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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는 어디서부터 태동했을까?

SF소설 10권 추천-아이작 아시모프부터 리사 프라이스까지 기억해야 할 이름들

일단 <SF 명예의 전당3: 유니버스><SF 명예의 전당4: 거기 누구냐?>로 시작해야 한다. 둘 다 벽돌처럼 무거운 양장본이고, 수록된 작품들이 고물 분위기를 풍기는 옛날 옛적 소설들이라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이 시리즈에 속한 중·단편들 중 상당수는 초역이고, 이미 번역된 작품들 중 일부는 이제 다른 경로로 구하기 힘들다. 그리고 SF만 그런 건 아니지만, 장르는 고전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장르에 속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이전 작품의 패러디거나 오마주일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이 책들에는 SF영화 팬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중편이 각각 한편씩 수록되어 있다. 폴 앤더슨의 <조라고 불러다오>는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를 만들기 전에 참고 (또는 표절)한 게 분명한 작품이며 <아바타>의 중요한 덩어리들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리고 존 W. 캠벨의 <거기 누구냐?>는 우리나라에도 얼마 전에 리메이크/프리퀄이 나온 존 카펜터의 <괴물/더 씽>의 원작이다. 둘 다 영화와 엮어 보지 않아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다.

<앨저넌을 위한 꽃다발>의 원조, <브레인웨이브>

천재 과학자로부터 아가미를 이식받아 물속과 물 위를 자유롭게 오가는 양서인간이 된 아르헨티나 소년 이흐티안드르의 모험 이야기인 <물고기 인간>은 어린 시절 아이디어 회관의 축약판 SF를 읽으며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웠던 독자들에게는 향수가 펑펑 돋는 책이다. 난 얼마 전에 제대로 된 번역으로 알렉산드르 벨 랴예프가 쓴 이 책을 다시 읽었는데, 전에 읽을 때는 느끼지 못했 던 이 소설의 고풍스러움에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벨랴예프가 뻔뻔스럽게 집어넣은 19세기식 멜로드라마의 순진무구한 힘은 여전히 세고, 러시아 소비에트 시절 작품이라는 티를 풀풀 내는 막판의 반종교/친과학 연설은 은근히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구석이 있다. 단지, 지금 와서 읽어보니, 벨랴예프 시절의 과학 윤리와 지금의 과학 윤리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알겠다. 반세기 이전에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우리와 같은 독자들은 이흐티안드르의 창조주인 과학자 살바토르에게서 요제프 멩겔레를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폴 앤더슨으로 가보자. 얼마 전부터 쟁쟁한 SF 고전들을 시치미 뚝 떼고 내고 있는 문학수첩이 앤더슨의 <브레인웨이브>를 번역했다. 이 책은 갑작스러운 인간 지능의 증강을 다룬 다니 엘 키스의 <앨저넌을 위한 꽃다발>, 테드 창의 <이해>와 같은 작품들의 원조이다. 물론 원조가 대부분 그렇듯, 앤더슨이 그리는 아이큐 500 인간들의 묘사는 투박하고 나이브한 구석이 있다. 하 지만 특별한 한 사람을 다루는 대신, 전 인류의 지능 증가를 태평스럽게 그리는 앤더슨의 장대한 비전은 여전히 후배들에게 정복 당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건성으로 그린 것 같은 아이큐 500 인간들의 이야기보다는, 정신지체장애자였다가 보통의 천재 수준으로 발전해 똑똑해진 동물들이 함께 사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브록의 이야기가 더 좋지만.

