 어색함이 없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에 워낙 지대한 매력을 느끼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만약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뮤지컬이었다면 안 했을 거다. 뮤지컬에는 흥미가 없으니까.

-공동작업인 영화가 어렵게 느껴진다고 했지만 벌써 단편을 두편이나 찍었다. =첫 번째 영화는 일단 시스템이 좋았다. 프로듀서와 스탭도 정말 좋았고. 두 번째 영화는 소규모로 여섯 명인가 움직였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음악으로 치면 밴드 하나 정도 구성원이니까 큰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혼자 하는 일이 나에게는 무리가 없는 일이구나 하는 정도는 알겠더라. 내가 즐겁게 오래도록 할 수 있는 매체가 영화는 아니구나, 음악과 미술이 내가 지속적으로 나이 들어서까지 할 수 있는 일이구나 하는 정도는 알게 됐다.

-지금 마음으로는 영화연출을 더 안 할 것 같은가. =이런 생각은 한다. 30분짜리 하나 정도만 더 해야지. 같이 일했던 배우들에게, 한번만 더 도와주면 더이상 안 괴롭힐게요, 라고는 말한다. 그렇게 하나 정도 더 찍어서 물리적으로 장편 길이를 갖추면 마음으로 뭔가 깔끔하게 털어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뭘 할지 전혀 모르겠다.

-최근에 <돈의 맛>에서는 엔딩 타이틀 곡을 불렀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중요한 감독들과 지금까지 이런저런 많은 작업을 해왔다. 김기덕, 김지운, 류승완, 박찬욱, 송일곤, 이재용, 임상수, 장선우, 홍상수 등. =같은 ‘어어부밴드’ 멤버인 장영규 형이 주로 많이 한 거다. 장선우 감독님의 <나쁜 영화> 행려 신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진 것 같다. 그 뒤로는 <반칙왕> 등으로 이렇게 저렇게 사람들에게 대중적으로 더 알려진 거고. 한때 그런 이야기도 들은 기억이 난다. 작가주의 색깔있는 감독의 영화면 다 백현진 목소리 들어가야 하냐, 재수없다, 뭐 그런 이야기들. (웃음)

-≪Time of Reflection≫ ≪찰라의 기초≫를 들으며 인터뷰 자리에 왔다. 백현진의 노래는 기본적으로 ‘운다’. 부르는 사람은 어떤 느낌으로 부를까 싶었다. =우울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난 담담하게 부르려고 노력한다. 어떤 감정으로 노래해야지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20대 때는 분노하고 농담하고 좌절하고 그런 감정들로 노래를 했던 기억이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솔로 앨범 ≪Time of Reflection≫을 만들 때는 사적으로도 우울한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곡을 만들었고 그 상태에서 그냥 녹음을 한 거라 우울한 느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노래들을 지금 부르면 또 다를 거다. 담담하게 붓질을 하고 싶은 것처럼 몸을 통과하는 소리를 담담하게 내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20대 때에는 분노나 반감이 많았나. =화가 많았다. 나에게도 외부에 대해서도. 마흔을 넘은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야 못났으니까 그랬겠지 싶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고. 그 시절이 지나간 건 정말 좋다. 왜 사람들이 치킨집 같은 데 앉아서 맥주 마시면서 옛날로 돌아가면 좋겠다, 뭐 그런 이야기들 하지 않나. 나는 그런 거 꿈도 안 꾼다. 늘 지금이 제일 좋다. 지금밖에 없는 거 아닌가.

-목소리로 악기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는 느낌도 곧잘 받는다. 톱이나 아쟁? =어렸을 때는 목소리로 그런 걸 해보고 싶었던 게 사실인데 지금은 그런 게 기술처럼 느껴져서 별로 쓰고 싶지 않다. 계속 부르다 보면 또 다른 상태로 소리를 낼 수 있겠다는 감은 온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요즘엔 어떤 일들에 관심이 가나. =음… 뇌파? ‘브레인 웨이브’, 그런 이름의 유료 앱이 있다. 아, 이거 꼭 외판원 같네. 요즘 그거 많이 듣고 있다. (웃음) 보통 현대음악에 익숙해져 있는 편이라 그냥 웅웅거리는 앰비언스도 잘 듣는다. 그리고 또 하나는 누가 추천을 해서 책 한권을 읽고 있는데 그 책 제목 말하는 건 좀 꼴사납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생략하자. 하여간 누군가가 추천하기를 그 책을 천천히 세번만 읽어봐라 그러더라. 어느 날인가 그 추천사가 귀에 갑자기 들리더라.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연 현대미술 화가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릴 때는 보통 어떤 느낌에 싸여서 그리나. =아무 생각이 안 난다. 그래서 노래와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다. 늘 별 생각없이 그리려고 한다. 생각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도 하고. 잘 때 말고 뇌파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별 생각을 안 하고 일을 하는 것이 있다면 그 두 가지, 노래 부르고 붓질하는 거다. 그 시간을 통과하면 마음이 좋고 깔끔하다. 그놈이 나한테 왜 그랬을까,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나는 내일모레 뭘 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안 하게 된다. 걷거나 앉아서 명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이를테면 명상하는 상태가 아닐까. 일을 하고 나면 노래도 끝나 있고 그림도 끝나 있다.

-앞으로 가장 가깝게 있는 중요한 일로 7월28일과 29일 열리는 공연이 있다. 좀 특별한 형태의 공연이라고 들었다. =말 그대로 맨몸뚱이 하나로 60분 정도 해보는 거다. 창을 해도 고수가 붙지 않나. 그런데 여기엔 고수도 없다. 보통 나 혼자 흥얼대는 시간이 아주 많다. 보통 걸어다니면서도, 혼자서 무슨 시간을 보낼 때도 흥얼거린다. 그때가 바로 맨몸뚱이 하나로 소리를 내고 있는 때다. 그러다 생각하게 된 거다. 이런저런 악기 독주도 있는데, 목소리도 악기라고 할 때 목소리 하나로 하는 독주는 왜 안되나. 거기에 맞는 곡들을 썼고 또 기존 곡들을 거기에 맞춰 편집해봤다. 그걸 선보이는 공연이다. 이른바 무반주 독창이다. 해봐야지 알 것 같다. 정형돈 목소리 같다는 등 의견이 분분하기는 하지만(웃음), 하기로 했으니 해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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