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어느 봄날의 오후, 정우성과 이정재가 잠수교를 걷는다. 한가롭게 잠수교 주변을 산책하던 사람들이 그들을 목격하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든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만 존재할 것 같던 두 톱스타가, 최소한의 스탭만 대동한 채 인적이 드문 잠수교 위를 걷고 있는 풍경이 영락없이 초현실적이다. 14년 전에도 이들은 바람 부는 잠수교를 걸었다. 하와이언 셔츠와 은갈치 양복을 걸쳐 입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채 소리를 지르는 <태양은 없다>(1998) 포스터 속 도철과 홍기의 모습으로. 오직 권투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우직한 권투선수 도철(정우성)과 ‘인생은 한방’이라고 믿는 흥신소 직원 홍기(이정재)의 우정을 다룬 <태양은 없다>는, 스물여섯 동갑내기 배우 정우성과 이정재의 눈부신 육신과 젊음을 봉인한 영화였다. 관객이 길거리에 붙어 있는 포스터를 몰래 떼어가며 그들의 청춘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무렵, <비트>와 <모래시계>를 통해 당대 최고의 신인 배우로 손꼽히던 정우성과 이정재는 각자로부터 동료 이상의 화학작용을 느끼고 있었다. 1998년, 도심을 떠돌며 도철과 홍기로서의 한철을 함께 보낸 이들은 영화 촬영이 끝난 뒤에도 꾸준히 연락하며 우정을 나눴고, 지금은 명실상부한 영화계 ‘절친’이 됐다. <태양은 없다>를 두고 “두 사람의 인생에 좋은 선물 같은 영화였다”(정우성)고 회상하는 두 친구의 재회는 애틋하고 유쾌했다.
-<태양은 없다> 포스터를 촬영했던 잠수교에 다시 왔다. 소감이 어떤가. =정우성_추웠지. (웃음) 이정재_그때도 추웠다. 정우성_겨울로 접어들 무렵 촬영했는데, 의상이 반팔 차림이다보니 바람이 불 때마다 엄청나게 추웠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다시 만난 게 얼마 만인가. 최근에도 만났나. =정우성_바로 어제 만났다. (웃음) 같이 밥 먹었다. 이정재_별일 없으면 수시로 본다.
-그 우정은 <태양은 없다> 때부터 시작된 건가. =정우성_(고개를 끄덕이며) 예전엔 인사 정도만 하고 지냈던 것 같다. 처음 만난 건 1995년 <SBS 스타상>의 신인연기상을 함께 받았을 때다.
<태양은 없다>의 포스터 촬영을 위해 1998년 당시 잠수교를 걷고 있는 정우성과 이정재. 워낙 강바람이 센 데다, 초겨울로 접어들 무렵이라 굉장히 추웠다고 한다.
시나리오와 애드리브 사이
-당시 정우성씨는 <아스팔트 사나이>의 카레이서 동석을, 이정재씨는 <모래시계>의 보디가드 재희를 연기했었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신인 남우라는 평가를 받을 때다. 그런 두 사람이 한 영화로 만난다는 기대감도 컸을 것 같다. =정우성_아무래도 촬영 전에 만났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함께하는) 첫 촬영이라는 반가움, 우리의 조합이 어떻게 맞아들어갈까 싶은 설렘과 궁금증, 그리고 흥미로움이 있었던 것 같다. 또 어린 나이였으니까 유쾌한 감정들도 있었고. 이정재_두 시간 내내 둘이 붙는 장면이 많은 영화이다보니 주변에서 자꾸 더 친해져야 한다, 친해져야 한다 그랬다. 우리도 서로 친해지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당시엔 우성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말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감정은 있지만 그 감정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표현력이 부족했다고 해야 할까. 정우성_표현에 대한 필요성을 못 느꼈지. 이정재_주변에서 친해지라고 하고 본인들도 친해져야 한다는 걸 느끼니 촬영 들어가기 전에 술자리도 몇번 갖고 했다. 그런데 둘 다 말수가 진짜 없었다. 30분 동안 “한잔 더 해”, “네”, 이렇게 건배하고, 또 가만히 있다가 “괜찮아요?” 물어보고. (좌중 폭소) 서너 시간 동안 그렇게 술을 마셨다. 그런데 그게 전혀 안 불편했다. 