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에서>는 변함없이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졌지만 감독을 포함해 두세명에 불과한 전원사 식구들의 품을 가장 많이 요구한 영화이기도 하다. 유명한 외국 여배우가 주연을 맡은 데 따른 부수 업무들, 전체의 절반 가까운 영어대사를 처리해야 하는 후반작업, 칸 경쟁부문에 가는 데 따른 잡무 등. 그래도 그 인원이 여전히 포스터와 예고편에서부터 자막에 이르기까지 투덜거리면서도 모두 해치우는 걸 보면 거의 마술이다.
이 마술적 가내 수공업을 통해 한국의 시네필들을 가장 설레게 하는 영화가 매년 한편, 때로는 두편이 꼬박꼬박 태어난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기 짝이 없는 일이고 그저 고마울 뿐인 마술이다. 칸행을 준비하느라 여전히 바쁜 홍상수 감독을 만났다.
-<다른 나라에서>는 촬영 전에 무엇이 제일 먼저 정해졌나요. 이번에도 장소였습니까. =그런 것 같아요. 가장 처음 정한 게 부안의 모항이란 장소였어요. 그다음 촬영날짜를 잡았고. 지난해 5월쯤엔가 이자벨 위페르가 사진전을 연다며 서울에 왔고,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해서 만났어요. 이자벨 위페르를 만나 7월에 영화를 만들 건데 함께하겠냐고 물었고 승낙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위페르가 출연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구상을 하게 됐습니다.
-부안의 어떤 점이 끌렸습니까. =특별한 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조그맣고 아담한 어촌이에요. 해변도 조그맣고 조금 더 나아가면 갯벌도 있고,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고…. 그냥 만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서 편하게 자유롭게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정도였어요.
-<다른 나라에서>의 영화감독 종수(권해효)가 이런 말을 합니다. “여기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찍고 싶다. 그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 혹시 이건 감독님 자신의 생각이기도 했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권해효라는 사람에 대한 느낌이 담겼을 겁니다. 권해효씨는 사회의식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극영화 감독보다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더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새만금 지역에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요소들이 섞여서 그런 대사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장소가 정해졌고 이자벨 위페르라는 낯선 외국 여배우가 주연으로 정해졌습니다. 감독님 영화에서 이야기보다 중요한 건 구조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최근 두 작품처럼 표면적으로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병렬하는 옴니버스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어느 시점에 정해졌나요. =모두 이자벨이 연기하지만 안느라는 이름을 가진 세명의 다른 인물을 등장시키는 건 촬영 2∼3주 전쯤에 정했어요. 이자벨의 확답을 받고 생각하다가 이런 구조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더라고요.
-감독님의 많은 작품, <강원도의 힘>부터 <잘 알지도 못하면서>까지 대구 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세편은 옴니버스 형식입니다. 선형적인 구성의 예외적인 작품, <밤과 낮>과 <하하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도 옴니버스식 구성이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옴니버스 형식이 다른 형식을 택할 때와는 어떤 다른 즐거움, 긴장감을 주나요. =아무래도 대구가 되는 구조로 정해놓고 들어갈 때보다는 좀 느슨하죠. 느슨하니까 어떻게 보면 자유롭고. 어떻게 보면 약간 불안할 수 있고, 그런 것 같아요.
