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고(故)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전에 남겼다는 24개의 종교적 물음 중의 하나다. 차동엽 신부는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 뭔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다.”
과녁을 빗나가다
최 신부의 말대로 그리스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빗나가다’(hamartanein)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신약에서 이 말이 ‘죄’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고전기의 그리스에서는 ‘하마르티아’가 ‘단순한 실수’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 사실 과녁을 맞히지 못한 것은 ‘죄’(sin)보다는 ‘실수’(error)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던 것이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와 ‘죄’를 가리키는 도덕적 어휘로 전의(轉意)된 모양이다.
미학에서 ‘하마르티아’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시학>은 비극의 주인공을 이렇게 정의한다. “덕과 정의에서 월등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인물.” 이는 물론 ‘공포’(phobia)와 ‘연민’(eleos)이라는 비극의 효과와 직접 관련이 있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와 비슷한 자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정의 속에서 ‘과실’로 번역된 것의 원어가 바로 ‘하마르티아’다. 연민의 감정은 주인공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발생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하마르티아’란 도덕적 ‘죄’가 아니라 악의가 없는 ‘실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에 저지른 과오를 가리킬 거다. 주인공이 도덕적으로 악한 짓을 하다가 불행해졌다면, 주인공의 불행에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외려 그의 몰락에 통쾌감을 느끼지 않을까?
비극적 결함
‘비극적 결함’이냐, ‘비극적 오류’냐? 이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학자들은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어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하마르티아’가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을 가리킨다고 본다. 가령 오이디푸스는 성질이 너무 급하고, 맥베스는 야심이 너무 크고, 오셀로는 질투가 너무강하고, 삼손은 아내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쓴다. 이 성격의 결함, 이른바 비극적 결함(tragic flaw)이 주인공들을 불행에 빠뜨린 하마르티아라는 것이다.
한편, 다른 이들은 ‘하마르티아’에서 도덕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과오를 본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가 예로 드는 <오이디푸스>의 경우를 보자. 거기서 불행은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보다는 단순한 오인, 즉 친부를 잘못 안 데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르고 행하였다가 행한 뒤에야 알게 되는 경우”야말로 비극에 적합한 상황이다. “이 경우 불쾌감을 자아낼 게 아무것도 없고, 발견이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14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로 드는 상황들은 대부분 오이디푸스의 경우와 비슷하다. 가령 아스티다마스의 작품에서 알크메온은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모른 채 에리필레를 살해한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부상당한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텔레고노스도 자신의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한 사내를 살해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이렇게 “자기의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지 알지 못하고 행한 뒤에 나중에 가서야 근친관계를 발견한다”.
시학에 나오는 ‘하마르티아’의 개념은 아마 윤리학과 연관돼 있을 거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의 책임을 물으려면 그 행위가 ‘자발적’ 선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행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자발성’의 경우로 ‘강제’와 ‘무지’를 든다. 강제적 힘이나 무지로 인한 악행은 용서받거나 심지어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행위의 비자발성이야말로 비극이 가진 ‘연민’의 효과의 전제가 되는 셈.
사실 <오이디푸스>에는 연민을 자아내는 계기가 두개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는 물론 자신이 상대하는 자가 제 아버지임을 모르고 살해한 것이다. 이는 ‘무지’로 인한 비자발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그가 하는 모든 행위가 사실상 신들에 의해 ‘강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신탁은 이미 오래전에 그가 제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 예언한 바 있다. 그는 이 예언을 피하려 했으나, 운명을 피하려는 그 행위로 인해 예언을 실현하게 된다.
플롯의 핵심은 역시 ‘발견’(anagnorisi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발견’을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변화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하마르티아’가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자발적 행위임이 드러난다. 언뜻 보기에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자발적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신이 정한 운명이라면,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사실상 강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죄’가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죄’에 가까운 것은 차라리 ‘휘브리스’(hubris)가 아닐까? ‘휘브리스’는 감히 신에 도전하거나 감히 그의 율법을 파괴하는 교만의 과오를 가리킨다. 그리스 비극의 바탕에 깔려 있는 또 하나의 모티브가 바로 ‘휘브리스’다. 가령 <안티고네>를 생각해보라. 여기서 테베의 왕 크레온은 서로 싸우다 전사한 두 형제 중의 한 사람은 정중히 매장하되, 다른 사람의 사체는 들짐승에 뜯어먹히도록 들판에 내버려두라고 명령한다.
죄와 벌
원래 ‘휘브리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포로, 혹은 그 밖의 희생자를 그저 재미로 모욕하며 괴롭히는 행위를 가리켰다. 가령 전사한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고 다니던 아킬레스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크레온이 사체를 매장하지 않고 들판에 방치한 것 역시 ‘휘브리스’의 이 야만적 어원에 잘 어울린다. 물론 이 불필요한 잔혹함이 신들의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크레온의 행위는 신의 계율을 파괴하는 ‘휘브리스’라 할 수 있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폴리네이케스의 사체를 매장하고 동굴에 밀봉된 안티고네를 풀어주지 않으면 아들을 잃을 것이며, 신들도 테베의 공물을 받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하지만 그 충고가 교만한 크레온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 또한 휘브리스다. 겁에 질린 합창단이 그 예언자의 말이 이제까지 틀린 적이 없음을 상기시켜주자 크레온은 비로소 고집을 꺾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동굴을 다시 열었을 때 안티고네는 이미 목을 맨 뒤였다.
안티고네의 죽음을 본 아들 하이몬은 자결을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왕비 에우리디케마저 그 뒤를 따름으로써 왕은 아들과 아내를 모두 잃게 된다. 물론 그는 제 행위가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 행위는 ‘하마르티아’, 즉 무지로 인한 비자발적 과오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묻지 않고, 산 사람을 묻는 것은 어디까지나 ‘휘브리스’, 즉 피할 수도 있었기에 또한 책임도 져야 할 죄다. 죄에는 당연히 ‘벌’(nemesis)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