나도 참 희한했다. 서로 말이 없으면 불편해서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그러잖나. 그런데 그러지 않아도 편하더라. 정우성_내 입장에선 <태양은 없다>가 <비트>팀이 다시 모여 만든 영화잖나. 정재씨가 들어와서 남의 팀에 합류했다는 느낌이 들면 안될 것 같았다. 손님 같은 느낌이 아니라 같은 주인이 돼야 하는 거니까. 그런 점에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태양은 없다>는 전적으로 도철과 홍기라는 캐릭터의 힘에 의존하는 영화였다. 현장에서 역할에 대한 고민을 많이 나눴나. =정우성_글쎄. 서로의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눈 것 같진 않다. 그런데 당시 김성수 감독님이 촬영하다 뜬금없이 “홍기는 왜 그러는 거야?” “도철이는 왜 그러는 거야?” 하고 배우에게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작업방식이 그렇다보니 배우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그래서 어떤 장면에 대해 내 캐릭터만 집착하기보다는 홍기가 나오는 신에서도 좀더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서로 의논해 아이디어를 영화에 반영하곤 했다. 이정재_거의 모든 장면을 그렇게 찍었다. 정우성_홍기가 여름에 자동차 히터를 틀어놨던 장면이 생각나네. 이정재_“홍기는 이렇게 가둬놔야 해”라며 이 아저씨(정우성)가 설정한 장면이다. 정우성_이범수씨의 단발 머리에 관한 대사도 우리 애드리브였다. 이정재_“재수없는 놈, 아줌마 머리를 해서…”라는 대사였지.
-당시 인터뷰를 보니 심산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며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반영했다고 하더라. 예를 들어 이범수씨가 연기한 사채업자 병국의 “너 내가 무슨 얘기 하면 그냥 흘려듣지?”라는 대사는 김성수 감독이 연출부를 혼내며 많이 했던 말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제작진의 실제 모습이 반영된 장면이 있나. 이정재_홍기가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 보면…”, “<전설의 고향> 알지?”처럼 영화나 드라마를 인용한 말을 많이 하잖나. 이게 내 예전 매니저(김정수)가 써준 대사다. 그리고 실제로 그분이 <태양은 없다>에서 미미(한고은)의 매니지먼트 사장으로 출연했다. 어떻게 보면 홍기의 롤모델이 그분이었다. 참 굴곡 많은 인생을 사셨기 때문에.
“옛날 그 표정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날의 촬영을 위해 <태양은 없다>를 다시 보고 나왔다는 최성열 사진기자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14년 만에 잠수교를 다시 걷는 정우성과 이정재의 표정만큼은, 20대 중반의 도철, 홍기와 다르지 않았다.
-김성수 감독은 현장 장악력이 대단하다고 소문난 감독이었는데, 배우에겐 어땠나. 정우성_도제 시스템에서 연출을 공부했던 감독님이라 연출부들에겐 엄했다. 하지만 배우들에겐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이정재_지금은 촬영 장비가 워낙 좋아졌으니 조명을 디테일하게 안 쳐도 후반작업에서 손보면 되잖나. 당시엔 기성 감독들이 하루에 많이 찍어야 20컷이었다. 그런데 김성수 감독은 하루에 50컷을 찍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 (웃음) 현장에서 스탭들에게 어쩌다 큰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정우성_달리는 장면이 많은 영화였잖나. 카메라 테스트할 때도 적당한 속도로 달려도 될 것을 연출부가 군기가 바짝 서 있으니 전력질주하다가 보조출연한 사람과 꽝 부딪혀서 기절하기도 했다. 그렇게 기절하는 거 보면 “야, 저 새끼 왜 미친 듯이 빨리 뛰냐. 누가 빨리 뛰라고 했어!” 그러는 거지. (좌중 웃음) 그리고 조동오 조감독은 도철과 홍기가 해변가에서 축구하는 장면을 테스트하는 데 온 힘을 다해서 찍다가 갈비뼈에 금이 갔다. 그만큼 연출부 군기가 셌었다. 배우에겐 좀 달랐다. 우리의 이야기를 많이 수용해주는 분이었다. 끊임없이 우리를 홍기, 도철이라 여기고,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가 꼽은 명장면