-최근작 <북촌방향> <옥희의 영화>는 감독님의 영화 중에서 파토스가 강한 영화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약간 다른 것 같습니다. 감정의 온도가 좀 낮아졌달까요. =보는 사람마다 좀 다르지 않을까요. 개봉하고 다른 사람들 의견도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웃음)
-영화를 찍는 과정에선 혹시 그런 차이를 느끼진 않으셨나요. =<다른 나라에서>는 처음부터 전작들과는 다소 다른 느낌의 영화가 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어요. 보통의 경우에 외국인과 한국인들이 관계를 맺을 때 상투적이고 반복되는 상황들을 피하지 말고 오히려 영화의 중심으로 두자고 생각했습니다. 표피적이고 상투적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들을 계속해서 반복시키고 하여간 겉으로 보기에는 거기서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거기에 머문 거지요. 이렇게 가는 게 좀 위험하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런 일상도 일상이고 이걸 파보면 뭔가 나오겠다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서>에만 국한된 질문은 아니지만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촬영이 진행되는 장소는 대개 작은 동네입니다. 그런데 각 신의 장소들이 이어져 있다는 느낌보다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합니다. 여러 요소들이 작용하겠지만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숏의 크기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감독님은 미디엄숏을 가장 많이 쓰고 가끔 클로즈업과 줌인을 씁니다. 조망의 숏이나 롱숏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롱숏의 어떤 점이 불편하신가요. =느낌 때문이 아닐까요. 일단 롱숏을 쓰면 인물이 조그맣게 보이기 때문에 굉장히 긴 줌을 해야 하는데 그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지루하게 되고, 컷으로 나눠서 인물에게 접근하면 컷으로 컨티뉴어티를 만들게 되는데 전 그런 컷 컨티뉴어티가 불편한 거 같습니다. 롱숏은 풍광이 주가 될 수도 있는데, 풍광이란 건 과장해서 말하면 100명이 다 똑같이 볼 수도 있고 100명이 다 다르게 볼 수도 있어요. 기막힌 풍광을 찍으면 모두가 멋지다고 느끼겠고, 애매한 풍광이면 그로부터 모두 다른 것을 느끼겠죠. 미디엄숏을 사용해도 배경이 충분히 장면에 들어오는 것 같거든요. 표현력과 힘을 지닌 인물이 움직이면서도 뒤로 풍광이 어우려져서 좋은 것 같아요.
-감독님의 영화에는 누락된 숏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정유미가 이자벨 위페르에게 좋은 곳을 보여주겠다며 같이 걸어나갑니다. 그러나 다음 신은 늘 이자벨 위페르 혼자입니다. 어떤 숏이 빠져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은 조금씩 불안에 빠집니다. 감독님 영화에서 찍히지 않는 장면들이 찍힌 장면들과 맺는 관계가 늘 궁금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의 경우 어떤 장면을 찍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까. =결과적으론 생략되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현장에서 생각하는 사람 입장에선 어떤 숏을 빼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다음 숏으로 넘어가는 것이 뭔가를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전체가 있고, 거기서 뭘 생략한다는 식이기보다는 뭘 앞으로 조금씩 만들어나가는 것 같은 거죠. 하지만 다른 입장에서 보면 생략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생략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니깐, 만들어내면서 생략의 대상이 아닌 걸 처음부터 생각하려 한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논리적인 대답이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여쭙겠습니다. 숏의 길이는 어떻게 결정되나요. 그 길이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예컨대 앞선 질문의 숏에서 두 사람이 빠져나간 다음의 빈 공간을 찍는데, 어디서 끊으면 맞다는 판단이 어떻게 이뤄지나요. =신의 말미에는 그 신 안에서 뭔가 쌓여 있는 게 있을 거고, 그 말미를 구성하는 제스처이든 대사이든 여운의 폭이 됐건 그런 요소들을 느끼고 그러다 보면 그 신 안에서 쌓인 것들을 받아내면서 충분하다고 느끼게 되는 움직임, 대사의 포인트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편집 단계에서 숏 길이를 조정하는 편입니까, 현장에서 결정하는 편입니까. =길이의 대부분은 촬영할 때 거의 결정한다고 봐야죠. 중요 대사 행위들이 거기서 구체화되니까요. 나중에 편집하면서 세밀한 조정을 하고요.
