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계의 올해가 궁금한가. 그렇다면 BH엔터테인먼트 손석우 대표의 책상을 털어라! 1년에 그가 접하는 시나리오만 대략 400~500편. 충무로의 모든 이야기들이 이곳으로 몰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략은 열심히 읽는 거다. 해답은 시나리오에 있다.” 배우에게 객관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는 매니저로 유명한 그의 철칙이다. 그의 일과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결국 산같이 쌓인 시나리오를 읽고 시장의 방향을 가늠하고, 그걸 통해 분석안을 내놓는 것이다. “고려 중인 작품이 이병헌이 가야 할 목표와 배합하는지, 논리적 판단은 회사의 몫이다. 배우는 그런 논리적 판단이 아니라 온전히 연기에 대한 명분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이 철저하게 분업화되어야 한다.”
이병헌뿐만 아니다. 한효주, 한채영, 김민희, 고수, 진구, 배수빈 등 소속사 톱배우들에게 손석우 대표의 이같은 원칙은 차등없이 적용되는 사안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노력이 BH엔터테인먼트의 배우를 다른 기획사 배우보다 점점 부피감을 가지게, 연기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믿음이다. “우리 배우 각자의 컬러, 영역이 다 다르다. 이 문제는 배우 영입 때부터 충분히 고려하는 사항이다. 탐나는 배우가 있더라도, 기존의 소속 배우와 비슷한 지점이 있다면 제외됐다. 우리 회사는 나가긴 쉽지만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 오픈 때 모토였던 ‘부티크 매니지먼트’는 어느새 지금의 BH엔터테인먼트를 규정하는 뚜렷한 색깔이 됐다.
BH엔터테인먼트도 햇수로 이제 5년이 된다. 로드매니저로 시작, 15년간 이 업계에 몸담아온 그는 한국 매니지먼트계의 변화를 몸소 체득한 장본인이다. “처음 이 일을 할 때 가장 신기했던 게 촬영 절반쯤 돼서 개런티 조율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거였다. 아예 계약서가 없는 경우도 있더라. 잊어버린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거다. 그게 1990년대 후반이니, 그리 멀지 않은 과거다.” 그는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금융기업 자본의 유입으로 인해 기획사들이 투명화되는 시기를 모두 경험했다.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경영 마인드가 부실한 상태에서 외부자본이 들어오고, 상장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매니지먼트사가 악이용당한 측면도 없지 않다. 지금의 BH엔터테인먼트는 이같은 부침을 모두 겪으며 안팎으로 시끄러웠던 시절을 모두 통과한 뒤의 해답 같은 존재다. “회사 내실과 기본적 근간의 필요성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그 길로 당장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은 과연 어떤 구조로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하고 있는지. 국내에 토착화할 수 있는 시스템은 무엇인지를.”
관련학과도 변변한 서적도 없는 백지의 상태. 손석우 대표는 실무자로서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체계화, 구체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원소스 멀티유즈, 초상권, 퍼블리시티 같은 우리에겐 확립되지 않았던 개념들을 불러왔다. 마침 PD 비리, 엑스파일, 장자연 사건 등이 불거질 때마다 곪아 있던 매니지먼트의 문제들이 하나씩 해답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미국과 일본과는 또 다른, 한국 매니지먼트의 시스템, 전형이 확립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한류 붐도 마찬가지였다. ‘불씨’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키워나가는 전략을 썼다. “이병헌이 유명해서 미국 진출한 것도 아니고, 한효주의 일본 진출도 저변이 완전히 확립돼서가 아니었다. 시도하지 않으면 없는 시장이 바로 한류시장이다.” 물론 그 시장에 대한 실질적 조망과 통찰은 손석우 대표의 몫이었다. “첫 번째는 현지의 파트너를 개발할 것, 또 어느 한쪽의 제안이나 판단이 전부가 되지 않게 각 분야에 맞는 전문회사와 에이전시와의 계약을 통해 채널의 다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어느 한쪽의 제안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균형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축적된 경험이 고스란히 해외시장 진출에 대한 노하우가 되어주었다.
손석우 대표는 원래 매니저 이전 금융권에서 일을 했다. 성룡 영화를 많이 보고, <라붐>과 <더티댄싱>을 보며 감성을 키운 그에겐 도통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이후 음반 프로듀서의 꿈을 키우던 그가 최종 안착한 곳이 바로 매니지먼트 업계였다. 몇 천만원의 연봉이 순식간에 월 50만원의 수입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그때 비로소 행복을 느꼈다고 한다. “10년이 지나고 나니 그제야 나도 매니저라고 할 수 있겠더라.” 뼈를 묻을 직업인 만큼 그에겐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영화는 투자배급사에서, 방송은 방송사에서 너무 많은 수익을 가져간다. 기획사도 많이 가져오지만, 실상은 그 대부분의 몫이 아티스트에게 돌아가는 구조다. 제일 안타까운 건 현업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15년 전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받던 급여 수준이라는 거다. 절대 갑이라고 되어 있는 누군가는 양보를 해야 할 거다. 다행히 우리 배우들은 양보가 잘되는 편이다. (웃음)” 자신부터라도 먼저 시작하자는 게 그의 다짐이다. BH엔터테인먼트의 채용공고를 보면 손석우 대표의 마인드를 단박에 알 수 있다. 4대보험, 퇴직금, 트레이닝 지원비, 외국어 교육 지원, 인센티브까지. 업계에선 파격적인 대우다. “오너가 잘하면 2위에 불과하다. 직원 모두가 1위가 되어줘야 한다. 줄 거 정확히 주고 요구하는 합리적인 시스템 정착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마인드가 때론 전체 시스템을 움직이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손석우 대표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이병헌이 말하는 손석우 대표 “매니저는 이성적이고 전략적이고 계산적이어야 하지 않나. 근데 가만히 보니 이 친구가 아티스트더라.” 로드매니저 때부터 따지면 벌써 12년. 이병헌만큼 손석우 대표의 심중을 정확히 꿰고 있는 이도 없을 거다. 근데 어째 불만이 앞선다. “뉴욕에 CF 촬영가고, 뉴올리언스에 촬영가면 들른다. 근데 나랑 있는 시간은 1∼2시간이고 재즈바 투어에 더 바쁘더라. (웃음)” 감성적인 매니저를 곁에 뒀다는 불평과 달리, 이병헌은 그런 손석우 대표를 적극 신뢰한다. “매니저는 배우와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지만, 그럼에도 가장 객관적으로 배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친구는 그런 균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향이 아티스트라 아티스트의 마음을 이해해준다. 단순한 사업 파트너가 아니라 정이 느껴지는 친구다.” 지난 세월, 손석우 대표가 바쁜 와중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또 과중한 업무로 병원에 입원하는 등의 과정을 지켜본 이도 이병헌이었다. “많은 배우들이 우리 회사를 오고 싶어 하는 건 톱배우들 때문이 아니라, 손석우에 대한 신뢰, 매니저들을 대하는 합리적이고 정감있는 비즈니스 때문이다.” 인덕이 있는 손석우 대표와 함께 일하는 자신이야말로 인덕이 있다는 그. 둘의 견고한 파트너십의 비밀이 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