-스스로 생각하는 도철과 홍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정우성_사실 나는 도철이에 대해 반성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그 당시 도철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나 싶다. 감독님이 “도철이는 왜 그래?”라고 물었을 때, 나에게 있는 부분을 끄집어내 도철이란 인물을 만들면 되지 나에게 없는 도철이의 모습은 뭘까, 이런 고민을 잘 안 했던 것 같다. 오히려 촬영장에서 사소한 아이디어들을 내며 내가 마치 도철인 것처럼 착각을 했었던 것 같고 진짜 도철이에 대해선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도철이에게 미안하다. 이정재_말은 저렇게 하지만 우성씨가 엄청나게 준비를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태양은 없다> 이전까지 시나리오작가나 감독이 써놓은 시나리오에서 더 나아가 애드리브를 한다든지 대사를 다른 버전으로 준비해온다든지 한 적이 전혀 없었거든. 그런데 우성씨는 현장에서 작업을 그렇게 하고 있더라. A4 용지에 엄청나게 뭔가를 써와서 감독님과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사실 그전까지 난 연기나 촬영은 다 ‘일’이라고 생각했다. 충분히 즐기질 못했다. 이유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연기를 정식으로 배워본 경험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고, 그런 까닭에 소극적으로 연출자의 디렉션을 따라 움직였던 것 같다. 그런데 <태양은 없다> 현장에서 감독과 배우가 뭔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배운 점이 참 많다. 정우성_정재씨가 연기했던 홍기도 굉장했다. 진짜 명연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 양반 왜 저렇게 연기를 잘해? 가만있자, 나 지금 연기를 잘하고 있는 건가? 이렇게 자극이 됐다. 그리고 현장에 있으면 자극도 되지만 즐겁잖나. 만나서 같이 한 신 한 신을 찍어가고, 홍기와 도철이가 되어 압구정 뒷골목을 뛰어다니고 얘기하고,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그 당시 20대의 정우성이 보낸, 한 인간으로서의 좋은 추억처럼 남아 있을 정도로 촬영장에서 호흡이 좋았다.
-서로의 명장면을 꼽는다면. =정우성_정재씨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술 마시며 혼자 서 있던 장면이 참 좋았다. 도시의 남자아이가 갖지 못하는 욕망에 대한 아픔, 그런 걸 정말 잘 표현했던 것 같다. 이정재_촬영을 저렇게까지 치열하게 해야 했나 싶은 장면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 도철의 권투시합 장면이다. 일주일에서 열흘을 내리 밤새며 촬영을 하는 거다. 당시 김성수 감독님은 자기의 한계를 봐야지 뭔가를 했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김성수 감독님은 그렇지, 이 아저씨(정우성)는 “당신 그래? 나도 그럼 같이 갈 거야” 이런 스타일이지, 거기다 정두홍 무술감독은 그때 식탁도 씹어먹고 돌도 깨먹을 사람이었다. (좌중 폭소) “우성아, 한번 더 해야지” 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사람을 짜내더라. 사실 그게 액션 신이 아니라 감정 신이거든. 도철이 입장에선 권투가 자기의 꿈과 욕망의 모든 것인데,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만둬야 하는 복잡한 감정이 많았을 것 같다. 그런 장면을 찍는 걸 보면서 이 사람들이 정말 끝장을 보려 하는구나, 그런 결기를 느꼈다. 그 시합을 마치고 홍기가 로커에 들어가는데 도철이가 “홍기야, 나 진짜 이길 수 있었다”라고 아쉬움을 표현하는 장면. 난 그 장면이 가장 좋았다.
