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앞에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건 위험한 일이다.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영화 <더 레이븐>을 연출한 제임스 맥티그도 그 정도쯤은 알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매트릭스> 시리즈 세편과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 같은 대작의 조감독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이답게, 맥티그의 <더 레이븐>은 에드거 앨런 포라는 거대한 미국 작가의 기에 눌리지 않은 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뚝심있게 풀어나간다. 한편 <더 레이븐>은 제임스 맥티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전작 <브이 포 벤데타>와 <닌자 어쌔신>의 제작에 참여한 워쇼스키 형제의 입김이 닿지 않은 첫 영화이기도 하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복수와 인간 내면의 어둠에 대해 말하면서도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한층 심화한 듯 보이는 제임스 맥티그와의 서면 인터뷰를 전한다.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뭔가. =포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사실상 포를 정말 잘 알고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더 레이븐>을 연출하게 된 이유다. 그동안 포의 소설에 관한 영화는 있었지만 그의 인생에 대한 영화는 한편도 없었다. 또 연쇄 살인범이 포의 소설을 모방해 살인을 한다는 컨셉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더 레이븐>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있었다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고딕 스타일의 대부’로서 포의 이미지였다. 이와 더불어 죽음, 악, 검은색과 흰색의 이미지가 영화를 진행하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영화인 만큼 포의 캐스팅이 중요했을 거다. 존 쿠색을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인가. =포는 알코올 중독자이며 마약에 손댔고, 심지어 13살 난 사촌과 결혼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그런 그의 궁핍하고 무너진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적인 매력 또한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유별난 인물로부터 관객의 동정심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존은 에드거 앨런 포에 매우 적합한 배우였다. 그는 체중감량도 마다하지 않고 수많은 리서치를 통해 포라는 인물을 파고들었다. 그의 몰입도를 높이 사고 싶다.
-포의 수많은 시와 단편소설 중 일부를 차용했는데, 선택 기준이 있었나. =특별한 기준이 있었던 건 아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될 만한 소설과 시를 차용했다. 다만 영화에서 언급되는 소설 중 내가 좋아하던 포의 작품이 많이 포함된 건 개인적인 취향이 알게 모르게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포의 작품은 <함정과 진자> <모르그가의 살인> <어셔가의 몰락> <고발하는 심장>이다.
-소설 속 살인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을 했나. =영화가 살인장면을 보여주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나는 그것이 어떻게 미학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촬영감독 대니 룰먼에게 참고자료로 언급했던 영화는 <사냥꾼의 밤>과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같은 작품이었다. 포의 연인 에밀리가 납치되는 무도회 장면에선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과 <배리 린든> 같은 느낌을 주문했다.
-<더 레이븐>에서 가장 영화적인 캐릭터는 포와 함께 연쇄살인마를 쫓는 필즈 형사다. 루크 에반스가 연기하는 이 캐릭터가 어떤 역할을 해주길 바랐나. =이 영화에서 살인마는 포의 이야기를 비틀어 증거를 하나씩 숨겨놓고 포가 자신을 찾길 기다린다. 살인 현장과 포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캐릭터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필즈 형사였다. 이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는 포에 대한 필즈의 감정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다.
-<브이 포 벤데타> <닌자 어쌔신> <더 레이븐>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연출작은 항상 어두움을 품고 있다. 어둡고 잔혹한 이야기에 끌리나. =그런 이야기를 일부러 생각하고 준비하는 건 아니지만 주제적으로 ‘복수’라는 테마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보니 내 영화의 이미지가 전반적으로 어둡고 잔혹하게 보여지는 것 같다.
-<더 레이븐>은 워쇼스키 형제와 작업하지 않은 당신의 첫 번째 연출작이기도 하다. =그렇다. <더 레이븐>의 재능있는 배우, 스탭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됐다. 워쇼스키 형제와는 조만간 또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을 거다. 여전히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영화는 <매트릭스>이고, 워쇼스키 형제와 여전히 좋은 친구이자 동료로 지내고 있다.
-차기작으로 <메시지 프롬 더 킹>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떤 작품인가. =실종된 자신의 누이를 찾으러 남아프리카에서 LA까지 오게 된 남자의 이야기다. 누이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음을 알게 된 남자가 살인자를 찾아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