-이자벨 위페르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람으로서 어떤가요. =사람으로서 그렇게 잘 알 만큼 오래 보진 못했어요. 술을 많이 먹었다든지 속얘기를 깊이 나눴다든지 그러진 못했거든요. 사람으로서 되게 안정됐고요, 하여간 같이 작업하고 나서 더 좋은 느낌 갖게 됐어요. 정말 재능이 넘치는 배우이면서도 평범한 삶의 좋은 점들을 잃지 않고 살려고 하는구나,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영화를 만들 때 감독님은 배우와의 사적인 교감을 중시하십니다. 그 교감을 통해서 대사, 이야기, 결말까지 정해지고요. 주연배우가 낯선 외국인이라는 점이 그런 면에서 힘들진 않았나요. =배우를 처음 만나고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 만나는 횟수가 요즘은 많아야 네다섯번이거든요. 주연배우일 경우가 그렇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두세번 정도 만나고. 이자벨은 파리에서도 예전에 두번 만났고, 서울에서도 한번 만났고, 전화통화도 여러 번 했고. 다른 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적게 만났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요. 다만 술을 많이 마시고 이런 과정은 없었지만.
-이번에도 <북촌방향>의 눈처럼 날씨의 우연이 절대적 힘이 됐습니까. 비가 많이 와서 힘들진 않았습니까. =비를 피하느라고 텐트 치고 그럴 때 조금 귀찮았고, 기계에 물이 들어갈까봐 신경 좀 쓰이고 그런 정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어요. 결국 비 때문에 우산이 소품으로 등장하게 됐고, 우산으로 영화의 끝을 맺게 됐잖아요. 좋죠 뭐. (웃음)
-<북촌방향>의 결말은 후반작업 단계에서 얼마간의 고민 끝에 정해진 걸로 압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땠나요. =이 영화의 결말은 그 장면을 찍고 난 다음 이게 엔딩 신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일찌감치 정해진 셈이지요.
-일반적인 질문을 좀 하고 싶습니다. 감독님의 영화는 절대적으로 현재적인 순간에 몰두합니다. 감독님에게 미래라는 건 어떤 걸까 궁금해졌습니다. =미래를 응시할 때 사용하는 사고의 틀이 있잖아요. 그 틀이 있으니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저도 그런 틀 속에서 살아가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은 그런 틀 없이 현재 속에 있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모자라고 짧지만 그 순간들 속에서 느낀 것들이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진짜 미래란 우리가 절대 알 수 없는 무엇이겠죠. 우리가 말하는 미래는 우리 마음속의 창작일 뿐이고요. 하지만 사람이면 그런 틀 속에서 사고하는 걸 피할 수 없는 거고, 그게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현실이란 것도 그런 사고의 틀로 만들어지고 굴러가는 거니깐. 그런데 틀로부터 자유롭게 순간에 있을 수 있으면서 느낀 것들은 그 미래, 그런 현실의 허구성을 느낌으로 느끼게 해줍니다, 관념이 아니라. 그래서 조금 편해질 수 있죠.
-다른 질문 한 가지는 죽음에 관한 겁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 “앞으로 홍상수 영화에서 절대 등장하지 않을 장면 한 가지를 말할 수 있는데 그건 살인장면이다”라고 추측해서 쓴 적이 있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론 실제로 그랬습니다. 제 예감이 맞을까요. =죽음도 죽음 나름일 것 같아요. 사랑하는 누나가 죽었다, 그런 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이유로 어떻게 그려내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하지만 어떤 사람을 죽이는 과정을 제 영화에 담는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런 것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당위나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 어차피 선택인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택인 것을 진짜 믿을 수 있게 되면 괜한 짓이 줄어들고, 지금에 감사하게 되고, 그러면 가깝고 편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집중하게 되는 거 같습니다.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자신이 만든 영화이지만 각 영화에 대한 감독님의 느낌은 조금씩 다르잖아요. <옥희의 영화>는 보기에 조금 더 편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느낌인가요. =편집 끝나고 영어 때문인지 온전히 느낄 때까지 다른 영화보다 시간이 걸렸습니다. 프린트 만들 때 문제가 생겨서 다른 영화보다 결과적으로 훨씬 더 많이 보게 됐는데, 지금은 좋은 느낌입니다. 여러 번 보는데도 이상하게 지루함이 훨씬 덜하고, 볼 때마다 쉽게 부분부분에 빠지는 걸 느낍니다. 이 영화를 생각하면 그냥 기분이 좋습니다, 맑고 귀엽고. 맞는 사람이 보면 좋은 영화가 될 것 같다는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