종종 아이작 아시모프가 로봇 시리즈와 파운데이션을 하나로 묶어 우주사를 쓴다는 집착에서 벗어났다면 얼마나 좋은 작품들이 나왔을까 생각해본다. <영원의 끝>은 몇 안되는 아시모프의 독립장편으로 (물론 끝에 가면 ‘은하 제국’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긴 한다!) 아마 시간여행을 다룬 가장 장대하고 꼼꼼한 소설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아시모프는 ‘과거에 가서 나폴레옹을 만났는데…’ 운운으로 시작하는 소망 성취의 서커스에서 벗어나 시간여행을 이용해 인류 역사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영원이라는 집단을 등장시켜 인류 진화와 사회 공학에 대한 거대한 사고실험을 하게 한다. 비록 동기 유발용으로 등장하는 로맨스는 손발이 오그라들고, 변태스러운 중세 가톨릭 수사들을 연상시키는 성차별주의자 독신남성집단인 영원이 인류의 전 역사를 통제한다는 아이디어가 거의 호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과거의 한계보다는 큰 그림과 주제를 보자. 아시모프는 절대로 영원이 좋다고는 안한다.

필립 K. 딕의 <높은 성의 남자>와 함께 현대 대체역사소설의 선구자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키스 로버츠의 <파반>이 번역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암살되고 스페인 무적함대에 의해 영국이 점령당한다는 가상의 역사에서 출발한 이 책에서는 기차 대신 증기기관 자동차가 거리를 다니고, 전화 대신 신호기가 쓰이며, 과학기술이 가톨릭 정부의 지배를 받는 20세기가 무대이다. 소설은 이 세계의 도셋을 무대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구체적인 스토리나 액션보다는 거의 토머스 하디풍의 비관주의가 지배하는 시적이고 음울한 분위기가 더 인상적이다. 다시 말해 ‘순문학적’이란 말이다. SF에 편견이 있는 친구가 있다면 선물로 주고 그 당황하는 얼굴을 구경해보자.

폴라북스에서 꾸준히 내고 있는 필립 K. 딕의 책들 중 하나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과 <발리스> 중 어느 걸 고를까 고민하다가 <발리스>쪽으로 갔다. 사실 <발리스>는 정확히 따지면 SF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SF작가가 멘붕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반소설, 또는 소설을 위장한 회고록, 또는 교리서에 가깝다. 딕은 1974년 2월에 사랑니 발치 수술의 통증에 시달리다가 진통제를 주문했는데, 물건을 배달하러 온 젊은 여상의 목에 걸린 물고기 장식품을 보고 일종의 각성을 체험했단다. 그는 그 뒤로 온갖 환 영에 시달렸는데, 그 체험을 소설 형식으로 쓴 게 바로 <발리스>다. 조금만 삐딱했다면 론 하버드처럼 사이언톨로지류 종교 창립 직전까지 갔던 경험이었는데, 다행히도 필립 K. 딕은 하버드와는 달리 훨씬 양심적인 남자였고 더 좋은 작가이기도 해서, 최종 완성된 소설은 괴상하지만 여전히 멋진 SF로 남는다. 물론 여러분이 이 소설에 담긴 이야기를 몽땅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면야… 아니, 그래도 SF로 보는 게 더 좋다. 이런 걸 진지하게 믿어서 뭣하겠는가.

스릴러와 SF의 경계를 넘다, <제노사이드>

지금까지 언급한 책들이 모두 고전이라면, 앞으로 소개할 세편은 모두 신간이다.

첫 번째 작품은 <와인드업 걸>의 작가 파올로 바치갈루피의 첫 번째 영 어덜트 소설 <십 브레이커>다. 시대배경은 <와인드업 걸>과 비슷한 디스토피아 미래로, 아마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 온난화로 환경은 무참하게 파괴되고, 유전자 조작이 일상화되고, 빈부 격차가 극단적인 악몽 같은 세계. 소설은 미래 배경의 디킨스 소설처럼, 폐선에서 금속을 떼어내 되파는 일을 하는 아이들, 그러니까 십 브레이커의 무리에 소속되어 있던 소년이 침몰한 요트에서 아름다운 부유층 소녀를 구출하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와인드업 걸>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땀에 전 생생한 세부 묘사는 훌륭하다. <와인드업 걸>과 달리 이야기가 영 어덜트 소설의 전형성을 따르긴 하지만, 이야기가 담고 있는 주제는 결코 만만치가 않다.