-<태양은 없다> 당시 둘 모두 20대 중반이었다. 이미 <비트>와 <모래시계>로 각자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엔 배우로서 어떤 고민을 했었나. =정우성_그땐 고민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들을 습득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너무 포괄적으로 습득하다보니 연기에 대한 고민을 부분적으로 하지 않았나 하는 자책도 든다. 아까 도철이에게 미안했다는 말을 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그땐 작업 자체가 정말 신날 때고, 에너지가 넘쳐 앞뒤 안 가리고 즐기고 받아들일 때였다. 이정재_솔직히 말하면 20대 때 연기에 대한 고민을 잘 안 했던 것 같다. 철이 좀 늦게 든 편인데, 물론 <태양은 없다>를 찍으며 연기가 이렇게 재밌구나 하는 것을 처음 느꼈지만 다른 현장에 갔을 때 호흡이 안 맞는 경우도 더러 있었거든. 그럴 때마다 “아, 이건 역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고. 그렇게 왔다갔다 하다보니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금방 지나갔다. 배우라는 일이 재미있기도, 재미없기도 하던 그 시절을 보내고 나니 비로소 일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 앞으로 일을 좀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지나간 날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은 있다. 정우성_사실 영화계는 그때 이정재, 정우성에게 더 많은 청춘영화를 제시했어야 했다. 그런데 없었잖나. 영화계의 고민은 굉장히 개인적이었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둘러보고 활용할 줄 몰랐던 것 같다. 아쉬웠던 점이 20대를 돌아보면 더 많은 작품을 했어야 했는데 당시를 돌이켜보면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나, 그런 작품들을 우리에게 제시했었나 하는 생각도 들거든. 물론 당시 영화계가 자기 자본도 없고 열악할 때였으니까 그랬겠지만.
‘아, 저 사람은 진짜 남자다’
-<태양은 없다> 이후에도 우정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하나. =정우성_‘왜 그랬을까’라고 의문을 던질 새도 없이 정말 자연스럽게 관계가 유지됐다. 동성 친구끼리도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게 있지 않나. 또 우리가 같은 동네에 살아서 생활권이 비슷했다. 그래서 시간이 맞으면 “정재씨, 뭐해요. 술 한잔 할까요” 하면서 만나곤 했다. 그리고 동료로서, 남자 배우로서,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매력을 가진 동료를 본다는 건 유쾌하고 기분좋은 일이었다.
-서로에게 어떤 매력을 느꼈나. =이정재_일단 정말 잘생겼잖나. 우성씨가 95년에 <SBS 스타상> 신인연기상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왔을 때, ‘아니 저렇게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이 있나. 한국 사람 맞아?’ (웃음) 그렇게 첫인상이 세게 왔었다. 그리고 우성씨 성격이 굉장히 다정다감하다. 반면 난 약간 까칠하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가 분명하다. 이 아저씨는 ‘그래, 좋은 게 다 좋은 거야’ 하고 품으려 하는 스타일이니까. 난 그런 게 좋았다. 내가 갖지 못한 성격, 닮고 싶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정우성_정재씨도 처음 나왔을 때 그전에 나왔던 남자 배우들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였다. 신인이었는데, 신인 느낌이 안 들 정도로 한 배우의 내면에서 뿜어져나오는 아우라가 있었다. 당시 우리는 어렸고, 어린애들끼리 평가한다는 게 우습지만 그 나이에도 ‘아, 저 사람은 진짜 남 자다’라는 느낌이 들었고 성숙한 남성성이 뿜어져나오는 게 매력적이었다. 내가 아웃사이더, 뒷골목을 떠도는 이미지였다면 정재씨는 딱 갖춰진 정장의 이미지였다. 물론 <모래시계>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 모습이 정말 잘 어울렸다. 유럽 남자 배우 같은 느낌이었다.
-평소에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나누나. =정우성_어릴 때는 여자 얘기를 많이 했다. (좌중 폭소) 이정재_지금은 주제가 너무 많다. 정우성_온갖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 인생, 일, 가치관….
-종종 함께 전시회나 공연장에 간 모습이 목격되기도 하는데, 취향도 서로 공유하는 편인가. =정우성_그렇다. 정재씨는 그림을 좋아해서 전시회를 추천해주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도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정재_전시회 가보면 나보다 더 오랜 시간 공들여 작품을 감상하던데. (웃음) 공연은 나보다 우성씨가 더 많이 보는 것 같다. 둘의 취향이 비슷하다. 다행이지. 취미가 달랐다면 자주 못 봤을 텐데, 취미도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해서 이야깃거리가 참 많다.
