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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 적요하고도 푸릇한 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김성훈 사진 오계옥 2012-05-10

<은교>의 박해일

말은 또박또박, 느리게 했다. 시선은 먼 곳을 향했고, 얼굴은 찡그림 하나 없이 여유로웠다. ‘고요하고 쓸쓸하다’라는 뜻의 적요(寂蓼)라는 이름과 더없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흰머리로 가득한 <은교>의 이적요와 달리 박해일의 머리는 검은색이었고, 짧은 머리는 동안인 그를 더욱 젊어 보이게 했다. 외양적인 면모만 놓고 보면 이적요와 실제 박해일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것 같은 그는 아직 ‘이적요’를 떠나보내지 못했다고 한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던 봄 같지 않은 어느 봄날, 이적요와의 이별을 앞둔 박해일은 유독 쓸쓸해 보였다.

-오늘이 몇 번째 인터뷰인가요. =셀 수도 없죠. 아마도 서른 몇 번째? 매 작품 끝날 때 ‘이런 작품을 이렇게 찍었다’고 얘기하는 게 이제는 편해요.

-정지우 감독에게 처음 <은교> 출연을 제안받았을 때 일흔살의 이적요가 아닌 또래 나이인 소설가 서지우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감독님께서 처음부터 분명하게 이적요 역을 제안하셨어요. 시나리오를 받기 전 원작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 다른 캐릭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읽는 내내 이적요만 생각했어요. 서지우도 있는데 감독님은 왜 내게 이적요를 제안하셨을까 궁금해졌죠.

-노인 역할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를 비롯해 감독님, 송종희 분장팀장님 모두 이적요에 대한 이미지를 100% 준비하고 뛰어든 건 아니에요. 테스트 분장할 때 기분은 이랬습니다. 폭탄 설치했다가 해제할 때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랄까. 분장하는 데 14∼15시간 걸렸어요. 당황스러웠죠. 매번 이렇게 해야 하나 물어보지도 못하고.

-영화를 본 관객이 이적요를 캐릭터가 아닌 배우 박해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박해일을 아는 관객은 ‘그냥 박해일이 이적요를 연기하고 있구나’라고, 모르는 관객은 ‘젊은 배우가 노인 분장을 하고 연기를 했더라’라고 보시겠죠. 아무 정보 없이 극장을 찾은 관객은 ‘그냥 노인이 나오네’라는 반응을 보일 테고. 반응의 차이는 여러 가지인데,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박해일을 안다고 하면 ‘박해일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극장을 찾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특수분장 때문에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했습니다. 물리적으로 고된 작업이었을 것 같아요. =촬영 전날 자정에 분장하러 가면 특수분장팀 4명, 제작부 한명, 연출부 한명, 매니저 그리고 저 이렇게 8명이 좁은 방에 모여요. 조명이 켜지면 그 좁은 공간에 8명의 위치가 정해져요. 분장 의자에 앉기 전에 서재에서 훌라후프를 50번 정도 돌려요. 장시간의 분장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죠. 운동을 마치고 마음을 잡으면 저를 비롯해 8명이 각자 역할을 하기 시작해요. 특수분장팀은 분장을, 연출부는 이적요에 어울리는 음악을 틀거나 직접 녹음한 은교의 목소리를 들려준다거나. 매니저는 차를 갖다주고 중간중간 간식을 만들어 공수하죠. 특수분장 때문에 하루 촬영하면 하루는 반드시 쉬는 식으로 격일마다 촬영했어요.