영문학사상 가장 따분한 뱀파이어 주인공을 만들었다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지만, 이 시리즈의 성공 이후 젊은 여성 독자를 위한 장르소설 시장이 활성화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는 이런 분위기를 타고 나온 영 어덜트 소설인데, 세균전으로 어른들이 대부분 죽고, 백신을 맞은 아이들과 노인들만이 살아남은 미래가 배경이다. 엔더라고 부르는 노인들은 스타터라 불리는 10대 아이들의 권리를 빼앗고 착취하는데, 이 시스템의 야비함의 끝은, 엔더들이 가상현실 조작을 통해 스타터의 몸을 대여하는 서비스에서 절정을 이룬다. 솔직히 그렇게 말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젊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엔 무리가 없을 듯 보이고, 일단 설정을 받아들이고 나면 꽤 재미있는 미스터리가 기다리고 있다. 단지 여자주인공을 반드시 어장관리의 고수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새 하이틴 소설들의 집착을 견뎌낼 수 있다면 말이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는 현대 배경의 테크노 스릴러처럼 시작하지만, 곧 인류의 미래와 진화를 다룬 정통적인 SF의 세계로 넘어간다. 소재가 무엇인지는, 읽는 재미를 위해 정확히 알려줄 수는 없다. 하지만 특수 임무를 받고 아프리카에 파견된 용병들과 갑작스럽게 사망한 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를 해결 하려는 일본인 대학원생의 이야기가 정신없이 교차하는 이야기의 구조는 환상적이며, 생물학과 화학을 넘나드는 하드 SF적인 묘사의 진지함은 압도적이다. 아, 그리고 여러분이 아직도 조지 부시 주니어와 딕 체니에게 복수하고 싶은 리버럴이라면, 킬킬거리면서 읽을 만한 장면들이 몇개 있다.

이 리스트에는 몇몇 중요한 책들이 누락되어 있다. 예를 들어 댄 시몬스의 <히페리온의 몰락>은 굳이 내가 소개할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전작인 <히페리온>을 읽은 독자들은 이미 책이 나왔다는 소리를 듣기 무섭게 서점으로 달려갔을 것이며, 안 읽은 독자들은 먼저 전편부터 읽어야 할 테니까. 왜 이 리스트에 J. G. 발라드의 소설들이 한편도 들어가 있지 않은지는, 쓰고 있는 나도 잘 이해를 못하겠지만, 최근 들어 다섯편이나 되는 발라드의 소설들(<크래쉬> <하이 라이즈> <물에 잠긴 세계> <불타버린 세계> <크리스탈 월드>)이 논스톱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에 감동 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밝혀두는 게 좋겠다. 아, 난 줄리애나 배곳의 <퓨어>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지금 읽고 있는 첫장은 분위기가 아주 좋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 뭔가 이야기하 려면 일단 책을 다 읽어야 하겠지.

레이 브래드버리의 걸작들

레이 브래드버리가 6월5일, 91살로 세상을 떴다. 많은 사람들에게 브래드버리는 SF작가로 기억되지만, 그는 SF라기보다는 SF라는 장르 도구도 즐겨 쓰는 환상소설가였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화려한 미문으로 그려진 그의 화성은 버려진 미국의 서부 소도시처럼 친근했고, 그의 미국 소도시는 화성처럼 기이했다. 그리고 그 모두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성연대기> <화씨 451>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민들레 와인> <멜랑콜리의 묘약>과 같은 작품들이 번역되어 있다. <화씨 451>과 같은 장편도 썼지만 그는 기질적으로 단편작가였고, <화성 연대기>와 같은 작품도 기존에 발표한 화성 소재 단편들을 짜깁기한 픽스업 소설이었다. 수많은 그의 작품이 영상매체로 각색되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화씨 451>. 하지만 SF팬들은 레이 해리하우 젠의 특수효과로 잘 알려졌고 <고질라>에 영감을 주었다고 알려진 <심해 에서 온 괴물>(The Beast from 20000 Fathoms)에 더 애정을 느낄 것 이다. 이미 미니 시리즈로 한번 만들어진 <화성연대기>와 <화씨 451>은 모두 리메이크 준비 중이란 말이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