-이렇게 막역한 사이인데, 누가 먼저 결혼이라도 하면 섭섭하지 않겠나. (좌중 폭소) =정우성_누가 먼저 가면 정말 좋지! 장가가지 말라고 막아야 되나. 혼자 오열하며 “갔어!” 하고 슬퍼할까봐 그러나. (웃음) 이정재_좋은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고 서로가 그러긴 하는데, 그것도 인연이란 게 있어야 되는 거니까. (웃음)
-<태양은 없다> 이후 14년이 지났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해왔고 연륜이 쌓이면서 생기는 고민들이 있을 것 같다. =정우성_오히려 갈수록 고민이 사라지는 것 같다. <태양은 없다>를 할 땐 10년 뒤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지금은 10년이 금방 지난다는 걸 아니까 시간을 더 알차게 보낼 방법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요즘은 왠지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다. 작품을 더 부지런하게 해야겠다는 욕심도 나고, 막연하게 생각만 했던 연출 계획도 가시화해보려 한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닌데도, 시간을 쪼개 쓸 수 있는 방법들이 몸에 밴 듯하다. 이정재_나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제안받는 캐릭터의 나이가 나보다 많다는 점에 솔직히 부담이 많이 됐다. 철이 덜 들어서 내 나이보다 생각하는 건 어린데, 실제 나이보다 몇살 더 많은 역할을 하려니 자꾸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불편했었다. 예전엔 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면 지금은 오히려 배역에 대한 생각을 덜어내려 한다. 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나!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정우성씨는 <첩혈쌍웅>, 이정재씨는 <도둑들>과 <신세계>인가. =정우성_<첩혈쌍웅>이 예전부터 이야기는 있었지만 다음 작품은 한국영화가 될 거다.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새로운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올해 하반기 촬영에 들어간다. 이정재_<도둑들>에선 악당 역할을 맡았다. 과거의 배신자이자 거침없는 물욕을 자랑하는 인물이다. (웃음) 이렇게 말하고 보니 <태양은 없다> 홍기의 성인 버전 같네. <신세계>에선 폭력조직 내에 잠입한 경찰을 연기한다. 박훈정 감독에게 물어보니 “스트레스를 엄청 받는, 깡패도 아닌 경찰도 아닌 남자의 아야기”란다.생각해보니 깡패 역할을 맡은 적이 없기에 우성씨에게 이런 말도 했다. “자기야, 나 깡패 역할 한번도 안 한 것 같은데. 나 스타일을 어떻게 잡아야 되니. 캐릭터를 어떻게 잡아야 되니?” (웃음)
-둘이 함께 나오는 작품을 기대해볼 순 없을까. =이정재_해야지. 해야 하는데. 정우성_영화계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 (웃음) 이정재_14년 동안 왜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는지 모르겠다! (웃음) 다시 함께한다면 <태양은 없다>처럼 티격태격하는 버디영화가 좋겠다. 정우성_나는 좀더 유쾌한 톤의 영화를 해보고 싶은데.
-(동석했던 사진기자가) 정우성씨가 연출을, 이정재씨가 배우를 맡으면 어떻겠나. =정우성_(좌중 폭소) 같이 자폭하면 안되지. 이정재_어디 회장, 부회장이 같은 비행기 타는 거 봤나. (웃음) 한 사람이 비행기 탔으면, 한 사람은 회사를 책임져야지. 정우성_다양하게 활동해야지, 한 우물 파서 같이 들어가 있으면 안되지. (웃음) 이쪽에서 좀 기반을 잡아놓은 다음에 같이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한다.
후기
인터뷰를 마친 두 배우에게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한 갤러리에서 주관하는 파티에 함께 참석하게 될 것 같다고 정우성이 답했다. 문득 바라보는 길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더라도 종국엔 도돌이표처럼 서로에게 돌아오고야 마는 <태양은 없다>의 도철과 홍기가 생각났다. 도철과 홍기가 이 도시에 여전히 존재한다면, 두 배우가 그렇듯 서로의 등을 꼭 맞대고 그 온기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