-현장에서 스탭과 동료 배우들이 실제 어른처럼 대했다면서요. =분장이 끝나면 20분 정도 이적요를 받아들이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요. 그리고 현장에 가면 스탭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은 분장된 상태의 저를 맞는 거죠. 촬영 초반에는 감독님을 비롯해 미술감독, 촬영감독 등 모든 분야의 스탭들이 저를 기준으로 작업을 해야 했죠. 그건 배우를 위한 서포터로서가 아니라 그들도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 저를 기준으로 촬영이든 미술이든 생각을 정리하고 감을 잡기 위한 거죠. 이적요가 장르영화의 캐릭터였다면 스탭들은 이적요를 박해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실제로 옆집에 살 법한 사실적인 캐릭터다 보니 스탭들도 저를 진짜 할아버지로 대한 것 같아요. 덕분에 저는 이적요에 더 몰입할 수 있었고. 동료 배우인 김무열, 김고은씨도 제게 ‘스승님’,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본인들의 연기를 위한 거고. 저 역시 주고받는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영화의 초반부, 이적요와 서지우가 맥주잔을 러브샷하는 모습은 원작 소설에 없는 장면입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를 짧고 굵게 보여줬죠. 시나리오에는 다른 식으로 묘사됐어요. 두 사람이 술을 마신다, 정도로 구체성을 덜 띤 느낌이었죠. 술을 마신다 하면 현장에서 어떻게 술을 마시고, 무엇이 세팅됐는지 궁금해지잖아요. 고심했던 감독님이 내린 선택은 ‘술 한상 차리자’였어요. 통닭 배달시키고, 맥주도 두고. 그리고 옆에 꽃을 놓자고. 느낌이 이상했어요. 리허설을 했더니 더 어색했죠. 남자 둘이서. 무열씨와 ‘충분히 마셔보자’는 기분을 살려놓고 러브샷을 했더니 ‘아, 이제 이적요와 서지우의 관계가 영화에서 시작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현장에서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시퀀스보다 일상적인 모습이 들어간 시퀀스를 찍을 때 테이크가 훨씬 더 많이 갔다고 들었어요. =일상적인 면을 연기할 때가 가장 어려웠어요. 특수분장임을 감안해서 릴렉스한 연기를 해야 하는 첫톤을 잡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다음부터 기어 변속하는 것처럼 캐릭터가 체화하는 속도가 붙더라고요.

-캐릭터가 제 옷처럼 편하게 느껴진 건 언제였나요.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 조금씩 정리가 되고 있다고 느꼈던 때는 은교가 정원 의자에 앉아 있고, 이적요의 집에 아르바이트하러 오고, 은교와 이적요가 시에 대한 물음을, 연필에 대한 물음을 베란다에서 주고받는 이후부터인 것 같아요.

-은교가 이적요의 가슴에 헤나를 그려주는 장면에 등장하는 이적요의 상상은 제법 의미심장합니다. 자신의 상상 속에 등장한 이적요는 일흔살의 이적요가 아닌 젊은 이적요였어요. =은교가 이적요에게 젊은 시절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이 장면을 통해 이적요의 태도를 알 수 있어요. 이적요의 상상 속에서 이적요가 청년의 모습이 아닌 70대의 그것이었다면 그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되는 거죠. 극중 유일하게 이적요가 뛰어다니는 장면이기도 하죠. 뛰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이 많았죠. 감독님께서 평소 저도 보지 못한 표정을 오케이해주셨어요. 재미있었던 건 노시인 캐릭터에 젖어들어 있다가 갑자기 청바지와 면티 하나 입고 뛰려니까 생각보다 몸이 잘 안 따라주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굉장히 편했어요. 노인 분장을 안 하고 물리적인 내 몸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자체가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 싶은 메시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편한가. 지금 청춘이, 젊음이.

-감정적으로 가장 동요했던 건 역시 마지막 장면인가요. =마지막 장면에서 잠깐 리와인드해보죠. 첫눈 오는 날 은교가 이적요를 찾아와 “생일 축하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제가 그러죠. “은교가 왔구나.” 개인적으로 그 장면이…. (한참 말을 잇지 못한다.) 그게 굉장히…. 그 앞장면까지 찍은 호흡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때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은교가 왔구나”라는 대사는 마지막 장면의 “은교야, 잘 가라”라는 대사로 끝나는 느낌이었습니다. =엔딩장면 촬영날 감독님은 평소보다 서너 시간 일찍 출근하셨어요. “분장을 멈추고 얘기 좀 하자” 그러시더라고요. 어떻게 찍을 건지 아직 결정을 못하셨대요.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어요. 막상 은교가 찾아와도 은교를 마주하지 못할 것 같다고. 은교와 많은 대화를 주고받는 건 심리적으로 쉽지 않다고. 그래서 은교가 이적요의 방에 들어왔을 때 “이적요가 자는 건지, 죽은 건지 모르는 상태로 보이게 등지고 누워 있는 건 어떨까요”라고 제안을 드렸어요. 그렇게 동의를 하고 찍었는데, “은교야, 잘 가라”란 대사가 입에서 나오자 가슴이 먹먹하더라고요.

-차기작은 임필성 감독의 신작 <주말의 왕자>입니다. =한국판 <행오버>라고들 하는데, 아직 그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어요. 감독님이 현재 시나리오를 쓰고 계시기도 하고, 그 표현을 쓰는 걸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시나리오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다소 조심스럽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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